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하나 - 월선이 돌아 오다.
월선이 어떤 타관남자에게 시집간 후 여러 해가 지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없더니 재작년 가을에 가랑잎같이 마을로 굴러들어왔던 것이다. 이때는 무당이던 그의 어미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두 해였었고 잡초가 우거진 빈집에 보따리를 하나 겨드랑에 끼고 월선이는 울고 있었다.
"살아볼라 캤더마는......"
하다가 월선이는 흐느꼈다. 결국 간난할멈이 윤씨부인에게 이야기하여
얼마간의 돈을 얻어 월선이는 읍내 삼거리에 주막을 차렸다.
# 장면 둘 - 용이 월선이의 주막에 가다.
'우찌 니는 나한테 원망이 없노.'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용이 눈을 내리깐다. 남들은 식구끼리
모여앉아 인절미를 빚던 섣달 그믐날 밤, 어느 절간에 혼자 가서 죽은 어미의 명복을 빌었을 월선이,
뼈에 스며드는 법당의 냉기보다 더 사무치는 설움에 울었던 여자,
어릴 때도 겁이 많고 눈물이 많아서 누가 큰 소리만 질러도 울었고 망태영감이 온다고 해도 울었다.
치수 도련님이 그런 말을 할 때는 더욱더 질겁을 하며 울었다.
# 장면 셋 - 월선이 밤길에 용이를 찾아오다.
'무상한 사람......옛적에도 그렇더마는.'
노 젓는 소리, 뱃전에 와서 출렁이는 물살 소리는 먼 저승길을 떠나는 것처럼 쓸쓸하게 들리어왔다.
들물이 팽팽하게 들어 찬 강변은 별빛을 받아서기라보다 제물에 희번덕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손님을 내려놓고 떠나온 작은마을의 불빛이 가물가물 멀어져간다.
배는 떠나고 월선은 물가 촉촉이 젖은 모래밭을 벗어난다.
말라서 포스라운 모래밭은 발바닥이 푹푹 빠져 발목에 힘이 든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것 같은 백사장 ......
......그동안, 달포 동안 용이는 모습을 나타내주질 않았다......
모래밭을 한참 동안 헤매다가 월선이는 둑길로 올라가서 마을길로 들어섰다.
오목한 초가에서 엷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
'우짤라고 여까지 왔일꼬? 구신이 씌었는가, 환장했지. 아무 일도
없임서, 아무 일도 없임서..... 발걸음을 딱 끊고, 내 몰라라 하는 건가.
무상한 사람, 옛적에도 그렇더마는.'
# 장면 넷 - 용이 월선의 사랑을 확인하다.
모깃불이 타는 연기속에, 용이는 곰방대를 문 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성긴 삼베 등지게 구멍으로 눅눅한 연기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며든다.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에 감겨들어 기침을 하며, 용이는 연신 곰방대를 빨아댄다. 종일 논바닥에 엎드려 김을 매어 허리가 뻐근했다. 하나 육신의 고달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삼거리 월선에게로 달려가려는 자신을 휘어잡는 일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땅바닥을 오랫동안 내려다보다가 도로 주질러앉는다. 타버린 재를 털어버리고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다시 붙여문다. 십여 년 전에 타관 남자를 따라 마을을 떠나는 계집아이의 뒷모습을 보리짚단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을 때 뜨거운 것이 용이 눈에 울컥 솟았다. '어디든 가서 잘살아라.' 하며 잊어버리려 했던 월선이 십여 년 만에 마을로 돌아왔고 읍내장터 가까운 곳에 주막을 차린 뒤 장날이면 오가는 길에 얼굴이나 바라보며 술 한잔으로 마음을 달래던 용이가 지금은, 그러나 달랐다. 오광대놀음이 있던 날 밤 이후 월선이는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버렸다. 부드러운 살결과 체취는 항상 그의 곁에서 맴을 돌았다. 사내로서의 체면이 무엇인지, 뼈가 으스러지게 안간힘을 써서 발길을 끊었을 때도 그는 월선이 내 여자 아니라는 생각은 못했다. 월선이 마을을 다녀간 후 한 번 읍내에 나가 묵고 왔다 하여 싸움이 벌어지고 강청댁이 나 죽이라고 악을 쓰며 덤벼들었을 때도 월선이는 내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보고 싶은 정이야 못 참으까. 우리는 남남이 아니니께.'
계집아이의 뒷모습을 숨어 보며 어디든 가서 잘살라고 빌던 마음이나 장날에 가며오며 얼굴을 바라보던 마음이나 그것은 모두 환상이었다. 목이 메이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마음도, 육신이 합쳐져서 처음으로 한이 무엇인가, 바위산의 한 그루 소나무며 슬피 우는 외기러기, 그런 것의 뜻도 깨달아지는 것이다.
'보고 싶은 정이야 못 참으까, 우리는 남남이 아니니께.'
# 장면 다섯 - 월선이 주막에서 사라지다.
"월선아!"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월선아!"
소리를 질렀으나 장날이 아닌 한적한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조차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용이는 어느 골목길에 월선이 서 있을 것 같고 찾으면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읍내를 헤매기 시작했다. 몇 바퀴를 돌앗는지 모른다. 왔던 길을 다시 와서 지나고, 기름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그는 미친 듯이 월선의 주막으로 되돌아왔다.
"월선아!"
......
"강원도 삼장시하고 눈이 맞았다던가, 함께 갔다 카지, 아마."
"강원도 삼장시하고, 그럴 리가!"
노파는 초지장같이 변해가는 용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 장면 여섯 - 용이 하늘과 숲에서 울다.
'와 이리 심이 빠지노, 죽을 것만 같고나.'용이는 흙속으로 자기 몸뚱아리가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둠이 덮쳐씌우듯이 내려왔다. 그 어둠 속으로 희미한 아주 희미한 빛이 한 줄기, 그것은 공명이라기보다
슬픔과 원한의 파아란 빛줄기였다. '불쌍한 것!' 두 번이나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던 여자, 누구를 따라갔건 그것은 이미 따져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갔노.' 용이는 흙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착각 속에서 팔을 내저었다. 월선이가 바로 지척에서 웃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천리 밖이라도 있는 곳만 알믄 찾아갈란다.'
'내가 내가 죽을 것 같다. 몹쓸 계집, 지가 가믄 나를 잊을 기든가, 아아.'
그리움이 사무치는 날 섬진강 월선이 주막을 찾았습니다.
봄이면 가슴 한 구석이 퀭한 것이 날씨 탓만은 아닌듯 합니다.
이처럼 애틋한 사랑이 있을까요?
요즈음의 시선으로는 쉬이 인정되지 않는 사랑이라며 불륜이라고들 떠들겠지만
그 시대에 서면 분명 숭고한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운명의 장난같은 신파조의 애달픔이 아니더라도
섬진강 모래밭에 푹푹 빠지는 발만큼이나 그들의 사랑은 허둥대기 시작했지요.
무당의 딸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로 사랑하는 이를 떠났다 찾았다를 되풀이 하다
끝내 용이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이루게 되는 월선이,
월선이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떠나간 월선에 대한 공허감과 그리움을 잊지 못해 임이네와 관계하는 용이,
이 둘의 사랑은 소설 토지에서 어느 사랑보다 애닯고 서럽습니다.
평사리가 그러하듯 상상의 세계가 현실을 이렇게 강하게 이끈 적은 없습니다.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어줍잖은 리얼리스트의 변명이 있을지라도
상상이 곧 현실이 되어버린 문학의 힘에 빠져들어 문학 속 현실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단지 불만스런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만은 아니겠지요.
오늘도 저문 섬진강에 서 봅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그리움도 사무치나 봅니다.
사랑에 대한 갈구가 아니라
그저 무언가 모를 애틋함을 가슴 한 켠에 고이 담아두고 싶은 날입니다.
암에 걸려 용이의 품에서 깊은 한을 남긴 채 숨을 거둔 월선,
월선을 애달파하며 평사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용이,
쓸쓸한 섬진강의 주막에서 그려봅니다.
섬진강 토지 세트장 월선이 주막에서,,,,,,
윗 글 #장면 여섯은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재구성하였습니다.
문득 강가의 이 주막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청소도 하고 잡초도 뽑으며 오는 손님들 나룻배도 태워 주고 싶네요.
하동군에 한 번 이야기 해 볼까요.
관리도 소홀한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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