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전선, 남도 800리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포스터에 빵 터졌습니다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포스터에 빵 터졌습니다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30 보성 득량역 문화장터, 63년 된 행운다방의 추억

 

 

기사 관련 사진
 득량(得糧)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식량을 얻어 왜군을 물리친 데서 유래되었다. 득량역은 1930년 12월 25일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고 지금은 역무원 고재도 씨가 혼자 근무하고 있다.
ⓒ 김종길

 

 


득량역. 몇 년 만에 다시 찾았다. "그곳은 어디인가 / 바라보면 산모퉁이 /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곽재구의 시처럼 늘 두고두고 그리워했다. 진달래 지천인 오봉산 아래 작은 간이역 득량역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늘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다.

득량역 가는 길은 봄빛으로 넘쳐 났다. 겨울을 이겨낸 보리가 초록의 빛으로 봄바람에 살랑인다. 들일 가는 시골아낙네의 짙은 흙냄새가 바람결에 묻어온다. 간이역은 한산했다. 따가운 햇살과 무서운 정적만이 지루하게 남아 있었다. 손님 셋만 내려준 기차는 다시 떠났다.

지난 4일에 찾은 득량역 대합실은 말끔히 변해 있었다. 문화역을 표방하며 탈바꿈한 득량역은 도외지의 무슨 카페처럼 말쑥했다. 역무원은 고재도씨 혼자였다. 작년 8월에 득량역으로 부임한 고씨에게 이발사의 안부를 물었더니 곧장 가보라고 한다. 사실 몇 년 전 이곳에 들렀을 때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차에 이번에는 하룻밤을 이곳에서 머물 계획이라 꼭 만나볼 터였다.

기사 관련 사진
 문화역을 표방하며 탈바꿈한 득량역은 도외지의 무슨 카페처럼 말쑥했다.
ⓒ 김종길


기사 관련 사진
 득량국민학교(옛 득량초등학교) 교실 풍경
ⓒ 김종길


추억이 새록새록... 득량역 문화장터

자전거를 빌려 문화의 거리로 갔다. 기껏해야 몇 십 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지나간 추억들을 들추어내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거리는 옹골차게 꾸며져 있었다. 득량역 주변 빈 점포와 공간을 활용한 문화의 거리는 장난감가게, 문구점, 사진관, 만화방, 옛 득량역, 옛 득량초등학교의 교실 등이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풍금도 쳐보고 분필로 칠판에 낙서도 해본다. 난로 위에 얹은 도시락도 옛날 그대로다. 교실 입구 출입문에 매달려 있는 종은 '땡땡땡' 하며 수업의 시작을 알린다. 70, 80년대의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려진 추억여행엔 아직도 영업 중인 이발관과 다방도 있고 빈 벽에는 각종 영화포스터와 박정희 전 대통령 담화문 벽보 등이 붙어 있어 시간이 멈춘 듯하다.

기사 관련 사진
 득량역 주변 빈 점포와 공간을 활용한 문화의 거리에는 장난감가게, 문구점, 사진관, 만화방, 옛 득량역, 옛 득량초등학교의 교실 등이 옹골차게 꾸며져 있다.
ⓒ 김종길


기사 관련 사진
 득량역 문화의 거리는 지난 2월 6일에 개장식이 있었는데 일본 NHK에서도 촬영을 해갔을 정도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 김종길


득량역 문화장터는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 문화디자인 프로젝트 간이역 '득량역 전통문화공간 조성사업'에 선정되어 국비 1억 원과 군비 1억 원, 총 2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조성됐다.

올해에도 문화디자인 프로젝트 공모사업에 보성군 '득량면 추억의 거리 조성사업'이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2월 6일에 문화의 거리 개장식이 있었는데 일본 NHK에서도 촬영을 해갔을 정도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경전선 구간 중 아름다운 이야기와 추억이 깃든 테마 역으로 득량역과 벌교역을 선정해 일본 전역에 생방송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관광객을 맞는 맞이방, 야외무대, 거북바위를 관망하여 소원을 비는 소원맞이 전망대 그리고 강골전통마을, 중수문길, 비봉공룡공원 등 득량 곳곳을 누빌 수 있는 자전거 투어 코스도 조성됐다. 앞으로도 2차, 3차 계획이 잡혀 있는데 그때가 되면 경전선의 대표 테마 역으로 거듭날 수 있겠다.

1977년부터 2013년 현재도 영업 중입니다

페인트로 쓴 낡은 글씨가 간판을 대신하고 있는 '역전이발관'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신 유리창에 공병학씨의 연락처가 남겨져 있었다. 요즈음은 손님이 거의 없어 이발소를 종종 비우는 대신 전화를 하면 언제든 이발을 할 수 있다는 역무원의 말이 생각났다.

전화기 너머로 이발사 공병학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수에 문상을 가서 오늘은 힘들겠다며 내일 보자고 했다. "다방으로 가보시오. 우리 마누라니께. 아니면 길가에 포니 차 보이죠. 거기 보면 우리 아들 전화번호가 적혀 있소. 거기로 한번 연락해보소" 전화를 끊자마자 다방에서 넉넉하게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왔다.

기사 관련 사진
 행운다방은 1977년에 처음 문을 열었고 최수라 씨가 84년에 인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김종길


"이 짝으로 오시오. 커피나 한잔 하고 가시게."

이발사 공병학씨의 아내이자 이곳에 문화역 거리를 조성한 공주빈(36)씨의 어머니다. 방송국 MC인 아들 공주빈씨와 통화는 했으나 행사 등으로 워낙 바빠서 다음 주까지는 도저히 인터뷰가 불가능하다며 전화나 메일로 인터뷰를 약속했다. 근데 그의 어머니를 만나고 난 후 그와의 인터뷰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느껴졌다. 최수라(64)씨의 입담은 상상을 초월했다.

볕이 제법 따가워 다방으로 들어갔다. '1977년부터 2013년 현재도 영업 중입니다'라고 적힌 문구가 먼저 들어온다. 최수라(64) 할머니는 커피를 내어왔고 여행자에게는 특별히 매실차를 내어왔다. 20년이나 되었다는 매실차답게 깊은 맛이 우러났다. 길보다 무릎께 낮아 보이는 다방 안은 70, 80년대 분위기였다.

기사 관련 사진
 행운다방 벽 한쪽에는 나훈아, 정수라, 하춘화, 이미자, 윤수일 등이 전성기였던 70, 80년대의 오래된 LP판이 진열돼 있었다.
ⓒ 김종길


벽 한쪽에는 나훈아, 정수라, 하춘화, 이미자, 윤수일 등이 전성기였던 70, 80년대의 오래된 LP판이 진열돼 있었다. 아직도 음악이 나오느냐는 여행자의 말에 최씨 할머니는 "그럼요"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중 윤수일의 LP판을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렸다. 착 가라앉은 오전의 공기를 뚫고 추억의 소리가 나지막이 조금은 들뜬 듯 다방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흥얼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알록달록 꽃무늬 벽에 붙어 있는 성인 영화 포스터에 눈길이 갔다. 아, 근데 대략 난감이다. 영화 포스터의 그림이 야했다. '마지막 찻잔'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라는 제목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남녀 배우의 묘한 눈빛과 야한 사진을 보고서야 폭소를 터뜨리게 됐다.

기사 관련 사진
 득량의 유일한 다방인 행운다방은 옛 모습 그대로다.
ⓒ 김종길


이뿐만 아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그 흔한 라이터 대신 성냥이다. 그것도 화랑 성냥. 동전을 넣어 운세를 보는 기계도 아직도 잘 작동한다. 잠시 멈춘 듯한 괘종시계가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검은 다이얼 전화기와 각 집마다 선으로 된 잭을 꽂아 전화를 연결하는 낡은 교환대는 이 다방이 예전 마을의 모든 전화와 소식을 총괄했던 지휘소였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붉은 나무 상자에 담긴 다이얼을 돌리는 빨간 공중 전화기에는 '용건만 간단히'라고 적혀 있다.

그 옆 벽에는 '중요지명피의자종합수배' 전단지가 단단히 붙어 있다. 왠지 험상궂어 보이는 범죄자의 얼굴과 신상에 절로 오싹해진다. 삐꺽거리는 탁자 위에 놓인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각종 잡지 등도 이곳이 꽤 오래된 다방임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었다. 이야기 도중에 최씨 할머니가 20년은 족히 된 보해 소주 대병을 가져왔을 때에는 아내와 나는 거의 까무러칠 정도로 웃고 말았다. 

한복마담이 있던 시절, 다방엔 빈 자리가 없었다

이곳에 다방이 생긴 건 77년이었고 최수라씨가 84년에 인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만 해도 의자 수가 30개에 달했는데 늘 빈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비가 오면 손님이 더 붐벼 앉을 자리 찾기가 힘들었을 정도라고.

기사 관련 사진
 예전에 이곳에는 모두 여섯 곳의 다방이 있었는데 지금은 행운다방만 유일하게 남았다.
ⓒ 김종길


다방에 새 아가씨가 오면 동네 사내들이 난리였다. 아가씨들은 손님들이 사주는 차를 하루에 수십 잔씩 마시기가 예사였다. 커피 값이 500원 할 때 당시에는 하루에 백 잔 넘게 팔렸단다. 다방은 최씨가 경영을 하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한복마담을 별도로 두어 다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접대하고 관리했다.

아가씨도 서넛 명이 있었다. 벌써 의자가 세 번 바뀔 정도로 시간이 흘러 30년이나 지났다며 최씨 할머니는 '휴우'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다방 경영만 했던 최씨는 아가씨들 밥을 해주거나 어르신을 모시는 등 눈에 띄지 않게 주로 방안에서만 생활했다고 했다.

"정수라 알지, 가수 정수라 나하고 이름이 같어."

전라도 억양이 강하게 배어 있는 최씨 할머니는 제주 추자도 출신이다. 슬하에 1남 3녀가 있는데 아들이 현재 득량역 문화거리를 조성하고 있는 공주빈(36)씨다.

"너희들 시대에는 입속도 예뻐야 한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남편이 큰아들인 줄만 알았지 종갓집인 줄은 모르고 왔다. 이래저래 고생도 많이 했지만 선행상을 3번이나 탄 효부였다. 네 번째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한데 항상 웃고 남에게 베푸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저축은 한 적이 없다. 다만, 최씨가 운영하는 다방이나 남편이 운영하고 있는 이발소는 퇴직금이 없기 때문에 20년 전에 연금과 보험을 넣어 노후를 대비했다.

30년 전에는 큰딸의 치아 교정까지 했단다. "너희들 시대에는 입속도 예뻐야 한다"고 당시 어린 딸에게 말했다고 한다. 최씨의 세상 보는 눈이 상당히 밝았고 시대에 앞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통 크고, 남보다 앞선 생각과 투자에 대한 안목이 유달랐던 최씨 할머니는 말씀 중에도 자신감이 넘쳤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기사 관련 사진
 요즈음 좀처럼 보기 힘든 검은 다이얼 전화기와 교환대. 전화가 오면 각 집에 해당하는 곳에 선으로 된 잭을 꽂아 전화를 연결하는 낡은 교환대는 이 다방이 예전 마을의 모든 전화와 소식을 총괄했던 지휘소였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 김종길

 


올해 마흔인 큰딸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교생이 450명이었던 득량중학교는 이제 전교생이 25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발소도, 다방도 손님이 줄어든 건 당연지사. 득량면에는 12개 리와 8구의 마을이 있어 전에는 면사무소에서 회의가 10시에 있을라치면 8시쯤에 사람들이 와서 차 한 잔 하고 가곤 했을 정도로 다방은 아침부터 손님이 들끓었다.

그러나 몇 년 전 국도 2호선 공사가 시작되고 4차선으로 우회도로가 나면서 손님이 뜸해지더니 종국에는 찾는 이조차 손꼽을 정도가 되었다. 예전에는 이곳 역 주위에만 은하수, 오봉, 역전, 선정, 유정, 행운 등 여섯 개의 다방이 있었는데, 한 곳은 노래방으로 다른 한 곳은 호프집으로 바뀌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다방으로 온전히 남은 곳은 이곳 행운 다방뿐이다.

다방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따가웠다. 특히 딸이 셋이다 보니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남모를 가슴앓이도 많이 했는데 직업에 귀천이 없고 착하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태까지 꿋꿋하게 살아왔다. 딸의 상견례 때 아빠는 이발사, 엄마는 다방을 한다는 게 못내 맘에 걸렸는데 다행히 사돈댁에서 이해해줘 무척이나 고마웠다고 했다.

고향 이야기 나오자 이내 눈물이 글썽

셋째를 임신했을 때 딸 둘을 낳고 죄스런 마음에 보따리까지 싸놓고 있었다. 그런 고된 마음고생에 몸무게가 44kg까지 빠졌는데 살이 달라붙어 뼈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 셋째는 아들이었다. "달고만 나와도 이쁜데, 참 이쁘게도 생겼어" 하며 기뻐하던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시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준 며느리를 위해 손수 일주일 동안 세 끼 미역국을 꼬박 챙겨줬다. 항시 며느리가 옆에 있어야 할 정도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은 각별했다. 시아버지는 82세 때 고인이 되었고 시어머니는 92세로 아직 모시고 있다.

17살 때 가족이 보성군 득량으로 이사 오고 난 후 최씨가 고향인 추자도를 찾은 것은 9년 전이었다. 추자도에 있던 사촌오빠가 돌아갔을 때였다. 고향을 떠난 지 무려 38년 만이었다. 고향 이야기에 최씨의 낯빛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예전 여행자가 쓴 추자도 글과 사진을 보여주자 함박웃음을 짓더니 금세 눈물을 글썽인다. "으메, 어쩔 거나! 아! 다무래미, 묵리고개, 대서리, 영흥리, 여기가 나 고향이여. 푸랭이를 종종 가기도 했어. 상추자도, 하추자도. 아직도 눈에 선한디…" 깊은 한숨이 묵직한 다방의 공기를 뚫고 나왔다.

기사 관련 사진
 커피 값은 2천 원, 그마저도 어르신들에게는 천 원만 받는다.
ⓒ 김종길


행운다방의 커피 값은 2천 원이었다. 음료수도 이천 원이었고 비싸다고 해봐야 삼천 원이 최고의 가격이었다. 어르신들에게는 커피 값을 천 원만 받는다고 했다. 최씨 할머니는 방안에서 방명록을 꺼내왔다. 이름이랑 몇 자 적어두면 득량역 문화거리가 앞으로 2차, 3차로 확장될 때 방명록을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딸아이가 대신 글자를 적었다. "어이쿠, 잘도 쓰네." 하시더니만 오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며 어린이날 선물이라며 건넨다. 당황한 건 아이와 아내, 여행자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사양했음에도 주는 기쁨이라며 극구 만류를 한다. 그럼 만 원은 아이에게 큰돈이니 오천 원만 받겠다고 해도 웃기만 할 뿐 도저히 받지를 않았다.

대신 매실차와 커피 값 4천 원은 감사히 받겠다며 스스럼없이 금고에 넣었다. 우리 일행이 가는 게 아쉬운지 보는 눈이 애틋하다. 문 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지나는 길이면 언제든 들러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흔드는 손이 푸근하기 그지없다. 뒤돌아보니 최씨 할머니는 낡은 다방 아래서 여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방 한곳에 세워둔 액자에는 "웃는 날"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그 글귀는 최씨 할머니의 삶의 방식을 오롯이 말해주고 있었다.

"웃는 날 / 월요일은 원래 웃는 날, 화요일은 화사하게 웃는 날, 수요일은 수수하게 웃는 날, 목요일은 목숨 걸고 웃는 날, 금요일은 금방 웃고 또 웃는 날, 토요일은 토실토실 웃는 날, 일요일은 일없이 웃는 날"

기사 관련 사진
 문구점과 장난감 가게에도 추억들이 가득 차 있다.
ⓒ 김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