혼자 걸으니 섬이 벗해주더라
거제도 무지개길 도보여행①-쌍근마을에서 저구마을까지 9.3km
근래에 전국적으로 많은 길들이 생겼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찻길이 아니다. 일명 ‘걷기 위한 길’이다. 걷는 길에 대해 여행자는 무한정 애정을 쏟으면서도 그 씁쓸한 뒷면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언젠가 걷는 길에 대한 어설픈 추종보다는 차라리 걷지 않는 것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오전 10시. 진주에서 거제도 고현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오늘의 목적지는 거제도 쌍근마을. 거제도는 여행자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다. 뭍과 연결된 원래의 다리에다 거대도시와의 전천후식 만남이 있고 난 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곳이다. 섬 고유의 것은 진즉 사라진지 오래고 거대한 도시의 휴양지로 변모되고 있다는 것은 비단 여행자만 느끼는 어쭙잖은 감상만은 아닐 것이다.
거제도에도 걷기 좋은 길이 생겼다. 아니 생겼기보다는 원래 있던 길에다 ‘무지개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 길을 처음 간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한동안 꼭꼭 숨겨두고 싶었던 길이 외지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여행자는 발길을 끊어 버렸다.
그럼에도 이 길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마치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처럼 다시 이 길을 찾게 되었다. 분명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기억은 처음의 그 사랑으로 남아 있다. 차라리 만나지 않고 오래도록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현실의 욕구는 그 애틋함을 애써 무시해버린다.
10시에 진주를 출발한 버스는 통영에서 잠시 쉬었다. 기사님이 다른 버스로 갈아타라고 했다.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시키는 대로 버스를 갈아탔다. 일종의 환승인 셈이다. 버스가 바다를 건너는 걸 보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눈을 떴다. 고현버스정류장이었다. 여기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건데 아무리 봐도 시내버스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어묵과 계란을 팔고 있는 가게에서 쌍근 가는 버스시간을 물었다. 잘은 모르겠고 바깥에 나가면 안내도가 있을 거라고 했다. 계란 3개를 사서 감사를 표했다. 걸으면서 허기를 채울 생각이었다.
밖에서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버스 안내문을 발견했다. 벽에 부착되어 있는 안내문이 아니라 모니터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최신식 시간표였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쌍근마을 가는 버스시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기를 한참, 무작정 기다렸다. 잠시 후 모니터가 움직이더니 ‘12시 55분. 쌍근’이라고 적힌 글이 눈에 띄었다.
사곡․거제․동부․율포․탑포를 거쳐 버스 종점인 쌍근마을까지 가는 노선이다. 작은 포구마을로 가는 버스 안은 만원이었다. 중간 중간 마을에서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율포에 이르자 텅텅 비었다. 버스기사와 여행자. 빈 공간이 다소 어색하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버스는 푸른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쌍근마을에 여행자를 내려준 버스는 길을 돌렸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여 그 유래를 보니 마을 남쪽 바닷가에 큰 칼날같이 생긴 산이 두 개 있는데 이 산을 쌍날산이라 한다. 쌍근이란 말은 쌍날산의 두 쌍雙자와 작은 미날기미(미나리)의 근芹자를 따서 쌍근雙芹이라 한다고 했다. 바닷가에 미나리 근자를 쓴 것은 미나리가 잘 자라고 각종 해조류가 풍부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인근 근포마을도 미나리 근자를 쓴다.
작은 포구는 조용했다. 가끔 부두에 부딪히는 파도에 놀란 갈매기가 날개 짓을 퍼덕거리며 끼룩끼룩 울 뿐이었다. 아주머니 몇 분이 부둣가에 나와 있다. 길을 물었다.
1시 50분. 서둘러야 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쌍근에서 여차까지 15km 정도였다. 경상남도 안내책자에는 예상 소요 시간이 3시간 30분으로 나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시간 안에 걸으려면 거의 뛰다시피 경보 수준으로 걸어야 가능했다. 실제 소요시간은 5시간 정도였으며 거리 또한 20km 남짓이었다. 좀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다.
버스라도 놓친다면 그 이상을 걸을 수도 있다. 이번 여행은 며칠 후 있을 ‘경남의 길, 소셜미디어와 만나다’라는 프로그램의 사전답사 의미가 강했다. 여행자가 강의와 안내를 맡았기 때문에 사전에 이 길을 걸어 소요시간과 코스 등을 고려하여 최종코스를 잡아야 했다. 평소의 느긋함과 달리 시간에 구애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해변을 돌아 마을을 벗어나니 오랜 거목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바다와 잇닿은 산으로 오르는 시멘트길이 보였다. 이곳 쌍근마을부터 저구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은 험하여 2005년부터 차량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차량의 출입이 없으니 걷기에는 분명 좋겠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길은 걷기에 힘들었다. 시멘트길이 주는 그 팍팍함은 심한 경사까지 겹쳐 걷는 이에게 금방 피로를 주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걸었다. 오가는 차들도, 사람들도 없었다. 그저 이 따가운 햇살을 피할 그늘이 어서 나타나기만을 기대하며 걸었다.
덤불 사이로 왕조산 가는 길이 보인다. 돌아온 길을 보니 겨우 1.4km를 걸었다. 저구까지는 7.9km가 남았다. 부지런히 걸어야했다. 숲 사이로 이따금 바다가 보인다. 섬이 고개를 삐죽 내밀기도 한다. 저 섬은 무슨 섬일까. 한참동안 생김새와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추봉도였다.
긴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난다. 크게 휘어지는 길을 한참 내려가니 일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나타났다. 배낭을 멘 부부와 두 꼬마들은 얼핏 보아도 여행자 티가 난다. 허기야 이 외진 곳에서 가족이 걷는 다는 것은 분명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인적 없는 이런 길에서 만나다 보니 서로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흙길이 나타났다. 얼마나 반가운 길인가. 매번 봐도 정겨운 흙길이다. 그러나 기대는 잠시, 다시 포장길이 나왔다. 오토바이 한 대가 다가왔다. 조용한 숲속이라 엔진 소리가 엄청난 굉음이다.
때죽나무의 하얀 꽃에 벌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꽃이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 벌도 그와 같은 모습이다. 이제부터는 제법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는 길이다. 멀리 혹은 가까이 무수한 섬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전망 좋은 곳이었다. 바로 앞의 추봉도를 비롯해 용초도, 죽도, 장사도, 대덕도, 비진도, 한산도 등 점점 섬들이 바다에 떠 있다. 훌쩍 뛰어내리면 건널 수 있을 것만 같은 섬,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섬, 수평선 너머 보일락 말락 한 섬들까지 그 아름다움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제부터 혼자 걷는 쓸쓸함은 없었다. 섬들을 벗 삼아 걷는 길이다. 들릴 듯 말 듯한 파도소리와는 달리 유람선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저구항을 드나드는 소매물도 가는 배였다. 이 유람선들은 통영에서 출발하는 소매물도행 여객선과는 달리 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며 유람할 수 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유람선들이 쉴 새 없이 저구항을 드나들었다.
저구항이 시야에 들어오니 길은 어느새 내리막이다. 길은 산허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멀리 고운 모래로 유명한 명사해수욕장도 보인다. 갈림길이 나왔다. 잠시 망설이다 아랫길로 빠졌다. 한참을 내려가자 바다가 앞을 가로막더니 길이 끊겨 버렸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오르막이 너무 심해 갯바위를 그냥 넘기로 했다.
뽕짝소리 요란한 유람선들을 목표삼아 갯바위를 타고 넘었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한 끝에 저구마을에 도착했다. 쌍근마을에서 이곳까지 9.3km를 걸었다. 저구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후 명사를 거쳐 여차까지 계속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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