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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초분과 독살, 청산도의 사라지는 풍경을 찾아



초분과 독살,
청산도의 사라지는 풍경을 찾아
-청산도 마을 도보여행 ② (청산도 도락리)

부두가 있는 도청리에서 길을 따라 걸었다. 계획된 여행이 아니어서 지도 한 장으로 대충 섬의 생김새를 가늠했다. 언덕을 넘어 당리로 가던 중 마을 사람을 만났다.

도락리 풍경

“어디서 왔어요?”

“oo에서 왔습니다.”

“멀리서 왔네요. 참 살기 좋은 곳이지요.”

“청산도도 참 좋은데요.”

“저기가 도락리인가요.”

“예.”

“예전에 마을을 부르던 다른 이름이 있었나요.”

“그냥 도락리라요. 도락마을.”

 

바보스런 질문이었다. 섬에 오면 으레 섬사람들이 부르던 옛 마을이름을 묻곤 하던 병이 이곳에서도 도졌다. “참, 마을이 예쁩니다.” 그냥 허허 웃었다. 도락리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길 아래로 보이는 원색의 마을 지붕들이 눈길을 확 끌었던 것이다.


“저 동백은 개량종이 아니라 진짜 동백이라요.” 여행자가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찍고 있으니 한마디 거든다. “그러네요.” 마을주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헤어졌다. 발은 자연스레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보리밭을 둘러싼 돌각담을 느리게 걸었다. 다행히 안개는 바다 건너 멀리 걸려 있었다. 날씨가 흐린데도 햇살은 따가웠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개가 짖는다. 늘 그렇지만 여행자도 같이 짖어댄다. 낯섦과 경계를 풀어주는 여행자의 방식이다.

도락리 가는 길

마을길을 걷다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담벼락에 술, 음료수 박스를 붙여 놓은 것이었다. 가만 용도를 살펴보고 한바탕 웃었다. 박스가 일종의 창문 구실을 하고 있었다. 외양간이나 화장실에 창을 내는 대신 박스를 두어 환기와 빛이 들어오도록 한 것이다. 아주 실용적인 단면이다. 이렇게 박스로 만든 창은 당리, 동촌, 상서마을 등 청산도 여행 내내 보게 되었다. (아주 다양한 창의 형태라 이것에 대해선 다음에 별도로 다루겠다.)


마을 담벼락에는 청산도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슬로길’이라는 안내와 더불어 사진을 두어 여행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물 한 잔 하고 가요.”

 

어르신 두 분이 여행자에게 말했다.

 

“물맛이 좋아요. 한 잔 드시고 가요.”

 

재차 말했다. 여행 내내 느꼈지만 청산도 주민들은 너무나 친절했다. 접객을 해 본 이가 손님을 더 잘 맞이하듯 청산도 주민들은 이미 친절이 몸에 배여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물을 마셨다.

 

“물이 참 맛있네요. 이 우물이 오래 되었습니까?”“오래 되었지. 수백 년은 되았어. 원래 우물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 저 짝으로 가야 되어.”

동구정

동구정
東口井. 마을의 동쪽 입구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력을 보니 조선 숙종 때 성산 배씨, 강릉 유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판 우물이라고 한다. 원래는 마을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부녀자들이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물을 날랐다. 그러다보니 자연 불편하였고 1972년에 현재의 자리에 수도관을 연결하여 집수정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청산도에 상수도가 놓이면서 점점 방치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5년에 기존의 집수정을 폐쇄하고 주변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니 이내 바닷가다. 해변의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눈길을 끈다. 바닷가로 향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독살‘이었다.

군소

“이리 와 보시오. 얼릉 오시오”

 

중년의 사내가 독살로 내려서는 여행자에게 소리친다. 무슨 일인가 하고 급히 다가갔더니 물컹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이것 좀 보시오. 뭔 줄 아요.”

“글쎄요. 처음 보는데요.”

“이게 군소라는 거요. 흔히 바다 달팽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굴뱅이라고 부릅니다. 바다에 사는 집 없는 달팽이지요.”

신기해서 군소를 살짝 만져 보았다.

 

“어, 건드리면 자줏빛 물을 쏩니다.”

황급히 손을 뺐다. 군소의 용도를 물으니 무침도 먹고 다양하게 요리하여 먹는다고 했다.

김광섭 씨(57세)

“이게 지금 독살이지요.”

 

바다로 길게 늘어선 돌무지를 보고 말했다.

 

“예, 독사리입니다. 원형이 잘 남아 있지요.”

“저기는 휘리체험이라고 적혀 있네요.”

 

여행자가 현수막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잘 못 된 것이라요. 독살(독사리)체험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지요. 일본식 표기가 아닌가 싶네요.”

독살과 <화첩기행> 촬영 장면

‘휘리’는 그의 말대로 일본식 표기는 아니다. 강이나 바다에 큰 그물인 후릿그물을 넓게 둘러치고 여러 사람이 두 끝을 끌어당겨 물고기를 잡는 것을 흔히 ‘휘리
揮罹’라고 한다. 독살과는 다른 고기잡이 방식이니 이곳에서 휘리 체험이라고 적은 것은 맞지 않다. 실제 그물 고기잡이 체험방식을 택하고 있다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독살

‘독살’은 남해섬의 석방렴과 같은 형태로 해안가의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법이다. 그물을 쳐서 잡는 개매기와는 달리 돌로 담을 쌓아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이나 남해안에서 볼 수 있다. 육지를 향해 ㄷ자 혹은 반원 모양으로 갯벌에 1.5m 정도의 담을 쌓고 밀물 때 돌담 안으로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나가지 못하게 하여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오늘 무슨 촬영이 있나 봐요?”

 

여행자에게 군소를 보여줬던 김광섭 씨(57세)에게 물었다.

 

“대전방송에서 <화첩기행>이라는 프로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간혹 재밌게 보는 프로그램입니다.”“그래요. 이따 출연진하고 인사나 합시다.”

 

청산도 특집 촬영을 하고 있는데 김광섭 씨가 청산도 안내를 맡았다고 했다. 옆을 보니 독살에서 잡은 해산물 먹는 장면을 몇 번씩이나 찍고 있다. 설정에 설정. 이럴 때에는 자유롭게 다니는 여행자가 제일 행복하다.


촬영에 방해가 될까 싶어 밖으로 나왔다. 잠시 뒤에 촬영하던 이들도 뭍으로 나왔다.

 

“회 좀 드세요.”

 

화가인 출연자가 해삼을 권했다.

 

"이 분이 화첩기행 팬이랍니다.“

 

김광섭 씨가 출연자에게 말했다. 간혹 보는 프로그램인데, 졸지에 팬이 되어 버렸다.

 

“5월쯤 방영되니 꼭 보세요.”

 

방송국 관계자들과 목례를 하고 헤어졌다.

도락리와 서편제 촬영지(오른쪽 솔숲 언덕)

김광섭 씨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야 했다. 독살은 이미 보았고 초분이 문제였다. 청산도 하면 초분과 구들장논, 독살은 꼭 봐야 한다는 걸 풍문에 알고 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전시용 초분이 아닌 실제 초분이 있는가를 물었다.

 

“마침, 잘 왔수다. 저 짝 산 중턱에 초분이 있소. 금방 방송국 팀하고도 거기를 다녀왔소. 작년에 상을 치른 초분이지요. 그런데 그건 왜 묻소”

 

여행자의 계속되는 질문에 여행을 왔으면 그냥 구경이나 하고 돌아가야지 어디서 무슨 조사라도 나왔나 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쯤 되면 명함을 줘야 한다. 사실 여행지에서 명함을 잘 건네지 않는다. 자연스런 대화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명함을 내밀 때는 관공서 출입이나 이야기가 길어질 때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기 위함이다. 명함을 보더니 김광섭 씨의 설명은 더욱 상세해졌다.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초분을 찾아 산을 올랐다.

초분

그가 그려준 지도를 보고 이쯤이겠거니 짐작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도 초분이 보이지 않았다. 잘 못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도와 대조해보니 길은 엇비슷했다. 저기까지만 가보고 안 되면 돌아오지 하는데 숲 속에 초분이 보였다.

작년에 만들었다는 초분은 아직 초장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 돌을 깔아서 평평하게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했다.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서 덮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말뚝을 박아 끈으로 묶은 후 큼직한 돌멩이를 매달아 가로줄과 세로줄로 얽어 놓았다. 지붕에는 용마름을 얹어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했다. 이엉과 용마름은 1~2년에 한 번씩 갈아주는데, 썩은 것을 걷어내고 새로 만들어 씌우며 걷어낸 짚은 태운다고 했다. 초분 주위로는 소나무 가지를 꺾어 둘렀다.

김광섭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청산도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임시로 초분을 만들어서 시신을 안치한 뒤, 상주가 돌아오면 장례를 지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섬에서는 고기잡이 나간 상주가 임종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3년 정도가 지나면 장례를 치른다고 했다.

도락리와 서편제(왼쪽 언덕 솔숲)와 봄의 왈츠(오른쪽 언덕 하얀집) 촬영지

초분은 일종의 임시 무덤이다.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이엉으로 덮어두었다가 2~3년 후 뼈를 씻어 땅에 묻는 이중 장례풍속이다. 이장은 특히 '공달', '손 없는 달'이라 하여 윤달에 많이 한다. 상주가 임종을 못한 것 외에도 묏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등 초분을 행하는 이유는 다양하며 예전에는 뭍에서도 더러 볼 수 있는 장례풍습이었으나 지금은 서남해의 섬 지방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여행자는 예전 나로도 등지에서 초분을 본 적이 있었다.


초분에 절을 올리고 발길을 돌렸다. 노란 유채꽃 밭이 펼쳐진 언덕 아래로 도락리 일대가 한눈에 펼쳐졌다. 멀리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지가 안개에 가려 신비하게 보인다. 당리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락리는 조선 숙종 대에 강릉 유씨인 유이성 씨가 강진에서, 성산 배씨인 배홍수씨가 고조
古潮로부터 처음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유도(유학)를 숭상한다는 뜻에서 도장리라 불리다가 도락리로, 당리와 합쳐져 당락리가 되었다가 완도가 군으로 되면서 다시 도락리가 되었다고 한다.

당리 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도락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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