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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폐사지 답사 여행의 백미, 합천 영암사지

 

 폐사지 답사 여행의 백미, 합천 영암사지

 

 
합천하면 으레 해인사를 첫 손에 꼽는다. 삼보사찰인 해인사의 명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여행자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규모와 역사성이 주는 의미 그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여행은 길 위에서 느끼는 대상과의 정서적 교감이라고 본다면 영암사지가 단연 으뜸이다.

모산재 전경. 가운데 벚꽃이 무리지어 핀 곳에 영암사터가 있다.


영암사지는 전국의 내노라하는 폐사지의 목록에는 어김없이 들어 있다. 비장의 답사처를 원하는 이들은 서부경남의 이 깊숙한 산중의 옛 절터를 찾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 한 대의 버스만 오고가던 이 오지마을의 옛 절터는 최근 황매산 철쭉제와 모산재로 인해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쌍사자석등은 영앙사지의 핵이자 꽃이다. 이 석등으로 인해 영암사는 더욱 빛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이자 전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은 누구든 영암사터를 본다면 '황홀한' 폐사지 목록에 반드시 끼워 넣을 것이라고 말하며 영암사지를 다음과 같이 미하였다.
"......문화유산만을 두고 말한다면 영암사터는 합천의 자존심이다. 아니, 합천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영암사터를 제쳐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늠름한 기상과 신령스러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모두 간직한 황매산 모산재 바위봉우리를 배경으로 하여 높직이 올라앉은 영암사터에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쌍사자 석등이 천년을 두고 변함없이 절터를지키고......아무튼 영암사터를 추천받고 다녀와서 실망했다는 말을 나는 아직껏 듣지 못했다."


 
이렇듯 외지인들에게 하나 둘 알려진 영암사터는 최근의 발굴로 통일신라시대의 대찰이었음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중문터의 석축과 삼층석탑, 금당터와 석등, 서금당터와 돌거북이 전부였다. 현재는 금당터 석축 아래로 넓은 절터가 새로이 발굴되었고 금당터 옆에도 최근 발굴이 이루어져 절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석등을 위해 석축을 불쑥 내었다. 통돌로 만든 무지개 돌계단이 인상적이다.


 영암사지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연 석등이다. 금당 앞이 좁은 것을 감안하여 석등이 있는 자리를 앞으로 불쑥 내고 거기에 석등을 올려 놓았다. 금당으로 오르는 통돌로 만든 무지개 돌계단의 멋드러짐은 석등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쌍사자석등 사이로 삼층석탑이 보인다.


석등을 보는 데만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동서남북 방향에서 다시 각을 쪼개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보는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보이는 석등의 아름다움에 빠져 든다. 영암사터를 둘러싸고 있는 모산재 바위꽃의 풍광과 서산으로 지는 해가 비추는 빛에 따라 석등의 자태가 달라진다.

석등을 바치고 있는 쌍사자의 엉덩이가 토실하면서도 섹시하다. 만지고 싶어 자꾸만 손이 간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쌍사자의 엉덩이를 살짝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쌍사자 사이로 보이는 삼층석탑에 신비로움마저 든다.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쌍사자를 삼층석탑이 근엄하게 지켜보고 있다. 진리의 불을 잘 떠받들고 있는지를......

금당터

 영암사지와 석등은 이곳 가회면 주민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황무지가 될 뻔하였다. 일제시대인 1933년에 현 영암사지의 석등을 일본인들이 밤에 몰래 훔쳐가는 것을 당시 면장 허씨와 마을 주민들이 의령군 대의까지 쫓아가서 찾아 왔다.

금당터 기단의 사자 조각. 사자가 아니라 앙증맞은 복슬강아지같다.


 그리고 면사무소에 있던 석등을 1959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세웠을 뿐만 아니라 쓰러졌던 삼층석탑을 바로 세웠고 마을의 옛 집 두 채를 옮겨와 절터를 지켰다. 흙 속에 파묻혀 있던 금당터도 역시 마을  주민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금당터 가는 길에는 벚꽃이 떨어져 꽃길을 만들어 놓았다.


1984년에 동아대학교에서 발굴을 처음으로 일부하였고 그후 몇 번의 발굴이 진행되어 오늘의 모습까지 이르게 되었다. 영암사지 발굴 과정에서 왕실과 관계있는 회랑이 발견되어 영암사가 황룡사, 감은사 등에 비견되는 비중 있는 절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삼층석탑과 민불 그리고 석등

어릴 적만 해도 석조물들이 영암사지 인근 논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금당터에서 옆으로 비켜선 산길을 가면 서금당터가 있다. 깊은 솔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빈터이다.

서금당터의 서쪽 돌거북과 모산재 전경


솔숲 사이로 모산재의 암릉이 살짝 보인다. 솔숲과 모산재의 돌꽃을 배경으로 돌거북 두 기가 있다. 비신은 사라졌지만 돌거북의 위용은 대단하다. 서쪽의 돌거북이 남성적인 강한 느낌이라면 북쪽의 돌거북은 얌전하니 여성적이다.

서금당터의 북쪽 돌거북


지금은 한때 밭이었던 금당터의 북쪽도 발굴이 이루어졌고 중문터 아래에도 발굴을 마친 상태이다. 발굴을 하면서 흩어진 석재들을 정리하였지만 아직도 완전한 형태의 발굴은 끝이 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이 절을 지키려 고가를 옮겨 왔다.


절은 망하고 터만 남은 영암사지. 화려한 자태는 사라졌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상상력을 갖게 한다. 보물 제480호인 삼층석탑, 보물 제353호인 쌍사자석등, 보물 제489호인 돌거북 둘. 굳이 문화재로 지정된 보물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영암사지는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되는 폐사지이다. 영암사지 전체는 사적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암사지 앞의 호수




▒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http://blog.daum.net/jong5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