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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진해 참모습은 벚꽃 너머 골목길에 있더라. 경전선 800리

 

 

 

 

 

 

 

 

진해 참모습은 벚꽃 너머 골목길에 있더라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26〕'벚꽃장' 진해의 숨은 매력을 찾다

 

 

 

 

 

 

지난 3월 30일, 진해를 다녀왔다. 전국을 돌아다녔음에도 진해 벚꽃 구경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체 붐비는 걸 싫어하는 성미라 여태 미루고 있다가 작년부터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을 연재하면서 이번에 진해 벚꽃을 피해 갈 도리는 없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여좌천에서 여행자는 시쳇말로 '멘붕' 상태가 됐다. 밀려든 인파에 혼을 뺀 나머지, 조금은 한적한 내수면환경생태공원으로 피신을 갔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진해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좌천 벚꽃이 끝나는 지점에 내수면환경생태공원이 있다. 이곳은 사진가들이 뽑은 진해의 벚꽃명소로 알려져 있다.
ⓒ 김종길


일본식 근대유산에서 먹는 곰탕 한 그릇, 기가 막히네!

진해역에서 중원로터리 방향으로 걸었다. 이미 시각은 점심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진해에서만 볼 수 있는 조금은 색다른 식당을 찾았다. 곰탕집이다. 무슨 맛집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진해의 음식점을 소개할 때 이곳도 더러 포함된다. 근데 그냥 식도락가들에게 알려진 음식점으로만 보기에는 이 곰탕집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그 의문은 긴 회색 콘크리트 담장 안에 있는 식당 건물을 보면 금방 풀리는데, 얼핏 봐도 식당 건물이 예사롭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건물로 당시 진해 해군통제부의 병원장이 살던 사택이었다. 게다가 근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곰탕전문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ㄱ'자형의 평면에 돌출된 주 현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목조건물은 한눈에 봐도 오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 있다. 식당은 의외로 조용했다. 손님이 꽤 많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너무 조용해서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안에서 "어서 오세요"하며 초로의 주인 할머니가 나왔다.

선학곰탕은 일제강점기 진해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으로 등록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돼 있다.
ⓒ 김종길


선학곰탕의 식당 내부도 예전 모습 그대로다.
ⓒ 김종길


삐꺽거리는 복도를 따라 여닫이문을 여니 깔끔한 실내다. 주인이 집을 살뜰히 보살피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벽면에는 갖은 장식들이 있었는데 모두 오래된 느낌이다. 전체 구조는 일식 목조 집인데 비해,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은 양식으로, 주거공간은 일식으로 혼용돼 있다고 했다.

메뉴는 단출했다. 곰탕, 된장, 수육, 안거미가 전부다. '토시살'로도 불리는 안거미는 육향과 감칠맛이 좋기로 알려져있다. 가격은 곰탕 8000원, 된장 2인분 이상 6000원, 수육 대 2만 3000원․소 1만 8000원, 안거미 1만 5000원이다. 곰탕을 주문했다. 이윽고 무채, 파래무침, 쑥갓무침, 숙주나물, 깍두기, 김치, 고추 등 예닐곱 가지의 반찬이 나오더니 진한 뿌연 곰탕이 이어 나왔다. 반찬은 정갈했다. 맛 또한 일행들은 만족한다는 표정. 잘 우려낸 곰탕과 부드러운 육질의 고기, 맛깔스러운 반찬 등 맛도 맛이지만 실은 오래된 집이 주는 그 분위기에 곰탕의 맛이 더욱 깊게 느껴지는 듯했다.

선학곰탕
ⓒ 김종길


식사를 일찌감치 끝내고 집안 곳곳을 구경했다. 뒤로도 나무 복도가 나 있었는데 유리로 된 미닫이문 너머로 잘 꾸며진 정원이 보였다. 밖으로 나가려다 문득 신발을 반대편에 벗어둔 걸 알고 내부를 더 둘러보고 마당으로 나갈 작정을 했다. 실내는 구조에서만 아니라 진열된 많은 물건에서도 오랜 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낡은 전화기, 금방이라도 간드러진 여가수의 목소리가 들릴 듯한 축음기, 쉴 새 없이 추를 흔들고 있는 괘종시계 등 주인이 잘 갈무리한 물건들이 옛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뿜어내고 있었다.

화장실도 실내에 있었는데, 예전의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했다. 화장실 앞의 세면대는 '퍽' 고졸했다. 창으로 비치는 밝은 햇빛이 어둑어둑한 실내를 밝히면서 화사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거무튀튀한 목조 건물의 내부에 스며든 밝은 빛은 극장의 영사기가 돌아가듯 오래된 향수를 곳곳에서 불러왔다.

주인에게 건물에 대해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하며 그저 생긴대로 관리만 하고 있다고 했다. 다소 무뚝뚝한 말이 오히려 안심될 정도로 수더분한 인상을 준 할머니였다.

"저기 있잖소."

무관심한 듯 툭 내뱉으며 주인이 가리킨 것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93호 구 진해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이라고 적힌 금속 명패였다. 그제야 이 집의 존재를 명확히 확인한 셈이었다.

옛 일본식 가옥인 선학곰탕에는 축음기, 전화기, 괘종시계 등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김종길


건물 밖은 더욱 놀라웠다. 무슨 야외 조각공원처럼 집 마당 곳곳이 잘 꾸며져 있었다. 목조 벽면과 쇠창살 등 건물이 풍겨내는 특유의 질감에다 갖은 수석, 조각, 화분 등의 장식들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바깥마당이 조각과 장식 위주라면 별채와 본채 사이의 중정 같은 안마당엔 온갖 수목을 심고 괴석을 쌓아 정원으로 꾸며놓았다. 마침 동백이 붉은 꽃잎을 뚝뚝 떨구어 마당에 흐드러지게 널려 있었다. 누군가 두드렸는지 대문 옆 나무에 매달아 놓은 종과 징이 나지막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아래로 '벚꽃장' 진해 시가지가 다 보이는 제황산 공원

진해 사람들은 벚꽃 축제인 '군항제'를 '벚꽃장'이라 한다고 했던가. 참 멋들어진 말이다. 벚꽃 철이 되면 진해 시가지는 그야말로 벚꽃 천지다. 붐비는 시장만큼 붐비는 벚꽃 잔치다. 진해 시민이 18만여 명인데 벚나무가 35만 그루 정도라고 하니 시장치곤 아주 번성한 시장인 셈이다.

제황산공원 진해탑에 오르는 365개의 계단, '1년 계단'으로도 부르는데 중간 중간 숫자가 적혀 있다.
ⓒ 김종길


이런 '벚꽃장' 진해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진해 어디서도 잘 보이는 제황산 공원이다. 제황산은 원래 산세가 부엉이가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부엉산'으로 불렸는데 해방 후 풍수지리설에 따라 '임금이 날 명당'이라 하여 '제왕산'으로 불리다 '제황산'으로 잘못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높이 107m밖에 되지 않는 언덕 같은 산이지만 이곳에 오르면 진해 시가지를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다.

제황산 정상에는 러일전쟁 승전을 기념하여 일제가 1929년 5월 27일에 세운 탑이 있었다. 일본이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이긴 러일전쟁의 전승기념탑으로 전함을 본떠 세운 높이 34.85m의 '러일전쟁기념탑'이다. 당시 축하기념행사 사진을 보면 기념탑 앞에서 스모 경기를 하는 등 성대하게 행사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이를 헐고 1967년에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탑을 건립했다.

진해군항마을역사관에서 만난 서원보(68)씨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당시 기념탑 공사를 시작하자, 인근 묘법사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 공사를 중지하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계속 공사를 강행했는데, 공사 현장 케이블카 사고로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멀쩡한데 유독 일본인들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진해 현동부두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실은 배가 전복돼 2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진해만 요새사령부(구 해군교육사 부지)의 영화 상영장에서 불이 나 107명의 어린이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진해의 지맥을 눌러 산신령(백발노인)이 노해서 일어난 변사로 당시 사람들은 믿었단다.

제황산공원에 세워진 진해탑은 높이 28m의 9층으로 전망대에 오르면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중원로터리에서 탑이 있는 산까지는 모두 365개의 계단이 되어 있어 '1년 계단'으로 불린다. 계단이 꽤 높아 보이지만 하나하나 헤아린 수와 중간 중간 계단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며 오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리가 아픈 이나 노약자는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2009년에 만들어졌다는 모노레일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20인 2량으로 40명이 탈 수 있는 겨우 1대로 운행하다 보니 평소에는 이용자가 없다가 벚꽃 시즌을 맞아 30~40분이나 대기할 정도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요금은 왕복 3000원, 편도 2000원이다.

제황산공원 진해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중원로터리 모습, 1920년대 진해시가지 사진과 별반 차이가 없다.
ⓒ 김종길

 


1920년대의 진해 시가지 사진(진해군항마을역사관), 지금과 예전의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다.
ⓒ 김종길


1층과 2층의 시립박물관을 지나 전망대에 오르니 발아래로 진해 시가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건 중원로터리다. 1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의 진해 시가지 사진과 너무나 흡사했다. 로터리 가운데에 수령 12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팽나무가 당시에 있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일제는 당시 진해를 개발하면서 중원로터리와 남원로터리, 북원로터리 중심으로 도시를 계획했다. 지금도 진해 시가지의 모습은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 중원로터리가 일제의 욱일승천기를 나타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과장된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도로 설계상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욱일승천기가 2차 세계대전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중원로터리가 건설된 것은 그보다 훨씬 빠른 시기며, 중원로터리가 8곳 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면 욱일승천기는 16개의 햇살을 도안한 것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로터리 가운데에 있는 수령 1200년이 넘은 팽나무를 중심으로 설계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일제의 흔적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력한 의지의 서로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전망대를 시계방향으로 돌며 진해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진해항부터 대죽도, 중원로터리, 남원로터리, 북원로터리, 저도, 관출산, 진해역, 여좌천, 장복산, 안민고개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야트막한 산이 주는 풍광에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한참을 넋을 빼고 있다 이 천혜의 땅을 기지로 삼아 시가지를 닦은 일제와 그 땅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의 아픔을 곱씹어본다. 발아래론 온통 벚꽃이다. 벚꽃뿐만 아니라 개나리와 진달래도 아직 만발이다. 이래저래 봄은 화려하고 아프다.

해군의 도시답게...
ⓒ 김종길

 


중원로터리에서 남원로터리 가는 길에서 만난 장옥
ⓒ 김종길


진해의 참모습은 벚꽃 너머 골목길에 있더라

공원을 내려와 본격적으로 진해 시내를 걷기로 했다. 벚꽃이 진해의 대명사로 된 지 오래지만, 그 벚꽃으로 인해 진해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벚꽃 너머에 있을 진해의 참모습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거리는 한산해졌다. 중원로터리를 거쳐 남원로터리 방면으로 걸었다. 예전 일제강점기 때에는 진해역에서 남원로터리까지의 이 길을 '귤통(橘通)'이라 불렀다.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된 진해 시가지는 진해역에서 중원로터리, 남원로터리, 북원로터리로 이어진다. 지금도 일제강점기 때의 거리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일본식 가옥들을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금의 장옥(위)과 1920년대의 진해 시가지 사진 중 장옥거리 일대 사진(아래), 지금과 예전의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다.
ⓒ 김종길


중원로터리 못 가서 오래된 긴 가옥이 보인다. 예사롭지 않은 이 건물은 길게 생긴 그 모양대로 "장옥(長屋)'으로 불리는 일본식 건물의 전형이다. 이 '장옥'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일본식 가옥을 찾아 나섰다. 진해에 본격적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시점은 1931년 진해면에서 진해읍으로 승격될 때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진해 읍내에는 한국인들이 살 수 없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주거권이 주어지지 않아 경화동 등 외곽에서 살았다. 이곳의 2층 장옥은 1층은 상점, 2층은 살림집으로 당시 도로변의 건물들은 2층 이상이 되어야 허가를 내주었던 것에 기인한다.

중원로터리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깔끔한 하얀 외벽에 유난히 붉은 간판을 단 진해우체국이다. Y자 형의 도로변에 지은 단층의 목조건물인 우체국은 1912년에 지어졌다. 2000년까지 진해 우체국 청사로 이용되었을 정도로 건물은 튼실했다. 중원로터리 쪽으로 나 있는 입구는 좁아 보이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점차 넓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진해우체국(사적 제1291호, 1912년 준공)
ⓒ 김종길


일제강점기 초소로 사용됐던 팔각정
ⓒ 김종길


로터리를 반쯤 돌면 특이한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축제를 하루 앞두고 거리는 온통 먹자골목으로 변신했다. 천막 끝으로 우뚝 솟은 빨간 지붕의 이 특이한 집은 일명 '뾰족집'이라고 불리는 팔각정이다. 지금은 수양회관이라는 식당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초소로 활용됐다가 이후에는 요정이 있었단다. 원래 길 건너에 같은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한다.

그 옆으로 오래된 중국집인 원해루가 있다. 원해루는 '영해루'로 불렸다. 한국전쟁 당시 UN군포로가 된 중공군 출신 장철현씨가 1956년에 '영해루'라는 상호로 문을 연 중국집이다. 이후 198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던 화교 진금재씨가 인수한 후 지금까지 중국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예전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에 오면 이 집에서 만두를 즐겨 먹기도 했고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다녀갈 정도로 유명세를 떨었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간판이 두 개인데 위의 것은 1950년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원해루(옛 영해루)와 수양회관(옛 팔각정)이 있는 이곳은 예전에 '상생통(相生通)'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를 계획하면서 지금의 중앙시장에서 공설운동장 입구까지의 거리를 '상생통(相生通)'이라 했던 것이다.

'영해루'로 불렸던 오래된 중국집 원해루
ⓒ 김종길


진해군항마을역사관(위)과 필자에게 역사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권영제 위원장(아래)
ⓒ 김종길


문화의 거리에서 진해의 명물 벚꽃빵을 판다기에 냉큼 달려갔더니 군항제 전이라 아직 판매하지 않는단다. 대신 깔끔한 외관을 한 진해군항마을역사관에 들어갔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 태어났다는 서원보 어르신이 잠시 안내를 자청했다. 이윽고 나타난 으뜸마을 추진위원회 위원장 권영제 위원장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군항마을역사관은 2011년 4월 행정안전부 희망마을 만들기에 진주, 거창과 함께 선정되어 테마거리를 조성하고 국비 2억, 도비 1억, 시비 1억을 지원받아 2012년 11월 8일에 개관식을 했다고 했다. 군항제에 맞춰 전시회 준비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부전시공간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해줬다. 좁은 공간임에도 1층과 2층으로 이뤄진 전시공간은 옛 진해의 모습을 담은 온갖 자료로 넘치고 넘쳤다. 그중 천장에 매달린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의 비행기와 '미영격멸' 정신교육을 받고 있는 교실 사진에 유독 눈길이 갔다.

로터리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서면 흑백다방이다. 1952년 '칼멘'이라는 상호로 문을 연 고전음악다방을 1955년 서양화가 유택렬 화백과 아내였던 고미술품 수집가 이경선씨가 인수하여 '흑백다방'으로 개명하여 2008년까지 다방으로 운영했다. 진해 일대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흑백다방, 지금은 딸인 유경아 씨가 시민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1층에 소극장을 개설하여 주말에 음악 감상회와 연주회를 하고 2층은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1952년 '칼멘'이라는 상호로 문을 연 흑백다방은 지금 시민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김종길


아, 골목길 구경은 끝이 없다. 로터리 구석구석에서 진해의 오래된 향기가 마구마구 뿜어져 나온다. 부지런히 걷는 것, 그러면서도 느릿하게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로터리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걸었다. 자원봉사자가 있는 공터 옆 옛 진해 경찰서 자리는 표지석만 남아 있었다.

유신기념탑을 물었다. 관광안내소 직원은 적지 않게 당황하며 모른다고 했다. 바로 이 근처인 것으로 안다고 했더니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여행자를 멀뚱하니 쳐다봤다. 마침 파출소가 보여 문을 열었다. 역시 그런 것은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진해 토박이 경찰이라는 걸 넌지시 강조했다. 그러다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아, 이걸 말씀하셨군요. 바로 건물을 돌아가면 도서관 앞에 있습니다"하고 겸연쩍게 말을 했다. 건물을 돌자 10월 유신탑이 바로 보였다. 로터리 쪽 앞면에는 한자로 '시월유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1972년에 일어난 시월유신을 기념하여 1973년 3월 옛 육군대학 앞 삼거리에 건립했다가 1976년 8월에 지금의 이곳 장난감 도서관으로 옮겨왔다. 진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을 이곳에서 보게 됐다.

 

남원로터리의 김구 선생 친필 시비
ⓒ 김종길


중원로터리에서 곧장 내려가면 남원로터리, 그곳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시비가 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진해 해안경비대를 방문한 기념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친필시를 화강암에 새겨 만든 비석이다. <이충무공 전서>에 실려 있는 이순신 장군의 우국한시, '진중음'의 일부로 '서행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글귀다.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라는 뜻으로 나라에 대한 근심과 장부의 충혼을 느낄 수 있는데 당시의 혼란했던 해방정국에 대한 김구 선생의 근심을 엿볼 수 있다. 원래는 진해역 광장에 있다가 4.19 의거 이후 이충무공의 전승지인 옥포만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 남원로터리로 옮겨졌다.

남원로터리에서 북원로터리로 길을 잡았다. 거리엔 온통 벚나무다. 벚나무가 가로수다. 굳이 여좌천이나 경화역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진해 거리에서 벚꽃은 흔하디흔한 품목이다. 진해 인구가 18만 정도인데 벚나무가 35만 그루가 넘는다고 하니 이 정도면 1인당 벚나무가 두 그루인 셈이다. 집집마다 벚나무가 정원수처럼 거리를 따라 심겨져 있고, 휴대폰가게에도, 고깃집에도 벚나무 한두 그루쯤은 풍경으로 삼고 있다.

진해 인구가 18만 정도인데 벚나무가 35만 그루가 넘는다고 하니 1인당 벚나무가 두 그루인 셈. 휴대폰가게에도, 고깃집에도 벚나무 한두 그루쯤은 풍경으로 삼고 있다.
ⓒ 김종길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상이다.
ⓒ 김종길


북원로터리는 꽃마차가 연신 말발굽 소리를 내며 로터리를 뱅뱅 돌고 있다. 로터리로 들어가는 횡단보도도 따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28일에 세워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동상 건립에 연 인원 780명이 참여했고 동상 앞면에는 '충무공 이순신상 이승만 근서'라고 새겨져 있고 노산 이은상이 찬문을 썼다. 남해를 굽어보고 있는 이곳에서 군항제기간 동안 추모제가 열린다.

진해역에서 출발하여 중원로터리의 10월 유신기념탑, 진해 우체국, 장옥거리, 선학곰탕(옛 진해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 원해루(옛 영해루)와 수양회관(옛 팔각정),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시민공간 흑백(옛 흑백다방), 제황산공원, 남원로터리 김구 선생의 친필 이충무공 시비, 북원로터리의 이충무공 동상을 거쳐 다시 진해역으로 돌아왔다. 느릿느릿 걸어도 두세 시간 정도 공을 들이면 그나마 벚꽃에 가려 알지 못했던 진해를 조금씩 알아가는 뿌듯함이 절로 생길 것이다. 진해의 참모습은 벚꽃 너머 골목길에 있다는 걸 절로 알게 될 것이다.

1926년에 개통한 진해역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돼 있다.
ⓒ 김종길

 

 

 

※ 이 글은 '코레일'과 '오마이뉴스'에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으로 연재 중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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