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은 지리산과 덕유산에 둘러싸여 산천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뼈대 있는 고장이다. 우함양의 기틀을 잡은 분이 바로 '정여창'이고 그의 고택은 지금도 그 당당한 기품이 서려 있다.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이다.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사의 5현으로 추앙되고 있다. 어릴 때의 이름이 백욱이었는데, 중국 사신이 어린 그를 보고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이가 커면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지어라"고 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양반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이 고택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다. 안의에서 함양으로 가는 구불구불 산길이 끝나고 눈 앞에 제법 너른 들판이 펼쳐친 곳이 개평이다. 마을 생김새가 댓잎 4개가 붙어 있는 개介자 형상이라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즐비하다. 근래에 들어 마을 곳곳이 단장을 하고 있어 예전의 호젓한 맛은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이 배의 형국이여서 우물을 파지 않았는데, 일제 때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우물을 파고 난 뒤 마을이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우물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종바위鐘巖가 있다.
정여창 고택은 그가 죽은 후 선조 무렵(1570년대)에 지어졌다. 3,000여 평의 너른 대지에 솟을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별당, 안채, 사당, 곳간 등이 샛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솟을대문에는 5개의 충신, 효자의 정려패가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너른 바깥마당의 돌축대 위에 도도하게 올라앉아 있다. 양반가의 기품과 권위를 잘 살린 건축물이다. 사랑채 마당에는 돌을 쌓아 갖은 화초를 심은 석가산이 있다. 족히 수백년은 됨직한 노송 한 그루가 사랑채의 오랜 연륜과 퍽이나 어울린다.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 또 하나의 문인 중문을 통과해야 안채에 이른다. 안채는 일一자형으로 남향이다. 햇빛이 잘 들어 밝은 안채 영역은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이다.
예전에는 안채 마당에 자그마한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오늘 다시 와보니 없어졌다. 최근 복원을 하면서 없앤건지는 모르겠다. 화단이 있을 때에는 아기자기한 맛은 있으나 비좁은 느낌이었고, 지금은 안마당이 시원스럽지만 약간은 휑한 느낌이 든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약 300년 앞서 지었다고 한다. 청하현감을 지낸 이 집의 선조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안채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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