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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여기가 <토지> 최참판댁 모델... 진짜일까?

 

 

 

 

 

 

 

여기가 박경리의 <토지> 최참판댁 모델... 진짜일까?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조씨 고가 방문기

 

비가 내렸다. 그냥 무한정 달리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섬진강. 골짜기로 차를 돌렸다. 악양면 소재지를 지나 그 끝에 나타난 정동마을. 비를 머금은 산 구름이 두터운 띠를 두르더니 온통 산을 가려버렸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허리께나 옴직한 낮은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돌담길 안으로는 감나무가 대종을 이룬 과실수가 심겨져 있다. 끝없이 펼쳐진 돌담길과 그 사이사이 집 몇 채를 지나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이제까지의 좁은 골목길과는 달리 차 두 대가 교행을 할 정도의 제법 넓은 도로가 나타났다. 건너편 산 아래까지 점점 들판이 펼쳐지고 산자락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모든 것이 푸근했다.

 

 

길의 끝에 오래된 고가가 한 채 보인다. 경사진 곳에 지어진 집의 규모는 상당했다. 층을 이룬 장대한 담장 길이에 입이 절로 벌어졌지만 담장 너머 하늘로 불쑥 솟은 건물의 처마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예전에 제법 떵떵거렸을 위풍당당한 집이다.

 

 

대문은 잠겨 있었다. 대문 앞의 작은 표지판을 읽고 있는데 골목 저편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잰걸음으로 다가오신다. 안경을 쓴 학자풍인데 허리가 꼿꼿하다.

 

“들어와요. 차 한 잔 하고 가요. 허어 참, 들어오라니까.”

 

마치 일가친척이 방문한 것처럼 할아버지는 초행자인 길손을 반갑게 맞이했다.

 

 

“여기가 사랑채 자린데 지금은 없어졌지. 몸채로 오르는 저 돌계단에는 중문이 있었지요. 이런 연못 봤어요? 대한민국에선 보기 힘들 걸.”

 

대문 안을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의 집 안내가 이어진다.

 

“어서 와요. 참말로 앉으라니까. 차 한 잔 내어줄테니….”

 

 

집 안 어디서 봐도 탁 트인 전망

경사진 땅의 생김대로 짓다 보니 집은 크게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가옥을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눈다는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고가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3개의 공간이 애써 담을 둘러 나눈 것이 아니라 땅의 높낮이로 인해 공간의 독립성이 자연스레 보장된다는 것이다. 경사를 이룬 자연지형에 집을 짓다 보니 사랑채 자리에서 봐도 앞이 탁 트이고, 안채 툇마루에서 봐도 그렇고, 예전 초당과 가묘가 있었던 후원 차밭에서 봐도 전망이 끝내준다.

 

 

대개 옛집에서 안채의 경우 사랑채에 가려 겨우 하늘만 보일 뿐이고, 그래서 더러 별당을 꾸미거나 2층 다락에서 바깥 풍경을 훔쳐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곤 했으나 이 가옥은 안채가 사랑채보다 한 단 위에 훌쩍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바깥 풍경이 안채로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 흔한 내외담 등의 헛담을 둘러 외부인의 시선을 애써 막을 필요도 없다. 사랑채보다 한 길이나 높은 곳에 안채가 있어 바깥에서는 전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집의 특이한 구조는 연못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랑마당 한구석에 있는 연못은 땅속으로 한참이나 푹 꺼진 곳에 있다. 담장 위에서 연못까지는 족히 5m는 될 정도로 깊다. 경사진 지형이다 보니 집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더 깊이 팔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에는 특이한 공간이 있는데 일명 석빙고다.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이 연못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굴처럼 안쪽으로 너른 공간을 따로 만들어 여름에 각종 음식을 보관하던 천연냉장고 역할을 했다.

 

             ▲ 연못가의 석빙고

 

 

사랑마당에 서서 집을 돌아보면 집 뒤의 산봉우리가 예사롭지 않다. 할아버지께 물어보니 ‘꽃뫼’라 했다. 꽃의 봉오리 형상이란다. 앞쪽 들판에 낮은 동산이 하나 있는데, 뒤의 산봉우리가 꽃이니 앞의 동산은 자연스레 나비가 된다. 게다가 좌우로 다시 낮은 산이 감싸 도니 이곳은 누가 봐도 명당이다. 해서 이곳은 서울 아래 최고의 자리고 그다음이 구례 운조루라고 할아버지는 넌지시 자부했다. 집의 형국 또한 ‘자자형’으로 쥐가 드나드는 곳이라 문을 많이 냈는데, 지금은 쇠락해서 어쩔 수 없이 문 중 일부는 막아버렸다고 했다.

 

 

고택 마루 할아버지의 노래방

이 집의 주인 조한승 할아버지는 올해 여든아홉 되신다. 할아버지의 나이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 큰집에 할아버지는 홀로 사신다. 그래도 어디 하나 어지러운 곳이 없다. 매일 대청을 걸레질하고 음식도 직접 해 드신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할아버지가 74살 일 때, 당시 70살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처음 몇 해는 힘들었지만 그 뒤로 혼자 음식을 해 드시면서 이제는 여자들이 하는 음식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의 요리 실력을 자랑하신단다. 나물도 직접 무쳐서 드실 정도다.

 

 

집 뒤에 있는 차밭은 할아버지가 직접 심었다. 건물이 없어진 빈터에 차를 심고 쌍계사 주지 스님을 만나 직접 차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내년 봄에 와서 찻잎을 따가란다. 나중에 돌아갈 때 찻잎을 따서 베개에 꼭 넣어보기를 권했다. 잠이 기막히게 잘 온다고.

 

             ▲ 조한승 할아버지가 직접 심고 가꾼 차밭

 

 

차를 우려내는 손길이 분주하다. 몇 번을 걸러내시더니 종이컵에 한 잔씩 내미신다. 이곳 하동에는 차를 마시는 데 번다한 의식이 없다. 이곳에선 적어도 차는 의식이 아닌 생활 그 자체다. 그래서 어떤 격식을 차리거나 차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서 도리어 차 맛을 달아나게 하지 않는다. 그냥 물 마시듯 숭늉 마시듯 대접이나 그릇에 따라 훌쩍 마시면 그만이다.

 

 

차를 마시다 문득 시선이 문으로 갔다. 마루에 문이 달려 있는 것도 특이하지만 대청에 노래방기기가 있다. 할아버지는 노래를 즐겨 부르신다. 이 마루 노래방이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이라고 했다.

 

방 구경도 했는데, 사진은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찍지 않았다. 마치 스님들의 선방처럼 할아버지의 방에는 아무런 장식도, 어떤 물건도 없었다. 다만, 다리 없는 침대 매트만 방구석에 달랑 놓여 있었다. 사방 벽도 할아버지의 성품을 말하듯 하얀 벽지를 발라 단정하기 그지없다. 다른 방도 봤지만 매한가지, 깔끔한 성격을 집안 구석구석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 너른 마당에 잡풀 하나 없고, 마루에도 먼지 하나 없다. 1200평에 달하는 이 너른 대저택을 혼자서 관리하신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부지런함과 깔끔함이 몸에 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밥하는 하인들을 위해 지은 임시 부엌

마루에서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눈길이 가는 곳이 있었다. 안마당 끝으로 정자도 아닌 것이 창고도 아닌 것이 괴이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 조한승(89) 할아버지

 

             ▲ 하인을 위해 만든 마당의 여름 임시 부엌

 

“저거 말이요. 여름에 밥하고 국 끓이는 곳이라. 내가 여섯 살 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 우리 집에 하인들이 한 40, 50명 정도 되었지. 여름이 되면 더워서 밥하고 국 끓이는 게 힘들다고 하인들이 볼멘소리를 하자 할아버지가 목수를 불러서 지은 거지. 82년 전에 지은 거요.”

 

 

 

안채는 180년 전에 지었다고 했다. 둥근 두리기둥을 쓴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쯤으로 여겨진다. 안채 옆 아래채에 할아버지의 부엌이 있다. 생활은 안채에서, 식사는 아래채에서 하신다. 아래채의 지붕은 기와가 아니고 슬레이트다. 할아버지가 잠시 타지에서 생활할 때 친척에게 집을 맡겼더니 기와지붕을 다 걷어내고 당시 최신식이라며 슬레이트 지붕을 이었다고 했다. 뒤에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기와로 다시 이으려고 했지만 2000만 원이 넘는 비용 때문에 그대로 두었단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많이 와야지, 사람 싫어하는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 하나도 못 봤어. 나중에 감자 삶아 먹으로 한번 와요. 가을에 고구마도 먹으러 오고.”

 

내남 구분 없는 할아버지의 말에 정이 듬뿍 묻어났다. 집을 나서니 할아버지가 따라 나오신다. 돌층계만 남은 중문을 지나 휑한 공터로만 남은 사랑채를 거쳐 대문을 나섰다. 예전에 대문 밖에 있었다는 남자용 뒷간은 흔적도 없었다. 다시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이곳이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일까

이곳이 박경리의 소설 <토지>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라는 소문이 나자 찾는 사람도 늘어나고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도 경쟁적으로 취재를 해갔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쓰면서 이곳을 다녀간 적은 없다. 다만 평사리를 차안으로 이동하며 스쳐 지나 간 것으로 전해진다. 박경리 선생은 살아생전 “평사리를 감싸 안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지닌 역사적 자취, 경상도 땅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넓은 들녘이 구상 중인 소설의 배경에 더없이 어울려 보였다.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역병으로 가솔들을 잃어 넓은 들판의 곡식을 추수하지도 못한 채 버려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품 구상에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으나 박경리가 말한 ‘큰 부잣집’을, 이 일대에서 조부잣집으로 알려져 있는 조씨 고가로 보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씨 고가는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후손인 조재희가 19세기 중반에 지은 집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6년여에 걸쳐 지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 있다.

 

             ▲ 공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