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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설산에 깊이 잠든 '오대산 월정사'



설산에 깊이 잠든
'오대산 월정사'

- 석탑에 울리는 맑은 풍경 소리


설산에 깊이 잠이 들었는가. 영하 20도를 넘는 강추위에 여행자는 되려 행복해진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를 것이고 찾는 이가 드물어 산사는 고요함에 빠져 있을 터이니. 월정사月精寺. 달을 그리워하듯 오래 묵은 간절한 마음으로 산사를 찾았다.


눈쌓인 월정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일주문까지 이어진 1km 남짓의 전나무숲을 걷는다. 하늘을 향해 장쾌하게 뻗은 전나무 아래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음습해보이는 숲의 그늘은 전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볕으로 청량하기 이를 데 없다.


햇빛도, 깊은 전나무숲에 지쳐갈 즈음 성황각이 여행자를 손짓한다. 사찰로 가는 일주문 앞이나 일주문에서 사천왕문 사이에 있는 성황각은 그 지방의 토속신을 모신 곳이다. 국사당, 가람당으로도 불리며 토속신앙을 수용한 불교의 한 모습이다.

청류다원

처음 월정사를 방문하는 이는 간혹 당혹감을 느낀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절집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고대하던 전나무숲은 보이지 않고 일주문도 없이 대뜸 천왕문이 나온다. 전나무숲은 주차장에서 월정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아래로 이어진다. 애초 길가에서 보이는 일주문으로 들어와야 전나무숲을 지나는 제대로 된 절로 가는 길을 만날 수 있다.

금강루의 윤장대

천왕문을 지나면 숲에 다소곳이 한 무리의 장독대가 보인다. 솔잎차 향이 그윽한  청류다원이 전나무숲에 자리잡고 있다. 잠시 마음을 쉬어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다소 위압적인 금강루에 오르면 월정사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팔각구층석탑 국보 제48호

금강루 누각 위에는 화려한 윤장대가 있다. 최근에 만든 윤장대는 아직 세월의 때가 덜 묻었지만 우리 불교 문화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다. 경북 예천의 용문사 윤장대가 오래된 완전한 모습의 윤장대이다. 윤장대 안에 경전을 넣어두고 바깥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연자방아 돌리듯이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한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수도를 마치고 돌아온 뒤 오대산 비로봉 아래 적멸보궁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고 2년 뒤 월정사를 세우고 경내에 팔각구층석탑을 건립하면서 그 안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 철종 때 크게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처참하게 피해를 입었다.

석탑의 상륜부는 가장 장식적이며 화려하다. 상륜부는 아래(두 층 제외-사진 아래 큰 2층은 석탑의 8,9층에 해당)부터 노반(지붕 모양), 복발(사발을 엎은 모양), 앙화(꽃모양), 보륜(구륜-9개의 테)은 석재이고, 그 위로는 금동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전각이 모두 전소된 것은 물론이고 양양의 선림원터에서 출토되어 이곳으로 옮겨온 범종도 불에 타 완전히 녹아버렸다. 이 종은 상원사 동종과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던 종이었다.


전각은 근래에 모두 새로 지어졌다. 월정사하면 뭐니뭐니해도 팔각구층석탑이다. 「월정사 중건 사적비」에는 자장율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나 탑의 양식상 고구려양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대개 추정한다.

적광전의 주련과 현판은 방한한 스님의 제자인 탄허스님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지붕돌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 있어 스쳐가는 바람이 깊은 산사의 고요함을 이따금 깨워준다.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석조보살좌상이 무릎을 굻고 두 손을 모은 채 경건하게 석탑을 향해 있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 공양보살상인데 이는 라마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수광전, 삼성각, 조사당

이러한 석불은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 신복사터 석불좌상처럼 강원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원래의 석불좌상은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최근에 제작한 석불이 다소 생뚱맞게 앉아 있다. 석불좌상 원래의 부드러운 미소가 새로이 제작된 석불에는 읽을 수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팔각구층석탑이 서 있는 법당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적광전이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대웅전에서 모시는 석가여래를 모시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절집을 나와 육수암으로 향했다. 요사채 처마 끝에 고드름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질 법도 하련마는 지붕의 눈과 깊은 사귐을 하고 있어 쉬이 땅으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암자로 가는 길모롱이 언덕배기에서 월정사를 내려다보았다. 널찍한 터는 아니지만 겹겹이 이어지는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과 푸른 전나무숲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긴 숨을 토해 내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스님 한 분이 산문을 나선다. 어디를 떠나고 어디를 감이 애초 정해져 있겠는가.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부도밭이 있다. 얼핏 지나치기 쉬운 이곳은 울창한 전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부도는 모두 종 모양의 석종형 부도이지만 제각기 크기나 생김새가 다르다. 한번쯤 들러 깊은 침잠에 빠져보는 맛도 적하리라.


월정계곡은 온통 눈밭이다. 어디로 물이 흐르는지, 어디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인지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앙상한 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가 그저 바람을 쫓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