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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이효리가 잤던 곳에서 하룻밤 묵어봤더니...

 

 

 

이효리가 잤던 곳에서 하룻밤 묵어봤더니...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31] 강골마을 오봉생가 그리고 이식래 가옥의 시골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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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생가는 강골마을의 골목길 끝에 있었다.
ⓒ 김종길

 


소리와 다향의 고장, 보성에는 강골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오봉산 아래 득량역에서 기차를 내려 10여 분 남짓 자전거를 타고 가니 대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 나왔다. 강골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묵을 곳 관계자인 박향숙씨에게 전화를 했다.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노닥거리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민박할 손님이냐"고 물었다.

조붓조붓한 돌담길 끝으로 제법 너른 바깥마당을 가진 고택 한 채가 나타났다. 특이한 구조였다. 집 정면으로는 안채의 처마 끝만 보일 정도로 높직한 담이 둘러쳐 있었고 그 아래로 장독대와 작은 화단이 꾸며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눈에 익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집.

한쪽 구석에 대문이 있는 점이 특이했다. 그 이유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사랑채가 안채의 앞에 있는 여느 고택과는 달리 아래채 겸 사랑채가 'ㄱ'자로 안채와 잇닿아 있는 소박한 집 구조 때문이었다. 집 정면으로 대문을 내었다면 문을 열자마자 안채가 훤히 보이게 돼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대문을 한쪽 구석으로 둬 손님과 주인이 서로 옷깃을 여밀 시간적인 여유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화장실이 대문채에 딸려 있지만 이 대문채는 일종의 헛담 내지 내외벽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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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정면으로는 안채의 처마 끝만 보일 정도로 높직한 담이 둘러치고 한쪽 구석으로 대문을 두어 문을 열면 바로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 김종길

 


이 집은 오봉생가다. 오봉생가는 6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중재씨의 집이다. 집이 지어진 지 100년이 넘었단다. 너른 마당에 안채와 아래채·광채 등 세 채의 건물이 전부다. 으리으리한 여느 고택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구조인데도 그 모양새가 가볍지는 않다. 5칸 반에 이르는 안채가 제법 묵직하고 그 안채를 울창한 대숲이 두르고 있어 위엄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 칸의 아래채도, 별당처럼 온갖 화초를 둔 작은 안마당이 있고 뒤로는 마루를 내고 작은 마당을 별도로 뒀다.

안채와 아래채 사이에는 장독대를 뒀다. 광채에는 풍로·절구·멍석 등 옛 물건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 앞으로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물도 깨끗했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을 수 있었다. 이 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대문채에서 안마당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일 게다. 비가 와서 땅이 질척거릴 때 걷기도 좋거니와 시각적으로도 아주 훌륭하다. 대문채에서 안채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선의 이동을 염두에 둔 디딤돌은 절로 감탄이 나온다.

고택에 도착하자 할머니가 매실차와 엿을 내왔다. 직접 담은 것이란다. 해마다 겨울이면 만드는 강골마을의 엿은 꽤나 유명하다. 이에 달라붙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아 엿을 싫어하는 이들도 결국 맛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일부러 깨어 먹지 않고 느긋하게 입안에서 녹여 먹으면 그 졸깃한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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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생가는 6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중재 씨의 집으로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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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생가 조명엽 할머니가 내놓은 매실차와 강골마을 전통엿
ⓒ 김종길

 


"이게 뭔 줄 아시오? 갓통이오. 갓통!"

다과를 먹고 나자 할머니의 집 소개가 이어진다. 우리가 묵을 방에 짐을 풀고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제일 먼저 할머니가 보여준 건 마루였다.

"이게 뭔 줄 아시오? 우리 집을 온 사람들에게 매번 물어 봐도 맞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

아내와 여행자, 아이는 한참이나 곰곰이 생각했으나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옅게 번지고 있었다. "여태 맞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니께. 갓통이오. 갓통!" 그제야 일행은 '아' 하며 머리를 쳤다.

갓통은 의관을 매우 중요시 여겼던 조선시대에 갓을 사용하지 않을 때 갓을 넣어 보관하던 통이다. 이 갓통은 반구형으로 바닥이 원형이고 2등분해 한 쪽을 여닫게 돼 있었다. 대나무로 모양을 잡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종이를 여러 겹 덧발라 만들었다. 위쪽에 끈을 달아서 벽이나 천장에 걸도록 했다. 통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신기하게도 아직 갓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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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생가 마루에 있는 이 물건의 정체는 알고 봤더니 옛날 갓을 넣어 두었던 '갓통'이었다.
ⓒ 김종길

 


마루는 옛것들의 전시장이다. 흔히 녹용으로 알려진 사슴뿔에다 주인이 썼던 활과 화살도 벽 한 쪽에 걸려 있다. 숯을 넣어 사용하던 다리미며, 삼베에 풀을 먹이던 솔하며, 박 바가지·램프·약을 빻던 도구까지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옛 도구들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다. 놋쇠로 만든 요강도 보이고 그 위에는 타구가 있다. 타구는 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이다. 다듬이 방망이·저울·홍두깨도 벽에 걸려 있다. 전통 한옥답게 기둥마다 쇠못 대신 모두 나무못이 박혀 있었다.

이 집에는 비밀 다락도 있다. 지금은 부엌을 입식으로 바꿔서 원래 이중으로 돼 있던 다락의 아랫부분을 헐었다. 원래는 아래위가 나뉜 이중다락이어서 바깥에서 보면 다락이 제법 큰데 마루에서 다락문을 열면 다락이 하나만 보이고 크기도 훨씬 작아 보인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다락문을 열면 위의 다락은 보이지 않고 아래 다락만 보이는 것이다. 아래 다락에 올라가야 다락 한구석에 위의 다락으로 통하는 비밀문이 숨겨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집안의 귀중품은 주로 위에 있는 다락에 보관했는데 아직 한 번도 도둑맞은 일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눈속임을 했다고 한다.

안채 앞으로는 툇마루를 놨는데 대청마루는 아예 문을 달아 집안으로 들였다. 남부지방에선 대개 대청마루에 문이 없이 탁 트이게 하거나 문을 달더라도 들창을 둬 개방성을 강조하는데 이 집에서는 문지방을 둬 방과 똑같은 구조로 마루를 놨다. 이런 구조는 이곳 강골마을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마루구조였다. 그래도 마루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집 마당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당의 따뜻한 기운과 대숲의 시원한 바람이 함께 마루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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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마루의 문을 활짝 열면 마당의 따뜻한 기운과 대숲의 시원한 바람이 함께 마루로 들어온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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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생가 아래채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세상과는 단절된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 김종길

 


아래채는 세 칸으로 마당 쪽으론 쪽마루를 내고 뒤쪽엔 툇마루를 뒀다. 마당이 있는 곳에선 쪽마루에 걸터앉아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뒤쪽에는 화단을 두고 조용히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는 등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툇마루를 내고 그 앞으로 또 쪽마루를 놓은 것이다. 이 집주인의 공간 인식이 그대로 집에 반영된 것이다. 갖은 화초와 대숲으로 둘러싸인 아래채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세상과는 단절된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이효리·유재석이가 모두 여기서 잤소"

"이 집에서 방송촬영을 많이 했지요. 그 <패밀리가 떴다> 알지요. 이효리·유재석·박예진이가 여기서 잤지 않았겠소."

그제야 유독 이 집이 왜 낯설지 않았는지, 어디선가 본 듯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패밀리가 떴다>를 두 번 촬영했어. 처음에 촬영하고 방송이 나가자 시청률이 제일 높았던 모양이라. 그래서 마지막 방송도 여기서 찍었어요. 제작진들이 촬영지 중에서 이곳을 최고로 꼽았다고도 하고…."

 
 오봉생가 마루에서 이효리, 유재석 등 '패밀리가 떴다' 출연진들이 잤다고 한다.
ⓒ 김종길

 


할머니가 마루를 가리키며 한 마디 더 거든다.

"그때 <패밀리가 떴다> 출연진들이 잔 곳은 방이 아니라 이곳 마루였소. 마루에 있는 온갖 세간들을 다 치웠지. 우리도 물론 피신을 갔지. 제작진까지 수십 명이 오니 온 마당이 빽빽했어. 유재석 그 사람 실제로 목소리가 정말 크더라고. 목청이 쩌렁쩌렁 참 좋더니만. 이효리는 처음에 모자를 쓰고 왔는데 여간내기가 아니다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성격이 정말 털털하더니만."

할머니의 당시 촬영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빅뱅의 대성이는 참 귀엽고." 아니 빅뱅까지 안단 말인가. 그래서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연세를 물었다. 여든둘이시란다. 창녕 조씨인 조명엽(82) 할머니는 총기가 대단했다. 다큐 찍으러 왔던 용재 오닐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마을 입구의 커뮤니티 공간에서 한창 촬영 중이었는데 불이 나서 촬영장소를 이 집으로 옮겨서 계속 촬영했다는 이야기다. 할머니의 아들은 현재 도의원인 이정민씨고 며느리는 여행자와 통화했던 박향숙씨였다. 강골마을의 대표적인 일꾼이다.

나중에 득량역 역전이발소 공병호 할아버지와의 인터뷰에서 오봉생가에서 하룻밤 잤다고 했더니 "우리 보성 도의원 집에서 잤구먼, 그 할머니가 총기가 대단혀,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야"라고 했다. 여행자도 사실 놀랐다. 할머니는 유창한 일본어에 말에는 조리가 있었고 설명 또한 명쾌했다. 이중재 국회의원이 받은 액자의 한문을 막힘없이 읽어내는 모습을 보고 예사 분이 아니구나, 여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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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생가 아래채는 화단이 있는 별도의 마당을 두어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기에 좋다.
ⓒ 김종길

 


고택의 밤은 일찌감치 찾아왔다. 저녁을 먹고 어두운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두견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저녁 아홉 시를 넘겼을까. 도시라면 초저녁일 시간이 이곳에선 한밤중이다. 이부자리를 깔고 잠시 뒤척이다 여행자는 잠들었다.

다음날, 온갖 새들이 합창을 하는 바람에 새벽에 잠을 깼다. 주인 할머니가 군불을 많이 넣었는지 방은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삐꺽거리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선연한 아침을 맞이했다. 득량만과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정성이 가득한 시골밥상을 먹었다.

6000원에 이렇게 정성스럽고 푸짐하다니... 이식래 가옥 시골밥상

강골마을에서 1박을 하게 되면 마을에서 지정한 집에서 식사를 할 수가 있다. 민박집에서 손님들에게 일일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 한 집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식사를 한 곳은 뜻밖에도 이식래 가옥이었다. 이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60호로 문화재로 지정된 집이다. 혹자는 문화재에서 식사를 하면 되겠느냐며 자칫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람이 살고 온기가 있어야 집이, 특히 한옥이 제대로 보존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식래 가옥은 집 주위에 대숲이 우거져 있어 집안에 다른 정원수가 없는데도 그윽하다.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이곳은 1891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본채와 사랑채 등 다른 건물들은 초가로 지어졌는데 광채는 기와로 지어졌다. 곡식과 농자재 등의 보관을 중요시했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집이 부유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런 고택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는 '一'자 형인 5칸의 제법 긴 안채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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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식래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60호로 강골마을에서 숙박을 하면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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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집의 겉모양도 그러하지만 방안도 영락없이 옛 모습 그대로여서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기분은 특별하다.
ⓒ 김종길

 


일단 초가집 안채에 오르는 일부터 남다른 기분이다. 뭐랄까. 마치 밭일을 끝내고 오니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놓고 농부를 수줍게 기다리고 있는 새색시를 보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오랜만에 들른 친구 내외를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꺼내 차렸으면서도 찬이 없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내외의 그 소박한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방 안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초가집의 겉모양도 그러하지만 방안도 영락없이 옛 모습 그대로다. 다락하며 시렁하며 선반하며 조금은 낯선 듯 친근한 구조물이 고택에서의 식사를 한층 더 즐겁게 한다. 이미 앞서 온 다른 일행들이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이식래 가옥에서 두 번의 식사를 했다. 첫날 저녁과 이튿날 아침이었는데 놀랍게도 반찬이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손님을 배려하고 음식에 정성을 쏟은 것이다.

첫날 저녁의 밥상을 보자. 밭에서 갓 따온 푸릇푸릇한 상추에 돼지두루치기·꼬막·갓김치·버섯·파전 등 10여 가지의 반찬이 나왔다. 사실 반찬의 가짓수도 가짓수지만 정갈하게 담은 음식 하나하나에 쏟은 정성이 놀라웠다. 반찬 하나를 먹어도 맛없는 것이 없었고 직접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더 달라고 하라며 그 인심 또한 후했다. 이튿날 아침에도 13가지의 반찬이 나왔다. 아침상으로는 조금 과하지 않나 싶은 정도였다. 게다가 전날 저녁과 같은 반찬은 김치밖에 없었다. 전날에 나온 무채 대신 아침에는 깍두기가 대신할 정도로 같은 재료라도 다른 반찬을 내놓을 정도로 신경을 쓴 것이다. 묵은 김치 고등어조림을 필두로 계란말이·양념게장·깻잎·무말랭이·열무김치 등이 아침밥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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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식래 가옥에서 먹은 시골밥상은 단돈 6000원치고는 너무나 푸짐했다. 저녁식사(위)와 아침식사(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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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합친 가격은 놀랍게도 6000원. 손님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리 가족 외에도 서너 가족이 더 있었는데 하나같이 식사를 즐거워했다. 반찬 혹은 밥을 더 먹지 않은 가족이 없었을 정도였다. 친구끼리 여행 온 아가씨 셋이 옆자리에 앉았는데 잠시도 쉬지 않고 칭찬일색이다.

"와, 이 정도면 벌교는 굳이 갈 필요가 없겠는걸. 꼬막이 이렇게 푸짐하고 맛있는데…."

이 집은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엔 도시 사람들이 와서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런 밥상을 좋아하고 즐기게 돼서 너무 좋단다. 정성스럽고 풍성하고 신선함이 가득한 이곳의 시골밥상은 자연 그 자체를 먹는 기분이었다.

후식으로 엿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엿 먹으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방안 가득 웃음소리다.

고택의 아침을 지저귀는 새들의 귀여운 몸짓

고택으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서려다 아쉬움에 잠시 안채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주인 조명엽(82)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을 더 머물고 싶었지만…. 마당에는 햇빛이 넘치기 시작했고 그 빛을 따라 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지붕 위에도 담장 위에도 절구 위에도 나뭇가지에도 마당에도 우물가에도…. 새들은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왔다갔다 수선을 떨었다. 한참이나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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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숲에 둘러싸인 오봉생가는 아침이면 온갖 새들이 합창을 한다.
ⓒ 김종길

 


뒤태를 보여주다가도 입을 쩍쩍 벌리기도 하고, 모이를 쪼는 시늉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바지런을 떨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참새가 앉아주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앉은 툇마루와 가깝다 보니 앉았다가도 금세 날아가 버린다.

"기다려보시오. 금세 날아올 테니."

주인 할머니의 느긋함에 다시 기다린다. 그러기를 몇 번, 빨랫줄에 참새 한 마리가 앉더니 온갖 귀여운 척 아양을 떨었다. 모두들 한참을 웃었고 여행자는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오전 10시가 됐을까. 이제 정말 떠나야 했다. 전날 약속한 득량역 역전이발소 할아버지와의 인터뷰가 잡혀 있기 때문이다. 미적거리며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새들은 여전히 아침을 붙들어 매듯 지저귀었고 대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숲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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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