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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다

엄마야 누나냐 강변살자. 바로 여기였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바로 여기였네!

 

 

남평역에서 택시를 불렀다. 효천역에서 남평읍까지 버스로 와서 남평읍에서 3km 남짓 겨우겨우 걸어 남평역에 왔지만 금방이라도 머리가 익을 듯한 불볕더위에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였다. 기차도 서지 않는 이 궁벽한 시골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하염없는 일이여서 호기롭게 택시를 불렀던 것이다.

 

 

택시 기사는 수더분했다. 나는 택시 안에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고 문득 지도를 보고 가장 가까이 있는 문바위로 가자고 했다. 지도에는 문바위 아래로 푸른 지석강이 흐르고 있었고 강변에 안성현 선생 노래비라고 자그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기사와 몇 번 의논한 끝에 안성현 선생 노래비를 들러 남평향교까지 가기로 했다.

 

 

지석강에 도착하니 말 그대로 유원지였다. 강둑은 길게 늘어선 차량들로 이미 만원이었다. 강변을 따라 우거진 솔숲에는 더위를 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몇 년 전부터 여름이 오면 이렇게 북적대요. 광주와 가까운 곳에 이만한 곳도 없으니께."

 

 

천천히 둘러보고 오라며 기사는 시동을 껐다. 입구에 서 있는 '드들강 유래비'가 장하다. 이곳에선 지석강을 드들강이라 부른다. 지석강(지석천)은 총 길이 53.5km로 화순 이양면에서 발원하여 능주면을 지나면서 충신천이라 불리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순천과 합류했다가 남평에 이르러 대초천과 합류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그중 남평읍과 능주면 사이의 약 4km 정도를 이 지방에선 드들강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에는 가슴 아픈 얘기가 전해진다. 고려 말엽 이곳 마을 주민들이 천신만고 끝에 지석강에 보를 쌓았으나 홍수로 파손되어 실의에 빠졌을 때 당시 고을 수령의 꿈에 백발도사가 나타나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한 처녀를 제물로 수장하여 보를 쌓으면 무너질 일이 없을 것이라 했다. 이에 숫처녀인 '디들'을 제물로 묻고 나서 무사히 보를 쌓았다고 한다. 그 뒤 '디들'이 '드들'로 음이 변하여 드들강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비가 오거나 강물이 넘칠 때에는 애처로운 디들 처녀의 슬픈 곡조가 들린다고 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 김소월 시, 안성현 곡

 

 

유난히 호소력이 짙은 정한적인 민요조의 이 서정시, 지은이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김소월이다. 1922년 개벽 1월호에 발표했다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됐다. 그러나 시인 김소월은 평안북도 정주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금모래 반짝이는 강변 뜰'과 '뒷문 밖 갈잎의 노래'는 일종의 꿈이자 갈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이 시가 안성현이라는 작곡가를 만나 이곳 나주 지석강에서 노래가 되었다. 소월이 갈망했던 금모래와 갈잎이 노래하는 노래비가 이곳에 남은 것이다. 안성현은 누구인가. 안성현은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에 곡을 부쳐 불멸의 애가를 남긴 작곡가다.

 

 

 

이곳에 노래비가 생긴 것은 2009년, 안성현 선생의 고향인 남평읍 지석강 솔밭 사이에 백사장에 노래비를 세웠다. 동신대 김왕현 교수가 조각을 했고 시비와 주민 모급 등 3천만 원을 들여 제작했다고 한다.

 

 

 

유원지로 변한 지석강, 그래도 강변 풍경은 정겹다. 보 위로 흘러내리는 물살을 걷는 이, 낚시대를 드리운 이, 족대로 물고기를 잡는 부자. 물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 아이를 등에 업고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낙네, 나무 그늘에서 느긋하게 한낮을 즐기는 이들... 요즈음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 이곳에선 타임슬립이 되어 나타난다.

 

 

이곳의 물빛 또한 얼마나 맑고 고왔으면 마을이 '쪽돌'이란 이름을 얻었을까. 드들강, 이곳에 서니 숲과 금모래, 갈잎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