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치 않은 풍경, 싱그러운 남도 청보리밭 달리는 경전선 완행열차
예당역에서 내려 조성역까지 걷기로 했다.
득량만을 끼고 있는 남도의 들판엔 벌써 보리가 쑥쑥 올라와 패기 시작했다.
멀리 득량만 방조제가 손에 잡힐 듯 아스라이 멀어진다.
딱히 정해진 곳도 없어 봉농리 석조인왕상이나 볼 요량으로 봉산마을을 들르기로 했다.
육교 건너 초등학교 앞 가게에서 길을 물었다. 한국말이 서툰 동남아 여인은 연신 고개를 저어댔다. 얼굴빛이 검은 옆 가게 사내가 '득량 부페'까지 가서 다시 길을 물으란다.
그냥 2번 국도를 따라 걸으면 심심할 것 같아 철길을 따라 걸을 생각으로 육교를 다시 오르는데, 초등학교 좌우로 동상이 보인다. 어릴 적 교정의 추억이 새삼 떠오른다. “좌 이순순, 우 유관순”이다. 동상에 적힌 이름은 "유관순 언니 상"이다. 100년이 지나도 유관순 열사는 여전히 국민 언니로 불리고 있었다.
육교에서 내려다보는 2번 국도가 시원하다. 이 길을 따라 계속 달리면 목포에 이를 것이다. 작년 뜻하지 않은 일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길을 따라 부산에서 목포까지 걸었을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면 언젠가 다시 이 길 위에 설 것이다.
드넓게 펼쳐진 청보리밭 끝으로 득량만이 보인다. 방조제가 있어 이곳이 간척지임을 알 수 있다.
철길을 건너면 덕정마을이다.
철길 옆 좁은 농로를 따라 걸었다. 보리가 제법 패서 이 정도면 그림이 나올 법도 했다. 사진 찍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곤 넘실대는 보리밭을 가로지르는 철길에서 풍경이 돼 줄 기차를 기다렸다.
한 삼십여 분 기다렸을까.
멀리서 '빠아~앙' 하며 기적소리가 울린다.
예당역을 출발한 기차가 어느새 눈앞에 나타났다.
아, 이렇게 빨랐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로 불리는 경전선 무궁화호 완행열차... 이곳에선 달랐다.
순간이었다. 기차가 지난 건 한순간이었다. 잠시 몸통을 보여준 기차는 이내 꼬리를 남기며 서서히 멀어져갔다.
경전선 무궁화호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치 기차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구불구불한 경전선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쭉 뻗은 기찻길 때문일까.
기차가 떠난 철길에서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 자운영을 담았다.
스르르, 갑자기 몸이 으스스해진다. 빽빽이 들어찬 보리밭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뱀이다. 이 녀석 보게. 춘심을 못 이겨 배배 꼬는 모습이라니...
철로 변에 앉았다. 이쯤에서 김밥을 꺼내 봄 소풍을 즐길 일이다. 딱히 서두를 일도, 급히 가야할 곳도 없으니 이곳에서 봄날을 혼자 즐기리라.
이곳 평야를 흔히 예당평야로 부른다. 아직 보리가 덜 폈지만 오월이 오면 이곳은 황금빛 들판이 된다.
이곳 조성과 득량 일대의 들판은 우리나라에서 보리 생산량이 가장 높은 것 중의 하나로 꼽힌다.
봄볕 넘치는 날, 싱그러운 남도의 청보리밭에서 언제 올지 모를 기차를 기다리는 일은 하염없는 나른한 일이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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