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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개울가 옆 우물... 거 참 희한하네 [경전선 800리]

 

 

 

"조상이 생육신이니 오죽 힘들었겠어요"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⑪더 이상 기차가 오지 않는 원북역의 가을

 

 

원북역은 예전 S자 철길로 유명했다.(폐역되기 전 9월 14일 촬영) 구불구불한 옛 철길 너머로 직선화 된 새 경전선이 보인다.

ⓒ 김종길

 

 

더 이상 기차는 오지 않았다. 지난 10월 22일을 마지막으로 함안 원북역은 폐역이 되었다. 밀양의 삼랑진과 광주의 송정역을 잇는 경전선 중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더디 붙잡아 매고 있던 곳 중의 하나가 진주선이었다. 진주 마산을 잇던 이 구간도 13개 역 중 7개 역이 사라지고 지금은 6개 역만 남아 속도를 다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세운 간이역은 끝내 폐역이 되고...

원북역도 사라진 역 중의 하나다.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 승객이라고는 하루에 두서너 명이 고작이었던 이 작은 간이역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수십 년 세월만 녹슨 철로에 켜켜이 쌓여 있다. 무정하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있는 원북역은 1975년 1월 5일 영업을 시작한 무배치 간이역이었다. 하루 10회 정차했던 무궁화호는 버스가 운행되지 않는 원북 마을의 유일한 대중교통이었다. 이제는 군북터미널에서 오전 9시 25분에 출발하여 35분에 원북에 도착하는 버스가 유일한 교통편이 됐다.

원래 원북역은 철도청(현 한국철도공사)의 계획으로 설립된 역이 아니라 원북리 마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열게 되었다. 지금도 역사 외벽을 보면 '기증 박계도(朴季道)' 명판이 한자로 붙어 있다. 역 건물을 기증했던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옆에는 그의 공덕비가 있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박계도라는 인물은 원북 마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80년대 초에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원북역은 1975년 1월 5일 영업을 시작한 무배치 간이역이었다가 지난 10월 23일 폐역이 됐다.
ⓒ 김종길

 

 

그는 마을 뒤편에 저수지를 파서 마을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여 가난한 살림에 도움을 주었고 동시에 농업용수도 확보했다. 마을에 전기를 들여오는 비용과 군북면 면사무소 청사 건립에도 비용을 도운 것으로 전해진다.

원북역도 마을 주민들이 건물도 없이 기차를 타고내리는 걸 안타까이 여긴 그가 역사를 지었다고 하니, 옛 말에 '나라도 못 하는 일'을 개인이 해내었으니 송덕비를 세울 만도 하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그곳에서 생을 달리했다. 텅 빈 역사는 제 운명을 아는지 쓸쓸했다. 비록 초라한 행색일지언정 그 수고로움이 깊이 배어 있다.

옛 기찻길 바로 옆에 채미정이 있다. 주나라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붙인 정자다.
ⓒ 김종길

 

 

기찻길 옆 유서 깊은 채미정

철로 옆에는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주나라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붙인 정자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함안을 대표하는 인물인 어계 조려 선생이 낙향하여 낚시와 소요로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채미정은 어계 조려선생을 모신 서산서원의 부속정자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복원되었는데 서산서원이 훼철됐을 때에는 이곳에서 생육신의 향사를 봉향했다. 원북 마을에는 어계고택과 서산서원 등 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어계선생은 성균관 수학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함안에서 은거했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 중일 때는 수시로 찾아뵈었다고 한다. 단종이 금부도사의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자 급히 문상을 하러 청령포로 간다. 그러나 배가 없어 통곡을 하고 있으니 호랑이가 그를 등에 업어 건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그의 충심은 지극했다.

채미정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함안을 대표하는 인물인 어계 조려 선생이 낙향하여 낚시와 소요로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 김종길

 

'백세 청풍'. 정자에 걸린 현판에서 어계 선생의 맑은 정신이 엿보인다. 채미정 내에는 어계선생의 9대 손인 조선의 유명한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의 현판도 있다. 어계 선생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며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함안에서 낚시와 소요로 은거하였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단종을 연모하며 산 그를 사람들은 백이 숙제에 비유하면서 마을 뒷산인 서산을 백이산이라고 불렀다.

정자 옆 암벽을 따라 오르면 청풍대와 문풍루다. 소나무 울울한 이곳엔 청아한 바람이 불어온다. 개울 쪽으로 솟을 대문이 나 있다. 원래는 개울을 넘어 솟을 대문을 지나면 다시 작은 연못을 거쳐 채미정에 오를 수 있도록 드라마틱하게 되어 있었다. 솟을대문 앞으로 경전선 철도가 놓이면서 담장 옆 쪽문으로 드나들게 되었으니 옛 풍취는 사라져 버린 셈이다. 옛 풍류를 잃은 대신 기찻길이 채미정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찻길에서 바라본 채미정의 모습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기차가 오지 않는 앞으론 어떤 그림일지 궁금하다.

정자 옆 암벽을 따라 오르면 청풍대와 문풍루다. 소나무 울울한 이곳엔 청아한 바람이 불어온다.
ⓒ 김종길

 

 

채미정 옆 야트막한 산을 넘어 철로변에 섰다. 이곳은 봄이면 철도여행자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를 뚫고 기차가 S자로 휘어진 철길을 느릿하게 들어오는 풍경이 가히 압권이다. 곡선과 느림을 상징하는 경전선의 대표적인 장면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철도여행자에겐 이곳은 마치 기차여행의 순례지 같은 곳이다. 꼭 한 번 들러야 할 기차역이 있다면 누구든 원북역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시각은 네 시 하고도 삼십여 분, 다섯 시가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구불구불한 철로가 추억의 저편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군북역과 평촌역 사이에 있는 원북역,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이젠 사라진 풍경이 되어 버린 철로 위에서 여행자는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여섯 거북 머리가 받치고 있는 생육신 사적비, 서산서원


 

여섯 거북 머리 모양의 비좌 위에 세운 서산서원 생육신 사적비
ⓒ 김종길

 

철길 옆 도로를 따라 서산서원으로 향했다. 매월당 김시습, 경은 이맹전, 관란 원호, 문두 성담수, 추강 남효온, 어계 조려 등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서산서원은 숙종 29년(1703)에 경상도 유생 곽억령이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의 사당을 세웠고, 숙종 39년(1713)에는 손경장 등이 상소에 의해 '서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2년 어계 선생의 종중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 사촌리에 다시 서원을 건립했다가 1980년에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근래에 세워진 서원이어서 그런지 건물들이 낯설다. 외삼문인 숭의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숭의당 좌우로 동재인 양정당, 서재인 상의재가 있다. 제법 너른 터에 지은 건물들이 무슨 현충원 같아 옛 서원의 고졸한 멋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여섯 거북 머리 모양의 비좌 위에 세운 생육신 사적비가 특이하다. 숭의당을 돌아 내삼문인 정양문을 지나면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문화재관리국의 고증설계와 심의에 따라 매와 용무늬의 12색 특수 단청을 했다고 한다.

서원 옆 길가에는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와 반질반질한 배롱나무 아래 엄숙한 기운이 감도는 전각이 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불사이군의 정절을 지킨 전서공 금은 조열 선생의 신도비가 모셔져 있다. 그 옆에는 어계 선생의 오세손인 조종도가 정유재란 당시 함양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부인 전의 이씨가 자결하여 이를 기리고자 세운 쌍절각이 있다. 강직한 집안 내력이다.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서산서원의 충의사
ⓒ 김종길

 

서산서원 길가에는 전서공 조열 선생의 순도비와 어계 선생의 오세손인 조종도의 부인 전의 이씨의 쌍절각이 있다.
ⓒ 김종길

 

 무너진 담장에도 푸근함이 묻어나고...

길을 건너 어계 고택으로 향했다. 고택이 있는 원북마을에는 군데군데 허물어졌지만 옛 담장이 아직 더러 남아 있었다.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 진주 방면으로 연결하는 길목으로 어속원(於涑院)이라는 역원(驛院)의 북쪽에 위치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라 원북(院北)으로 불렸다고 한다.

마을 입구부터 예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아래에 막돌을 쌓고 그 위에 흙과 작은 돌을 번갈아 쌓은 담은 이 마을이 오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지금은 많이 쇠락해 예전의 집들이 대개 무너지고 그 터만 남거나 슬레이트 지붕을 인 집으로 변화했다. 그럼에도 마을에는 전통마을이 아니면 요즈음 보기 힘든 여러 형태의 담장과 토담집이 더러 보인다.

그대로 방치된 듯한 담장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곳의 담장은 지역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담장이 보이는데, 하나는 담장의 하부는 흙을 사용하지 않고 제법 큰 돌을 잘 물리어 지그재그로 쌓은 '메쌓기'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섬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로만 쌓은 '강담' 구조로 쌓았다.

원북마을에는 군데군데 허물어졌지만 옛 담장들이 더러 남아 있다.
ⓒ 김종길

 

우리의 옛 담장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돌과 흙을 사용하였다. 그 지역 고유의 아름다움과 푸근함이 묻어있는 골목길은 주변 풍광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또 하나의 미적 공간을 연출한다. 또한 담장은 마을의 역사를 증언한다.

이곳 원북마을의 담장은 잘 정비를 하면 충분히 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어계 선생 관련 유적과 고택 등 문화재가 많이 있으니 마을 전체를 전통마을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함안군과 경남도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개울가 우물이라... 신기하네

하천을 따라 고택으로 가다 보면 개울가에서 특이한 것을 볼 수 있다. 큰 느티나무 아래로 개울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정자가 있는데 그 아래 널판을 씌워 놓은 원형 구조물이 그것이다. 처음 이것을 봤을 때는 뭘까 상당히 궁금했었는데 지난해에 와서 '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가니 우물이 깔끔히 정비가 되어 있었다.

원북마을 개울가에는 우물이 두어 개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 다시 보수를 해 깔끔하다.
ⓒ 김종길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의 너른 반석 위에 있는 우물은 현재 사용 중이다. 우물 위에는 새로이 깨끗한 지붕까지 씌우고 파란 바가지가 매달려 있었다. 예전 동네 아낙들이 이곳에서 물을 긷고 빨래를 했을 것이다. 지형을 살펴보니 개울의 물줄기는 어계 고택 맞은편의 산기슭에서 흘러나와 마을 앞을 흘렀다.

지금이야 하천이 정비가 되어 이곳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으나 예전에는 건너편에 마을이 없어 산에서 바로 흘러나온 깨끗했던 개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우물이 위치한 곳도 산의 지하수가 땅 밑을 흘러 이곳에서 솟아올랐음을 알 수 있다. 예전 재력이 있는 집안은 자체로 우물이 있었으나 대개의 마을사람들은 공동우물을 사용했다.

"과거에는 마을에 개인 우물이 더러 있었습니더. 개인 우물이 없는 집에서 이 공동우물을 주로 썼지예. 지금은 집집마다 상수도가 있어 이 우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더. 다만 마을에서 장을 담글 때는 사용합니더. 아무래도 상수도에 비해 철분도 많고 물맛이 좋아서 그런가 보지예."

지금도 이 우물을 사용하느냐고 물었더니 마을이장 이담수씨의 답이었다. 우물이 언제 생겼는지는 그도 잘 모른다고 했다.

생육신 조상을 모신 종부의 한숨소리는 깊고...

어계고택은 대문채와 원북재라 불리는 재실 그리고 사당인 조묘가 있다.
ⓒ 김종길

 

마을 깊숙한 곳에 어계고택이 있었다. 수령 250년을 훌쩍 넘긴 커다란 은행나무가 높이 솟아 있다. 대문인 솟을삼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옆문으로 돌아가니 가정집이다. 재실을 지키는 고지기가 사는 집인 모양이다.

어계고택은 대문채와 원북재라 불리는 재실 그리고 사당인 조묘가 있다. 앞면 4칸, 옆면 2칸인 원북재는 단순하면서도 검약한데, 부엌을 두지 않아 원래 재실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원북재 뒤의 삼문을 들어서면 있는 사당인 조묘전은 터도 널찍하고 화려하다.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조려 선생과 부인에게 올리는 향례가 행해지고 있다. 조묘 안에는 어계 선생이 짚고 다니던 죽장과 동제향로가 보관되어 있다. 일각문을 통해 나오는데 마침 고택 옆집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신다.

원북재는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검약한데, 부엌을 따로 두지 않아 원래 재실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김종길

 

어계고택 바로 옆에 사는 조붕래(77) 할아버지는 고택을 관리하기도 한다.
ⓒ 김종길

 

조붕래(77) 할아버지는 함안 조씨 31세손이라고 한다. 어계 선생부터는 12세손이다. 원북재의 한쪽에 달려 있는 '금은유풍(琴隱遺風)' 현판에 대해 물으니 잘 모른다고 겸양을 뜨면서도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신다.

"어계 선생의 부친이 조안이고, 조부가 전서공 조열이랍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금은 조열 선생을 불러서 거문고를 타도록 청했으나 수대로 왕씨의 녹을 먹은 신하로서 어찌 이씨 왕과 함께 즐기겠냐며 완강히 사양했다고 합디다. 당시 황희와 권근이 그의 절개를 꺾을 수 없으니 공경하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지 아마. 그래서 '금은유풍'이지요. 조열 할아버지의 절개를 길이 남기자는 거지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셨다.

"어계 선생이 생육신이니 오죽 못 살았겠어요. 잘은 모르지만 예전에는 집이 이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라. 저 짝 산 밑에 있었다는데, 후에 종가 살림이 조금 나아지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 같아요."

 

창녕 조 씨인 종부 조설자(83) 할머니
ⓒ 김종길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원북재 옆 종가에는 아직도 인기척이 없다. 아까부터 종부 할머니가 안 계시다 했더니 밭에 나가신 모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인사를 건네고 나오는데 종가 앞 밭에서 고랑을 메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종부 조설자(83) 할머니였다. 벌써 몇 번을 뵈었지만 이번에는 무척이나 수척해 있었다. 얼마 전에 수술을 받아 거동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그냥 쉬시라고 했더니 쉬면 몸은 편한데 마음이 지겹다고 힘겹게 입을 떼신다. 창녕 조씨인 종부 할머니는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 뱉어져 나왔다.

마을을 나와 다시 철길 위에 섰다. 기차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옛 철길 너머로 새로이 번듯하게 직선화된 새 경전선이 또렷이 보였다. '휴우~'하고 긴 한숨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어계고택의 종부는 몸이 불편한데도 오늘도 밭일 중이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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