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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제주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제주의 경복궁, 제주목 관아

 

 

 

 

제주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제주의 경복궁, 제주목 관아

 〔제주 도심을 걷다⑥〕 제주목 관아

 

 

관덕정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제주목 관아가 있다. 애초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외대문 옆 하마비는 수령 외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도 있겠지만 이곳이 목사가 있는 정청이라는 표석이기도 하다. 제주에선 보기 힘든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회랑과 2층 누각이 번듯하다. 탐라포정사, 진행루라 불리던 외대문을 지나면 제주목 관아가 눈앞에 펼쳐진다.

 

외대문은 '진해루', '탐라포정사'로 불렸으며 종루로도 활용되었다.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로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이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에 걸친 발굴조사의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여러 문화층이 확인된 것으로 증명된다.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 중대문

 

이곳은 2002년에 1차 복원이 완료되기 전까지 제주 경찰서와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가 한동안 빈터로만 남아 있어 '목관아지'라 불렸다. 1991년부터 시작된 발굴․정비 사업은 1993년 사적 제380호로 지정됐고 1999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2002년에 1차 복원이 완료됐다. <탐라순력도>, <탐라방영총람> 등의 문헌과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됐다. 당시 제주목사가 관하 각 관리의 치적을 심사하는 그림인 <탐라순력도>의 ‘제주전최(濟州殿最)’를 보면 제주읍성 내의 관아건물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서울에 경복궁이 있다면 제주에는 제주목 관아가 있다고 할 정도로 건물의 위용 또한 대단하다.

 

                                       ▲ 조선 숙종 때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제주전최'에 상세하게 그려진 제주목 관아

 

놀라운 사실은 복원에 소요된 기와 5만여 장이 모두 제주시민의 헌와(獻瓦)로 모아졌다는 사실이다. 제주 도민들이 제주목 관아에 대해 얼마나 큰 의지를 갖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세종 17년(1435)에 고득종이 쓴 <홍화각기>에 따르면 제주목 관아 시설들은 총 28동 206칸 규모였다고 한다. 관덕정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목사의 동헌과 부속시설이, 오른쪽에는 판관의 동헌과 부속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 외대문과 내대문의 중간에 있는 중대문은 관아 내의 출입구다.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 중대문에서 본 망경루, 그 앞의 빈 터가 애매헌지, 내대문지 자리다.

 

지금은 외대문과 좌우 회랑, 중대문, 목사가 집무하던 연희각과 홍화각, 연회를 베풀고 공물을 봉진하던 우련당, 군관들이 근무하던 영주협당, 휴식을 취하던 귤림당, 2층 누각인 망경루 등이 복원되어 전각들이 들어차 있다.

 

그럼, 지금부터 제주목 관아를 하나하나 둘러보기로 하자.

 

먼저 중대문은 관아 내의 출입구로 동헌(東軒)으로 통하는 외대문과 내대문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이다.

 

 

▲▼ 우련당은 연회를 베풀고 공물을 봉진하던 장소로 성 안에 우물이 없으면 성이 포위되거나 불이 났을 때 곤란하다 하여 중종 21년(1526)에 이수동 목사가 못을 파고 연꽃을 심은 뒤 세운 정자였다. 영조 때에는 김정 목사가 정자를 중수하고 못 가운데 석대를 쌓아서 꽃과 나무를 심고 '향의실'이라 고쳐 부르기도 했다.

 

 

 

▲ 홍화각은 절제사(목사가 겸한 군사직)가 집무하던 곳이다. '홍화각'이라는 이름은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古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 중에서 빼어난 건물이었다.

 

내대문 터와 망경루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 위에 높게 지어졌다. 판관의 집무처인 이아(二衙)와 구분하여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 불렸다. 이원조 목사의 <연희각기>에 따르면 기문이 없어 언제 지었는지 상세히 알 수 없으며 현판도 누가 이름 짓고 쓴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지방에 부임한 외신(外臣)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망경루는 북두성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한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 <탐라순력도>의 망경루 일대에서 펼쳐진 '감귤봉진'

 

특히 망경루 앞에서 여러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쓰이는 감귤 껍질을 봉진하는 그림인 <탐라순력도>의 ‘감귤봉진’에는 귤을 상자에 넣어 봉하는 과정 등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그 종류와 수효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망경루 2층 누각에서 내려다본 제주목 관아 전경

 

 

▲ 귤림당은 제주목사가 고즈넉한 여유를 만끽하던 장소로,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를 보면 망경루 후원 귤림에서의 풍악도가 있다. 당시 제주읍성 안에는 동․서․남․북․중 과원 5개와 별과원 등 6개의 과원이 있었는데, 귤림당은 북과원으로 추측된다. 그림을 보면 둘레에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과원의 가운데서 풍악을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또 당금귤, 금귤, 동정귤, 산귤, 청귤, 유감, 유자, 당유자, 우금귤, 치자, 지각, 지실 등 귤의 종류 별로 그 수를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도 귤의 종류가 대단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복원된 귤림당 주위 과원에는 다양한 귤나무가 심겨져 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탐라순력도>의 '귤림풍악', 대나무로 둘러싼 과원 한가운데서 풍악을 즐기고 있다.

 

  ▲ 복원된 귤림당 과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제주의 감귤 과원은 숙종 때에는 모두 42곳에 이르렀는데, 이들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이 봉진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관에서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했다. 일반 백성들에게 귤나무 8주를 기준으로 하여 1년에 부역을 면제해주기도 했고, 귤의 열매가 맺자마자 일일이 그 숫자를 헤아리고 장부에 기록했다가 그 수만큼 귤나무 소유자에게 모두 부과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즉 수확할 때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 있어 해충이나 바람에 떨어진 귤까지도 소유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켰던 것이다. 이에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하여 더운 물을 끼얹어 귤나무를 고사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고 한다. 당시 귤 진상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제주의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은 유생들에게 그 일부를 나눠주면서 시험을 보았는데, 이른바 ‘황감재(黃監制)’라는 과거시험이다.

 

▲ 복원된 귤림당 과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 돌하르방

 

▲ 동자석

 

 

▲ 영주협당은 원래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이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인이었으나 효종 초기에 이경억 어사가 조정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 먼나무 열매

 

▲ 제주목 관아에서 구입한 <탐라순력도>는 제주 여행에서 가장 값진 추억이 되었다.

 

※(제주목관아 → 제주목 관아)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2011. 7. 28 고시,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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