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집 기행

잿더미된, 여자를 배려해 지은 허삼둘 가옥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솟을대문 이 가옥의 부와 권위를 상징하듯 높게 지어졌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은 조선시대 때만 하여도 함양, 거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지위를 가진 현이었다. 원래 '안음'이라 불리다가 영조 43년인 1767년에 지금의 산청읍인 산음현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기를 낳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자 음기가 너무 세서 그렇다 하여 산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안음'도 '안의'로 바뀌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랑채 갖은 모양의 창살로 호사를 부리고, 앞퇴를 높게 두고 난간을 둘러 권위를 세우려 하였다.

안의면을 감싸도는 비단내(금천錦川)에는 보기도 시원한 광풍루가 있다. 광풍루에서 옛 안의현청이었던 안의초등학교가 있는 마을 안의 정겨운 돌담길을 걸어가면 '허삼둘가옥'이 있다. 안내판에는 '안의 금천리 윤씨 고가 '라는 큰 글씨 아래 작은 글씨로 '허삼둘가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지금은 편의상 윤씨 고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원래는 이 집 안주인의 이름을 딴 '허삼둘가옥'이라는 명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불타버린 사랑채 2004년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 가옥은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갑부 허씨 문중에 장가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이다. 집터는 기백산을 뒤로 하고 황석산을 따라 내린 진수산(대밭산-지금도 산에 대나무가 많다.)에 형성된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쇠부리'라 불리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가옥의 특징은 남자주인이 아닌 여자 주인의 이름을 따른 데서 보이듯 안주인의 의견이 존중되어 지어졌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비중있게 지어진 안채와 안사랑채이다. 안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가옥 형태에서 종종 보이지만 이 집 안채의 구성은 남다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안채 불에 타서 흉가가 되어버렸다.

19세기 말 신분제의 변화와 일부 상인들과 부농들이 경제력을 갖추면서 기존의 양반계층만 누릴 수 있었던 주택양식을 이들이 따라하게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기존 건축요소를 모방하였지만 양반의 거추장스러운 생활방식을 버리고 자신들의 편리성을 건축에 접목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엍문 전퇴를 열고 토상화된 마루를 드나들게 되어있다. 통로 좌우에는 시렁과 선반이 설치되어 살림살이에 매우 쓸모 있어 보인다.

이 집의 안채를 면면히 살펴보면 가장 특징적인 것이 부엌과 그 주위로 배치된 방들과 마루 등이다. 부엌은 'ㄱ' 자 형태의 안채 중앙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부엌으로 드나드는 통로가 전퇴를 열고 토상화土床化된 마루인 것이 특징이다. 통로의 좌우에는 시렁과 선반이 설치되어 있어 살림살이에 매우 쓸모 있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엌내부 중앙에 기둥 둘만 있어 내부공간이 넓다.

부엌안은 중앙에 기둥 두 개만 세워 내부공간을 넓게 하였다. 텃밭으로 가는 문을 뒤로 내고 부엌벽을 나무판으로 대어 환기가 잘 되도록 하였다.  부엌 좌우로는 방을 배치하여 부엌살림과의 접근성을 높이고 방안에도 다시 작은 쪽방들을 두어 각종 살림도구들을 보관하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엌에서 바로 방으로 통할 수 있다.

방 앞뒤로는 대청마루를 시원스레 깔아 살림에 지친 여성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허삼둘가옥은 조선시대 말 양반 건축을 모방하여 지었으나 곳곳에 실생활의 편리함을 배려하여 지은 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안채의 마루

조선 말에서 근대 한옥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건축양식의 변모 등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이 가옥은 안타깝게도 2004년 7월에 일어난 방화사건으로 폐가나 다름없이 변해 버렸다. 6,500여 만원의 재산피해를 내고 25분 만에 꺼진 이 화재는 인근의 농월정(2003), 정여창고택(2004)의 방화와 맞물려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그전인 2002년에는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 군청 공무원 부인이 6,000만원에 낙찰을 받아 9억에 되팔겠다고 하여 소동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군에서도 경매사실을 뒤늦게 알고 5,000여 만원을 준비했으나 이미 때를 놓쳐 버렸다.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헛점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소유와 관리'가 이원화된 문화재 관리는 관리측인 기관과 소유자 사이에서 항상 갈등을 일으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밖에서 본 부엌 환기가 잘 되도록 살창과 나무판으로 벽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