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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우리나라에서 김을 처음 양식했다는 곳이 광양제철소? 경전선 800리

 

 

 

 

 

 

 

우리나라에서 김을 처음 양식했다는 곳이 광양제철소?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28〕 옥곡역에서 망덕포구를 가다 2

 

 

 

 

 

 

 

 윤동주 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었던 정병욱 가옥은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됐다.

ⓒ 김종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누구나 학창시절 한두 번은 읊조렸을 윤동주의 <서시>다. 그러나 <서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윤동주의 유고, 이곳에 숨겨져 있었다

벚굴 하나로 두둑해진(?) 배를 만지며 포구를 걸었다. 눈앞에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남해수협중매인 70번'이라고 적힌 간판 아래 부원수산이라는 글자가 또렷했고 그 옆으로 남해횟집 주차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텅 빈 공터인데도 공장의 기계소리는 요란했다.

공터 옆 낡은 집 한 채가 오도카니 시간을 비켜 서 있었다.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숨겨두었던 정병옥 가옥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41호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고 적힌 명패만 아니었다면 포구에 있는 무슨 낡은 공장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낡은 양철지붕을 한 오래된 창틀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곤 눈을 댄 채 건물 안을 한동안 흘깃흘깃 훔쳐보다 건물 옆 묵직한 철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근대문화유산 명패, 1962년의 정병욱 가옥 모습, 정병욱이 보관했던 윤동주 자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좌)와 정병욱(우)
ⓒ 김종길

 


굳게 빗장을 지른 철문을 여니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가옥 안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폐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문화재라고 느낄 만한 것은 없었다. 일단 푸념은 뒤에 하기로 하고 바깥에서 보았던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을 먼저 찾았다.

이 가옥은 국문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1922~1982)의 옛 가옥이다. 1925년에 지은 이 가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없었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를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럼, 어째서 윤동주 시인의 유고가 이곳 외진 포구에 보존되었던 것일까.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필원고를 하숙집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맡기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윤동주는 3부의 자필원고를 만들어 한 권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2부를 은사였던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각각 맡겼다.

 윤동주의 유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숨겨져 있었던 정병욱 가옥의 마루
ⓒ 김종길

 


정병욱은 학병에 끌려가기 전 어머니에게 이 원고를 소중히 보관해줄 것을 당부하며 혹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에게 갖다줄 것을 당부하게 된다.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 모를 일제의 수색을 피해 마루 밑에 원고를 숨긴다. 그 와중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 시인은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된다.

마루 밑에 보관돼 있던 원고는 해방을 맞아 정병욱이 다시 찾게 되고 시인의 유고는 1948년 정병욱과 그의 동생 윤일주에 의해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만약 유고가 이곳에 보존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널리 애송되는 그 유명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 시인의 대표작은 영원히 그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가옥은 정병욱의 부친이 지은 건물로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건물이다. 요즈음은 보기 힘든 1920년대 점포주택이다. 일제강점기 암흑기의 어두운 문학사를 밝힌 저항의 등불로 평가되는 시인의 유고를 보존했다는 문학사적인 의미도 크지만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또한 정병욱 교수가 판소리와 한글을 연구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정병욱은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2007년 한 지역 언론이 보도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고 이 가옥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정병욱 가옥 텃밭에 핀 수선화
ⓒ 김종길

 


먼지 수북이 쌓인 그늘진 마루 대신 마당 가운데 놓인 댓돌에 앉았다. 햇빛이 넘쳤다. 이따금 포구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이 양철문을 두드렸다. 문을 꼭 닫았다. 덩그러니 놓인 두어 개의 절구와 장독 너머로 누군가 텃밭을 가꾸었다. 수선화가 몇 송이 꽃을 피웠다. 노랗다. 담장 아래엔 붉은 동백이 검푸른 녹색의 잎 사이를 뚫고 피어났다. 도시락을 꺼냈다. 다시 건물을 훑어본다. 기둥의 오랜 옹이는 이 집이 백년 가까이 순탄치 않게 살아왔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섬진강 하구, 시간이 비켜선 풍경... '배알도'

다리를 건너 태인도를 걷는다. 여전히 바람은 드세다. 550리 섬진강 물은 남해의 푸른 바다로 느긋하게 들어가건만 바람은 강물을 제치고 순식간에 바다로 쑥 빠져든다. 예전 태인도 사람들은 이곳 배알도에서 배로 망덕으로 건너 하동을 갔다고 한다. 태인도에 들어서자 '명당'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강 건너의 망덕산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이라 하여 배알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망덕포구에서 태인도로 걸어가던 중 다리에서 내려다본 섬진강 하구와 배알도해수욕장 풍경
ⓒ 김종길

 


배알도. 이곳에는 시간이 비켜선 풍경이 있다. 오랜 시간 강물과 바람과 햇살과 갯벌과 모래가 빚어낸 풍경에 서너 척의 배가 백사장에 그대로 멈추어 있다. 바다 같은 섬진강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모래는 옥 같은 섬 하나를 빚어내고 옥이 되지 못한 모래는 스스로 강변에 머물기를 자처했다.

태인도의 북쪽에 있는 섬, 배알도는 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었다가 물이 빠지면 뭍이 된다. 아니 물이 빠져도 끝내 뭍이 되지 못하고 또 하나의 큰 섬에 속할 뿐이다.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고 물 아래 웅덩이가 생기고 수심이 깊어져 수영을 할 수 없으나 예전에는 이름깨나 떨쳤던 해수욕장이었다.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백사장은 1940년경 망덕리해수욕장으로 불리다 점차 백사장이 줄어들자 1970년대 말에 폐장되었다가 1990년에 배알도해수욕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장을 했다.

 배알도해수욕장의 이색 풍경
ⓒ 김종길

 


 배알도해수욕장의 이색 풍경
ⓒ 김종길

 


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경치가 아름다운데다 잘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모래밭을 혼자 걸으니 시간마저 비켜선 듯하다. 광양시에 하나밖에 없는 이 해수욕장은 오늘도 사람 두서넛 오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김을 처음 양식했다는 곳이 광양제철소?

광양 하면 으레 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백운산, 식도락가들은 광양불고기를 으뜸으로 친다. 그렇다고 한들 뭐니 뭐니 해도 광양 하면 첫손으로 꼽는 건 단연 광양제철소다. 광양을 대표하는 광양제철소가 생김으로써 광양은 명실상부한 공업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광양에서 사라진 것 또한 많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광양의 '김'이다.

궁중에 진상까지 했다는 광양 김. 광양은 한때 전국 최대의 김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광양제철소가 들어서고 태인도가 육지화되면서 광양 김은 사라졌다. 광양읍내시장 상인들의 말로는 지금은 멀리 충남 서천, 전북 부안, 전남 고흥, 완도, 해남, 강진 등지에서 김을 사서 온단다. 이곳 상인들은 대개 광주 위판장에서 김을 도매로 사온다고 했다.

 요즈음 광양읍내시장 오일장의 김가게에선 광양 김을 찾을 수 없었다.
ⓒ 김종길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광양의 김 시식지에서 끝내기로 했다. 배알도에서 쭉 뻗은 여수로 가는 4차선 2번 국도를 따라 걸으니 오른편으로 궁기마을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500m쯤 들어가자 김 시식지라는 안내문과 함께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안녕하세요. 우리 어디서 뵀죠?"
"아, 안녕하세요. 거기, 매천 선생 생가에서…."
"맞아요. 어휴, 반갑습니다. 어찌 이런 인연이…."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지난 2월이었다. 광양시 봉강면 매천 황현 생가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를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며 주말마다 광양시 일대를 안내하는 해설사와 두어 달 만에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것, 마치 오랜 친구처럼 잠시의 서먹함도 반가움에 묻혔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김을 양식한 고으로 아려진 김시식지의 영모재
ⓒ 김종길

 


4칸의 영모재가 날렵한 듯 단아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을 양식한 사람으로 전해오는 김여익 공을 기려 1919년에 후손들이 지었다. 그 옆으론 역사관이 있어 우리나라 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김을 식용으로 한 역사는 약 1000년 전이라고 한다. 김여익은 1640년(인조 18) 이곳 태인도(太仁島, 옛 인호도)에 들어와 처음으로 해의(海衣)를 양식하였다고 한다. 해의란 김을 가리키는 말로, 해의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는 문헌으로는 <경상도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있다.

태인도에서 처음으로 김을 양식했다는 기록은 1714년 광양현감 허심이 김여익의 업적을 기린 묘표의 비문에 나타난다. 묘표는 영모재에 보관되어 있으며 전시관에서 그 사본을 볼 수 있다.

 김시식지 역사관 내부 김여익 공의 영정과 묘표
ⓒ 김종길

 


 김시식지 역사관 내부 모습
ⓒ 김종길

 


비문에 따르면 김여익이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면서 낙향하여 3년여간 떠돌다 1640년에 장흥을 거쳐 이곳 태인도에 들어와 해의를 시식하며 살았다고 한다.

비문에 "김을 처음 양식했고 또한 김 양식법을 창안했다(始殖海衣 又發海衣)"라는 글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산죽이나 율목(밤나무)를 이용한 '섶꽂이' 등의 김양식법을 창안하여 보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양 사람들은 '해의'를 '김'이라고 부르는 것은 김여익의 성씨를 본 딴 것으로 믿고 있다.

김여익이 김 양식법을 고안한 것은 이곳에서 사는 동안인 1640년에서 1660년까지다. 완도·조약도의 김유몽, 완도 고금면의 정시원의 해의 시식설보다 빨리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 시식지 해은문을 들어서면 영모재, 역사관, 제기고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고 그 뒤로 유물전시관이 있다. 유물전시관은 11평의 작은 규모로 문을 열면 갖은 재래식 김양식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층계를 올라 내삼문에 들어서면 인호사가 높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인 인호사는 1994년 건립하여 김을 최초로 양식한 김여익 공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광양 김시식지는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김해 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원래의 김 양식지는 광양제철소가 건설되면서 자취를 잃게 되었다. 오직 이 건물만이 남아 옛 흔적을 상기시키며 이곳이 김이라는 음식문화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고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 망덕포구(정병욱 가옥)는 옥곡역정류장이나 진상역 앞 진상정류장 혹은 항만물류고정류장에서 17번 버스를 타면 된다. 배알도와 광양 김시식지는 망덕포구에서 11번 버스를 타거나 4km 남짓 걸어서 갈 수 있다.

 

※ 이 글은 '코레일'과 '오마이뉴스'에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으로 연재 중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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