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다산초당의 봄날
지난 4월, 남도의 강진을 찾았다.
예전에 번질나게 다녔던 곳.
한동안 발길이 뜸했다 이번에 다시 찾았다.
초당으로 가는 길.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지 길은 깊이 패여 있다.
한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전부터 이곳을 찾는 이들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불렀다.
마침 맑은 봄날이라
늘 음습했던 여름과는 달리 상쾌하다.
대숲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과
아직도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 아니 춘백은
이곳이 남도인 줄 새삼 깨닫게 한다.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건 서암.
그리고 다산초당.
이윽고 동암이 나온다.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주막과 제자의 집을 전전하며 7년을 지내다
어느 날 외가 쪽인 해남 윤씨의 산정(山亭) 에 놀러갔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 윤씨 집안의 배려로 머물게 된다.
초당 뒤쪽에는 그가 직접 썼다는 '정석(정석)'이라고 새긴 글씨가 또렷하다.
세월이 꽤 흘렀건만 반듯한 서체는 그의 정신만큼 날카롭다.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새겼는데,
그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산은 이곳에서 10년 동안 후진 양성과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은 그의 별서정원과 다름없었다.
차 달이는 부뚜막 '다조(茶竈)'가 초당 마당에 있다.
약천의 물을 떠서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끓였으니
차를 마시는 기쁨보다 끓이는 즐거움이 더했을 것이다.
그 운치를 일러서 무엇 하겠는가.
다산은 초당을 가꾸는 데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채마밭을 일구고 초당 한쪽으론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석가산을 쌓았다.
연못에 잉어도 길렀는데,
유배생활이 끝난 후 이곳의 제자들에게 잉어의 안부를 묻곤 했다.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다산은 스스로를 일러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했다.
상록수림 사이사이 장하게 뻗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그 속에 삼 칸의 동암(東庵)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
이곳엔 이따금 바다 쪽에서 솔바람이 불어온다.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했던 곳이다.
습한 초당보다 맑은 이곳에서 다산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집필에 몰두했다.
그 유명한 <목민심서>도 이곳에거 완성했다.
다산동암(茶山東庵)과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이 걸려 있다.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다.
초당의 끝에는 천일각이 있다.
天涯一閣 '하늘 끝 한 모퉁이'
음습한 초당에서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이곳에 서면 속이 후련해진다.
다산 당시에는 이 누각이 없었으나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 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곳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기운이 이곳에서 세상을 향해 뻗쳐 나간다.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산길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다산이 절친한 벗인 혜장 선사를 만나러
이 산길을 걸어 백련사로 갔다.
기차 타고 떠나는 남도의 봄, 이 한 권의 책과 함께!(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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