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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혼자라도 좋고 더불어 걸어도 좋은 숲길, 태안사


혼자라도 좋고 더불어 걸어도 좋은 숲길, 태안사
- 맑은 보성강 물줄기따라 산사 가는 길


이제는 태안사의 상징이 되어버린 큰 연못 중앙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3층 석탑이 있다.

 
 지리산이 섬진강에 물러난 곳이 곡성땅이다. 이름처럼 골짜기가 많은 곡성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지맥이 지나는 산지에 싸여 있다. 곡성 남부를 흐르는 자연 그대로의 물길인 보성강은 풍광이 빼어난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섬진강이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 반면 이곳 보성강은 한적한 산골 마을을 태연히 감싸며 홀로 흘러간다.


 아름다운 보성강 물줄기를 따라 난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안사가 나온다. 태안사는 구산선문의 하나던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었다. 남도의 산사가 그러하듯 태안사도 절집으로 가는 길이 푸근하다. 아니 인근의 선암사, 송광사가 몰려든 인파로 한적한 맛을 잃은지 오래이만 이곳만은 아직 외지인의 발길이 뜸하다.


 태안사 가는 숲길은 인적 하나 없다. 계곡을 따라 난 긴 숲길은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뿐 일행들의 이야기마저 바람 소리에 묻혀 버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태안사 제일의 경치 '능파각'이 길손을 맞이한다.


동리산에서 흘러나온 계류 위에 놓인 능파각은 누각 겸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계곡 양쪽의 자연 암반 위에 석축을 쌓고 그위에 통나무를 걸친 뒤 누각을 세웠다.
 능파각에 느긋하게 앉아 흐르는 계류와 주위 풍경을 바라보는 맛이 그윽하다.

능파각은 일주문과 더불어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지 않았다.
계류의 암반 위에 세워져 다리와 누각 구실을 겸하고 있다.


 능파각을 건너면 냇돌이 깔린 오솔길이 나온다. 하늘을 찌를 듯 키자랑을 하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놓인 이 길은 짧지만 정이 가는 길이다. 길이 짧아 아쉽지만 아쉬우니 더욱 사랑스럽다.

능파각을 건너면 냇돌을 깐 정겨운 오솔길이 나온다.

 오솔길이 끝나는 곳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 나타난다. 한국전쟁 당시 태안사의 전각이 거의 소실되었지만 이 일주문과 능파각만 소실되지 않았다.

광자대사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호)

 일주문 오른쪽에 부도밭이 있다. 석종형 부도와 팔각원당형 부도 5기가 어우러져 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부도가 광자대사 윤다의 부도이다. 연곡사의 동부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안정감있고 경쾌하다. 바로 옆의 비신이 없는 부도비와 부도비에 새겨진 새(가릉빈가)의 모습도 유심히 살펴볼 만하다.


 절집에 들어서면 절마당이 시원하다. 다소 휑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이곳 태안사도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서야 다시 찾아왔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니 도무지 옛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나만 변화를 하지 못하나 하는 서글픔이 생긴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인 742년에 세 선승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 뒤 적인선사 혜철이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열었고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 윤다가 절을 크게 중창하여 동리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하였다.





 태안사의 가장 높은 터에는 적인선사 혜철스님의 부도가 있다. 굽은 기둥을 운치있게 올린 배알문 아래로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서면 너른 터에 부도 한 기가 고요히 앉아 있다. '적인선사 조륜청정탑'이라 불리는 이 부도의 이름은 혜철의 시호가 적인선사, 부도를 세울 때 하사받은 이름이 조륜청정이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가 있는 배알문은 굽은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세운 운치있는 작은 문이다.

 이 부도는 최근에 세운 듯한 느낌이 들지만 실은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 지리산 주변 지역의 부도 중에서도 비교적 빠른 시기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너그러우면서도 품위가 있고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산사의 앞에는 약간은 고적함을 깨는 부조화스러운 느낌이 드는 큰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삼층석탑 한 기가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못 둘레를 탑돌이하듯 도니 산사에 어느덧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