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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경전선 800리]흔한 코스모스라고요? 여긴 다릅니다

 

 

 

 

흔한 코스모스라고요? 여긴 다릅니다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코스모스 지천인 북천역

 

 

 해마다 가을이면 북천역 일대에서는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가 열린다.
ⓒ 김종길


기차 안에서 갑자기 탄성이 터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내다보니 건너편 도로가 멈춰 있었다. 북천 코스모스 축제로 가는 도로가 차량 정체로 꼼짝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나' 하며 걱정을 하는 듯한 승객의 말에는 '다행이다'라는 안도가 눈치껏 숨겨져 있었다. 기차를 타고 오면 차량 정체 같은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다. 곧바로 북천역에 내려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에 푹 빠져들면 그만이다.

기차로 보는 풍경, 코스모스 지천인 북천역

가을을 달리던 기차가 북천역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철로 옆 무더기로 피어난 코스모스가 제일 먼저 여행자를 맞이한다. 쇳소리를 내며 기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코스모스 철길에 기차가 들어서는 이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다들 분주했다.

 한적한 기차역이었던 북천역은 코스모스축제로 활기를 되찾았다.
ⓒ 김종길


 북천역
ⓒ 김종길


북천역은 1968년 진주 순천 간의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을 시작했다. 비록 역장과 역무원이 근무하는 기차역이지만 평소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은 한산한 역이었는데 2007년 역과 그 주변에 코스모스와 메밀을 심으면서 관광객 수가 급증하여 활기를 되찾고 있다. 지금은 코스모스역이란 이름을 내걸고 역사와 주변 지역을 코스모스로 꾸미고 있다.

코스모스로 치장한 역사를 빠져나와 철로를 따라 행사장으로 갔다. 하늘은 높았고 햇살은 따가웠다. 안내책자를 차양삼아 땡볕을 걸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들판을 가득 메운 코스모스가 장관을 이뤘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분홍빛 흰빛의 꽃무더기로 들어갔다.

꽃 단지를 가로지르는 개울에도 가을이 담겼다. 짙푸른 하늘빛 아래 분홍빛 흰빛의 코스모스 둑길을 양산을 쓴 여인 하나가 걷고 있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그림을 거꾸로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색채가 뿜어져 나왔다. 물빛이 만들어낸 이 강렬한 색채에 끌려 한참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개울에 비친 풍경은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그림을 거꾸로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 김종길


39만 6000㎡에 달하는 코스모스 꽃 단지 들판은 끝없이 펼쳐졌다. 경전선 복선화 공사구간이 인접해 있어 다소 어수선했지만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그마저도 쉽게 잊힌다.

근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왜 코스모스는 분홍색 아니면 흰색일까. 여기에는 슬픈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옛날 어느 언덕에 꽃보다 더 어여쁘고 고운 소녀가 병약한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소녀가 살고 있는 언덕 너머에는 젊은 나무꾼의 움막이 있었는데 둘은 때때로 언덕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한편 소녀의 집이 있는 언덕 밑 번화한 곳에는 건장하고 교만한 사냥꾼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떤 여자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소녀에게 결혼을 강요했고 소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없다며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일순간에 분홍색 꽃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소녀를 몹시 사랑했던 나무꾼도 소녀를 따라 흰 꽃으로 변해 버렸다. 두 사람이 변해 피어난 꽃이 바로 코스모스라는 이야기다."

코스모스(Cosmos)라는 속명은 그리스어로 질서, 조화의 뜻을 가진 'Kosmos'에서 유래했다. 8개의 꽃잎이 질서 있게 자리잡고 있는 데서 왔다고 한다. 이 꽃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1700년경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식물원장 '카나미레스'로 전해진다.

 '희귀 박 넝쿨터널'은 올해 세 차례의 태풍으로 피해를 입어 예전만 못하나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달아 놓은 것이라고 하니 그 정성을 오롯이 느끼며 걸어볼 일이다.
ⓒ 김종길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희귀 박 넝쿨터널'이다. 올해는 세 차례의 태풍으로 이곳도 피해를 입어 관광객들의 양해를 구하는 입간판이 입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지난해와는 달리 입장료가 없었다. 조롱박터널의 희귀 박들은 어르신들이 직접 달아 놓은 것이라니 그 정성을 오롯이 느끼며 걸어볼 일이다.

이곳 축제장에는 코스모스 외에도 다양한 꽃들이 있다. 메밀꽃과 각종 야생화 따위가 있는데, 워낙 코스모스 꽃 단지가 넓다보니 지나치기 십상이다. 꽃 단지 중앙에는 행사장이 있다. 여느 축제처럼 '뽕짝'이 귀를 따갑게 하지만 이 또한 축제의 한 단면이려니 여기면 그다지 소란스럽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행사장에는 코스모스 탁본, 코스모스 압화, 조롱박 공예품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산골짜기 다랑논 따라 이병주 문학관 가는 길에서

 이병주 문학관 가는 길의 산골짜기 다랑논 풍경
ⓒ 김종길


가을인데도 햇살은 무척 따가웠다. 이제 이병주문학관으로 갈 일이다. 축제 기간이었던 지난 9월 20일부터 10월 7일까지는 북천역에서 행사장, 문학관을 도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근데 축제를 찾은 차량이 너무 많아 도로는 이미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행사장 안내자에게 버스 오는 시간을 물으니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좋을 거라 했다.

"보소. 3시 35분께에 여기로 버스가 오니께 일단 함 기다려보소. 이 땡볕에 그까지 어떻게 걸어가요. 20분 넘게 걸릴 텐데. 기다리다 안 오면 그때 걸어가든가."

연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뽕짝에 장단을 맞추던 중년의 사내가 벌건 얼굴로 말했다. 버스가 오려면 아직 40여 분 남아 있었다. 일단 행사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이는 조롱박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북천역
ⓒ 김종길


얼마나 흘렀을까. 혹시나 싶어 정류장 쪽을 주시하고 있던 아내가 소리쳤다. 버스가 온 것이다. 냅다 뛰어 버스에 올랐다.

"이병주 문학관 갑니까?"
"...."
"이병주 문학관 가는지요?"
"...."
"아저씨, 이병주 문학관 가느냐고요?"
"어서 타기나 하소."

언성을 올리자 그제야 기사는 동문서답하며 볼멘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앞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때가 3시 30분이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운행시간표보다는 5분이나 빨랐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걱정되어 들으라는 듯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혼잣말치고는 제법 크게 말했는데도 버스는 출발했다.

"나중에 문학관에서 내려오는 버스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아세요."

급기야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았다. 길이 막혀 차가 10분이 지나도록 100m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가 잔뜩 화난 이유도 이 정도면 이해도 될 성싶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겨우 국도를 벗어난 버스는 철로를 건너 산골짜기로 접어드는가 싶더니 언제 차가 밀렸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처럼 금세 문학관 앞에 섰다.

초인적인 작가 이병주를 만나다

 이병주 문학관
ⓒ 김종길

 


이병주 문학관은 이명골짜기에 있었다. 2층으로 지어진 문학관은 깊은 산중에 있음에도 당당한 모습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80여 권의 방대한 작품을 남긴 나림 이병주의 창작저작물과 유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실에는 연대기 순서에 따라 작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관련 유품과 작품 등이 소개 글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실의 내용을 따라가 보면, 부산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던 때의 언론인 이병주의 모습과 마흔네 살 늦깎이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후 타계할 때까지 27년 동안 한 달 평균 1000여 매를 써내는 초인적인 집필활동을 보여준 작가 이병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그가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은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표작인 <지리산>의 한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디오라마와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모습의 디오라마, 그리고 영상 자료들이 함께 있어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인 관람을 할 수 있다.

 이병주 문학관은 대표작인 <지리산>의 한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디오라마와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모습의 디오라마, 그리고 영상 자료들이 함께 있어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인 관람을 할 수 있다.
ⓒ 김종길


이외에도 강당과 창작실에서 여러 문학 관련 행사가 펼쳐지고, 넓은 마당에는 연못과 정자, 놀이터, 쉼터 등이 마련되어 있어서 자연과 함께 즐기는 다채로운 문학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여행자가 찾은 지난 1일에는 전통염색 연구가 화소 이봉석씨가 전통염색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소설 <지리산>으로 잘 알려진 나림 이병주 선생(1921~1992)은 경남 하동에서 출생하여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를 졸업했다. 1944년 와세다 대학 불문과 재학 중 학병으로 동원되었다.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 교수를 지냈고, <국제시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했다. 1961년 5·16 필화사건으로 복역하다 2년 7개월 후에 출감했다.

1965년 마흔 네 살의 나이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27년 동안 80여 권의 작품을 남기는 초인적인 작가로서의 역량을 보였다. 1977년 장편 <낙엽>과 중편 <망명의 늪>으로 한국문학작가상과 한국창작문학상을, 1984년 장편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역사의 흐름과 긴밀하게 조우하며 산출되었는데 특히 도쿄 유학이나 학병 및 분단 등 민족적 현실에 대한 체험을 성공적으로 작품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양한 역사 체험과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두루 걸친 그의 해박함이 낳은 <관부연락선> <지리산> 등의 소설은 분명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성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유태림이 자기 나름대로 옳게, 착하게, 바르게, 보람 있게 살려고 했던 것을 의심하지 않는 나는 한국의 지식인이 그 당시 그렇게 살려고 애썼을 경우 월등하게 운이 좋은 환경에 있지 않는 한 거개 유태림과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태림의 짧은 생애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 <관부연락선>

"아무튼 불행한 나라야. 민족의 수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허망한 정열에 불타서 죽고, 죽어가고 있고, 계속 죽어야 하니까 말이다. 아아, 허망한 정열!" - <지리산>

박물관 옆 그의 문학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산골 다랑논에는 코스모스가 지천...

 이병주문학관이 있는 산골짜기 다랑논의 코스모스
ⓒ 김종길


박물관 앞마당을 거닐었다. 마당 끝으로는 파란 하늘이 걸려 있고 그 아래로 낮은 능선이 물결치고 있었다. 산골 다랑논에도 온통 코스모스 지천이다. 꽃밭 가운데에 천막을 친 식당이 하나 보였다.

도토리묵, 메밀묵, 메밀묵사발, 파전 등 먹을거리가 많았다. 그중 메밀묵사발과 메밀묵무침을 주문했다. 이윽고 나온 음식, 젓가락질 한 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무맛에 가까운 메밀의 맛이 이렇게 좋을 수가… 부드럽게 넘어간다. 아내와 아이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다소 심심한 표정으로 무뚝뚝했던 주인 아주머니는 외모와는 달리 음식 솜씨가 썩 좋았던 것이었다.

 문학관 앞 코스모스 꽃밭에서 메밀묵을 먹다
ⓒ 김종길


멸치 육수를 낸 국물에 채를 썬 메밀묵사발도 먹음직했다. 묵사발은 젓가락이 아닌 숟가락으로 국물과 같이 떠먹어야 제 맛이다. 메밀묵무침과 묵사발 한 그릇에 느긋해졌다. 이제 기차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아까 문학관에서 북천역으로 가는 셔틀버스는 없을 거라는 기사의 단호했던 말을 떠올리며 우리는 북천역까지 걷기로 했다. 근데 북천역 아랫마을에 다다랐을 무렵 셔틀버스가 내려오고 있었다. 기사는 홧김에 버스 운행을 안 한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나가는 버스를 보자 나도 모르게 "에잇…"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도 잠시, 오히려 기사에게 고마웠다. 문학관에서 북천역까지 걸으며 느긋하게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스모스
ⓒ 김종길


북천역으로 가는 내내 다랑논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다. 코스모스 축제를 하는 북천역과 행사장 일대보다 한갓진 이곳이 훨씬 좋았다. 이곳에선 적어도 사람들의 아우성 대신 벌들이 '윙윙'하며 날아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잠자리가 한가로이 춤추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곳에선 가을이 깊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코스모스 한 송이를 꺾어 귀에 꽂았다. 하늘을 향해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큰길로 들어섰다. 차들이 씽씽 달리기 시작했다. 아랫마을에 들어서니 수십 마리의 개가 짖어댔다. 마을 옆 저수지엔 하늘이 담기고, 산이 담기고, 붉은 감이 담겼다. 저수지의 가을은 깊어갔다.

 문학관에서 북천역으로 가는 길... 저수지의 깊어가는 가을
ⓒ 김종길


 4일과 9일에 열리는 역 앞 북천시장은 평소엔 텅 비어 있었다.
ⓒ 김종길


북천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4일과 9일에 열리는 역 앞 북천시장은 텅 비어 있었다. 역사로 들어서 가을과 코스모스 등을 주제로 한 시와 사진을 잠시 감상하고 철길로 나섰다. 어스름 빛이 내린 철길에 가득 피어난 코스모스는 가을 하늘과 만나 더욱 짙어졌다.

 북천역
ⓒ 김종길


 북천역
ⓒ 김종길


어른 키만큼 훌쩍 자란 코스모스 꽃 숲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푹 파묻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특히나 젊은 연인들은 꽃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꽃향기에 흠뻑 취한 그들의 모습이 알록달록 어여쁘기만 하다.

☞ 올해로 여섯 번째인 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는 지난 9월 20일부터 10월 7일까지 경남 하동군 북천면 직전·이명마을 꽃 단지 일원에서 열렸다. 이병주 문학관에선 해마다 가을이 오면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가 열리는데 이번에도 10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렸다. 이병주문학관은 매주 월요일(공휴일 또는 연휴에는 익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에 휴관한다. 문의는 ☏ 055-882-2354. 북천역에서 이병주문학관까지는 걸어서 20여 분이면 넉넉히 갈 수 있다.

 18시 4분, 북천역에 부전행 경전선 마지막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 김종길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1일에 다녀왔습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