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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이렇게 아름다운 곳, 스님만 몰래 볼 심산이군! 경전선 800리

 

 

 

이렇게 아름다운 곳, 스님만 몰래 볼 심산이군! 경전선 800리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⑭ '무소유의 달' 12월엔 맑고 향기로운 불일암을 찾으세요

 

 

 겨울을 날 장작을 고이 쌓은 불일암 전경
ⓒ 김종길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달력을 만들 때 그들 주위에 있는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그 달의 명칭을 정했다. 그중 퐁카 족은 12월을 '무소유의 달'이라고 했다. 외부 세계를 바라봄과 동시에 내면을 응시하는 눈을 잃지 않았던 원주민들이 한 해를 돌아보며 12월을 대하는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아라파호 족이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르는 11월에 송광사 불일암을 찾았다. '무소유'를 일갈했던 법정 스님의 흔적을 쫓음과 동시에 내 자신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무소유 법정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불일암

11월의 중순인데도 남도의 가을은 한참이나 더디었다. 산 위는 초겨울이지만 산 아래는 여전히 가을 중이었다. 송광사 앞은 마지막 단풍을 보려는 인파로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했다. 계곡에 걸쳐 있는 청량각을 건너 송광사로 곧장 가지 않고 불일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곡을 따라 얼마쯤 걷자 왼편으로 불일암 가는 표지판이 보였다. 예전엔 낙엽이 수북이 쌓여 길조차 희미했었는데 오늘 와보니 암자 가는 길이 번듯하게 포장이 되어 있다. 전에 없었던 표지판도 덩그러니 생겨 불일암을 처음 찾는 이라도 이제 당황할 일은 없을 듯하다. 다만 오전 8시에서 오후 4시까지의 참배시간을 지켜달라는 당부가 간절하다.

 불일암 가는 길을 가리키는 새 푯말, 예전에는 'ㅂ'이라는 글씨만 있어 찾기가 어려웠다.
ⓒ 김종길


길 중간 중간에 '무소유길'임을 알리는 것도 왠지 낯설다. 법정 스님이 이곳에 묻힌 후 생긴 변화다. 편백나무는 여전히 푸르렀고 그 향기만큼은 깊고 깊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편백숲의 갈림길에도 푯말을 새로 세웠다. 'ㅂ, 소박하게 그린 연꽃 한 송이, 화살표'가 새겨졌던 소박한 옛 표목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깔끔하니 붉은 바탕에 하얀 글씨를 새긴 표식이 서 있었다. 'ㅂ'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쳤던 이곳이 '불일암'이라고 똑똑히 적힌 세 글자로 인해 암자 가는 길을 더는 헤매지 않게 됐다.

 불일암 가는 길은 청량한 편백숲과 대숲이 있어 늘 맑고 향기롭다.
ⓒ 김종길


졸졸졸 맑게 흐르는 개울에 걸친 통나무 다리를 건너자 향기로운 숲이다. 그 사이로 옅게 길이 보인다. 저 멀리서 타박타박 걸어오던 스님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편백숲이 끝나자 하늘로 쭉쭉 뻗은 대숲이 어지럽다.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덕현 스님과 보각 스님이 계실 때에는 늘 깔끔히 비질이 되어 있었던 대숲길이다. 오늘 보니 낙엽이 그대로 쌓여 있다. 부지런히 비질을 하는 스님과 애써 치우지 않고 그대로를 즐기는 스님 중 어느 분이 상수인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는 법정 스님의 말만 귀에 맴돌 뿐이다.

암자 초입의 다소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주변을 향하던 시선이 점점 내면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살짝 열린 사립문을 비집고 들어섰다. 이제부터 묵언이다. 엄정하다.

사립문을 지나면 조릿대가 터널을 이루어 신비감을 준다. 그것도 잠시, 어둑어둑했던 조릿대길이 갑자기 훤해지는가 싶더니 고즈넉한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는 숲 아래로 2칸짜리의 소담한 하사당과 대밭에 둘러싸인 해우소가 정갈하게 다가온다.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무소유의 경지를 보여주는 불일암 하사당
ⓒ 김종길


 법당 옆 산기슭에 있는 송광사 제7대 자정국사승탑
ⓒ 김종길


몇 해 전 이곳을 들렀을 때 하사당에서 덕현 스님에게 법구경 한 권을 선물로 받았었다. 하사당은 볼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림을 준다.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경지라고나 할까. 꼭 필요한 그만큼만 가진 무소유 건물의 전형이 아닌가 싶다. 부엌 하나, 방 하나, 장작더미, 장독대.

우물은 대를 질러 속(俗)의 출입을 막았다. 우물로 이어지는 돌담이 구불구불하다. 해우소도 역시 출입금지. 찾는 이들이 늘어나자 어쩔 수 없이 금지구역도 늘어났다. 스님은 한창 텃밭에 열중이라 인사할 겨를도 없다. 예전 같으면 차도 한 잔 하고 쪽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지는 해를 뚫어져라 볼 터인데. 지금은 스님에게 말 붙이는 것조차 결례가 될까 저어된다.

'묵언', 층계를 올라 법당 앞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무 푯말이 보인다. 사람들은 제법 있는데 모두 '묵언'이다. 암자가 깊다. 아무 말을 하지 않으니 더 찬찬히 보게 된다. 법정 스님이 손수 만들었던 의자는 스님을 추억하는 공간이 되었다. 스님의 빠삐용 의자 맞은편 오동나무 한 그루는 생전 스님이 직접 심으셨다. 나무 아래에 국화가 그득 담긴 화분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앞에 대나무로 간소하게 네모난 울타리를 둘러 스님이 잠든 곳을 표시했다.

"아, 이 작은 땅에 스님이 잠드셨구나."

아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법정 스님이 불일암 시절 늘 앉아 있던 빠삐용 의자
ⓒ 김종길


 법당 앞 오동나무 아래 법정 스님이 잠든 곳
ⓒ 김종길


불일암은 원래 송광사 16국사 중 제7대 자정국사가 창건한 자정암 폐사 터에 법정스님이 1975년에 중건하여 편액을 걸었다. 스님은 이곳에 주석하면서 <무소유> 등 주옥같은 서적들을 집필했고 2011년 3월 11일 열반해 이곳에 잠들었다. 법당 옆 산에는 자정국사의 승탑이 단아하고 기품 있게 서 있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암자를 나왔다. 숲 사이로 어렴풋이 길의 흔적이 보였다. 

 불일암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무소유 산길, 아직 덜 알려져 있어 호젓하기 그지없다.
ⓒ 김종길

 


참으로 운치 있네! 스님 전용주차장

희미하게 난 산길을 따라 송광사로 갔다. 낙엽 수북이 쌓인 산길을 넘으면 오도암이다. 산길 중간 중간에는 이곳이 '무소유길'임을 알리는 나무표지판이 두엇 보인다. 송광사 옆 작은 암자 오도암에 이르자 편백나무 숲이 앞을 가렸다.

아이가 먼저 뛰어가는 바람에 천천히 숲을 걸어 뒤따르고 있는데 왼편으로 나무판을 댄 목조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다지 정성을 쏟은 건물은 아닌 듯한데, 그 용도가 사뭇 궁금해 가까이 다가갔다.

주차장이었다. 기둥에는 '탑전 전용'이라는 글씨도 보인다. 탑전은 오도암을 이른다. 주차장 치고는 제법 운치가 있다. 울울한 편백숲에 자리한 주차장이라. 차가 산림욕을 하겠군. 아니, 암자 앞마당이니 수행을 하려나?

 편백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오도암 앞 스님 주차장
ⓒ 김종길


 길을 나서는 스님
ⓒ 김종길

 


암만 봐도 신기하네, 이런 문은 처음이야!

남도의 단풍은 늦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암자 주변을 채색하고 있었다. 편백숲을 안마당 삼은 오도암은 19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개설될 당시 방장으로 주석했던 구산 수련 스님의 다비장터로, 제자 현호 스님이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 때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탑전'이라고 불리는 오도암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은 문이 하나 있는데 그 생김새가 아주 특이하다. 문 중앙의 나무에 작은 문을 만들었는데 희한한 구조다. 이 문을 들어서려면 누구나 허리를 굽혀야만 하고 몸이 비대한 사람은 아예 통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다. 9개의 기둥으로 된 문루에는 '구산선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의 총칭이다. 이 작은 문은 '하심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오도암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특이한 문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 김종길


암만 봐도 신기하다. 구산선문을 뜻하는 9개의 기둥을 세운 건물도 생경하지만 통나무를 깎아 가운데로 출입문을 낸 생각이 기발하다. 낮추고 또 낮추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폭도 좁으니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한 이는 언감생심 들어설 수도 없다. 어느 스님의 안목일까. 어느 목수의 재주일까. 단풍은 붉고 암자는 적막했다.



송광사의 3대 명물?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 불리던 조계산의 옛 이름 송광산의 이름을 딴 송광사는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송광사는 크게 청량각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 공간, 종고루에서 대웅보전에 이르는 중심 공간, 대웅보전 뒤의 수선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송광사에서 으뜸 경치를 꼽으라면 누구나 임경당과 우화각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주문을 지나 능허교라는 무지개다리에 놓인 우화각과, 계류에 턱하니 걸쳐 있는 임경당은 언제 봐도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임경당은 그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건물로 기둥 두 개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어 선경을 자아낸다. 앞으로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아이들이 첨벙첨벙 계곡을 건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송광사에서 으뜸 경치로 꼽는 임경당과 우화각
ⓒ 김종길


 쌀 7가마, 약 4천 명 분의 밥이 들어갔다는 비사리구시
ⓒ 김종길


경내에 들어서면 대형 석조물이 눈에 띈다. 대찰답게 모든 것이 크고도 크다. 이러한 구조물만 봐도 송광사의 규모와 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절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있었는가는 굳이 문헌을 뒤지지 않더라도 비사리구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승보전에 있는 비사리구시는 쌀 7가마, 약 4천 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제사를 지낼 때 대중을 위해 밥을 담아 두는 것으로 다른 사찰에서처럼 종이를 만드는 일에 사용되었던 지통이 아니라 밥통이란다. 흔히 송광사의 3대 명물로 이 비사리구시와 능견난사, 천자암 쌍향수를 들기도 한다.

송광사는 예전 건물이 워낙 빽빽이 들어차 있어 비가 와도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공간이 널찍한 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지 않은 규모이다.

특이한 것은 여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석탑이 송광사에는 없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초기 선종 계통의 가람에서 볼 수 있는 석탑 없이 금당 위주의 배치 방식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亞)자형의 대웅보전은 그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사방 벽이 널판으로 둘러쳐져 있어 울림이 좋다. 그래서일까. 송광사 새벽 예불은 장엄하고 장중하기 그지없다.

 송광사에서 가장 고풍스런 건물 중의 하나인 관음전
ⓒ 김종길


관음전은 일반에게 공개된 건물 중에서 가장 고풍스럽다. 한눈에 보아도 옛 멋이 제대로 살아 있다. 원래 이름은 성수각으로 고종의 원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195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관세음보살 좌우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상징하는 해와 달이 있고 문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불단을 향해 서 있는 내부벽화가 특이하다.

관음전 뒤를 오르면 승탑 한 기가 있다. '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위창 오세창 글씨를 새긴 비가 있어 이 승탑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승탑 앞에 서면 송광사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계산 자락에 다소곳이 내려앉은 절집 풍경이 고즈넉하다.



지붕 위의 작은 지붕, 솟을지붕을 보셨나요?

송광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 승보사찰답게 수선 영역이 장대하다. 대개의 사찰에서 수행공간이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에 비해 이곳에선 대웅보전 뒤의 높은 석축 위에 있다. 승보사찰 송광사를 대표하는 국사전을 비롯하여 설법전, 수선사, 하사당, 상사당(삼일암), 응진전 등의 건물들이 이곳에 있다. 출입이 금지되어 들어갈 볼 수는 없으나 보조국사 승탑에서 보면 수선 영역의 공간 구성을 엿볼 수 있다.

 하사당의 솟을지붕
ⓒ 김종길


건물들을 보다 보면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이 솟아 있는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띈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된 하사당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승방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하사당은 부엌이 딸려 있는데 그 부엌 칸의 환기창으로 쓰인 것이 지붕 위의 작은 지붕, 솟을지붕이다. 솟을지붕은 전라도 지방의 살림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구조로 일종의 환기장치다. 종고루 옆 약사전 앞의 건물에서도 솟을지붕을 볼 수 있다.

하사당과 나란히 있는 건물은 상사당인 선방으로 지금은 조계총림 방장스님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상사당은 제9대 담당국사가 승탑 아래쪽에 있는 영천수를 마시고 사흘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삼일암(三日菴)'이라고도 한다.

유물전시를 하는 성보각은 입구부터 살벌하다.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경고가 섬뜩할 정도로 강력하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사진이 유물에 주는 손상 여부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찍지 말란다. '금지'에 대한 맹목성은 일종의 병이다. 보물로 지정된 경패의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조심스레 담았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침계루
ⓒ 김종길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천왕문으로 나왔다. 우화각을 돌아서면 침계루다. '시내를 베고 누워 있다'라는 뜻처럼 계류에 있는 모습이 퍽이나 장하다. '사자루'라고도 불리는 침계루는 앞면 7칸, 옆면 4칸의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이다. 계곡 쪽으로 뻗은 기둥들을 보고 있자니 눈맛이 시원하다. 마치 탁족을 하며 공부를 하는 스님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2층 누각인 침계루는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활짝 연 바라지창이 시원스럽고 아래층 꽃창이 정갈하다.



"감춰두고 스님만 몰래 볼 심산이군. 이렇게 아름다운데..."

조계산의 양쪽 기슭에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는 굴목재라는 재로 넘나들 수 있다. 송광사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우화각을 빠져나오면 침계루 맞은편 산 아래로 조그마한 단칸짜리 건물 두 채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척주각과 세월각이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절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씻는 곳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척주각에서,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 이들은 많아도 눈여겨보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마치 번잡한 저잣거리 구석의 장의사처럼 처연한 분위기만 물씬하다. 보조국사가 꽂았다는 지팡이는 고사목이 되어 깃대처럼 높이 솟아 있다.

 척주각과 세월각
ⓒ 김종길


계곡 이쪽으로 제법 우람한 건축물들이 담장 너머로 보인다. 저편의 대웅보전 및 수선영역과는 다른 화엄전 영역이다.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사상을 수용한 보조국사의 정혜쌍수 정신이 깃든 곳이다. 화엄전 영역을 지나면 푸른 대숲이다. 대숲을 벗어나면 이내 조계산으로 접어들게 된다. 승과 속의 경계이면서 승속이 하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숲 끝 오른쪽으로 돌담을 두른 채마밭이 보인다. 이제 산속의 평범한 풍경이 그려지나 하며 계곡을 옆으로 끼고 타박타박 걸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통 붉은 단풍숲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작은 돌다리가 계곡에 걸쳐 있는 이곳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수행공간이다.

온통 붉다. 송광사 일대에서 가장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출입금지 푯말을 보고 아내가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 한다.

"스님만 감춰두고 몰래 볼 심산이군. 이렇게 아름다운데."

단풍숲을 비켜 계곡을 건너면 조계산을 대표하는 골짜기인 홍골로 이어진다. 홍골은 송광사에서 계곡을 따라 얼마간 올라가면 왼쪽에 있다. 홍골의 우리말 이름은 '홈골'로, 아랫마을 사람들은 '홈대골'이라 불렀는데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한자 홈통 홍(篊)자를 써서 '홍골'로 부르게 되었단다.

 너무나 붉은 송광사 승방 옆 단풍
ⓒ 김종길


효령봉과 시루봉 중간의 장박골 말발굽 능선 삼거리에서 길게 뻗어 내린 골짜기가 깊고 가팔라 마치 그 모습이 홈통 모양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홈통은 물을 대기 위해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거나 가운데 마디를 없애 만든 관을 말한다. 혹 어떤 이들은 단풍이 많아 붉을 홍(紅)자가 아닌가 여기는 이도 있으나 이 골짜기에 사실 단풍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절집 뒤 은밀하게 숨어 있던 단풍숲은 딱 그만큼이었다. 산속으로 접어들자 단풍은커녕 메마른 잎만 숲에 나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친 발이 계곡을 가로질러 있었다. 발아래론 폭포에서 떨어진 맑은 물이 소를 이루고 있다. 몸을 씻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터. 스님이 그랬나 보다. 초겨울임에도 아직 발이 그대로 있으니 미처 거두지 않았음이라. 속(俗)의 눈을 피해 승(僧)이 잠시 몸을 씻었던 것일까? 절이 지척이니 선녀가 내려와 선뜻 목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송광사 옆 계곡에 누군가 친 발
ⓒ 김종길


산을 올라서야 가을이 끝났음을 알겠다.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겨울이 성큼 왔음을 알겠다. 인디언 주니 족에게 12월은 '태양이 북쪽으로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남쪽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달'이었다.

 송광사에서 홍골로 가는 길
ⓒ 김종길


▲ 천자암 쌍향수 천연기념물 제88호다. 송광사의 3대 명물로 이 두 그루의 향나무는 실제로 보면 그 크기가 장대하다. 천자암의 뒤뜰에 있는 이 쌍향수는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인 중국 금나라의 왕자 담당이 꽂은 지팡이가 뿌리내린 것이라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800살이 넘었다고 한다. 마치 스승과 제자가 서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 김종길


덧붙이는 글 | ☞ 순천역에서 63번, 111번 버스를 타면 송광사로 간다. 버스는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30~50분 간격으로 자주 있으며 1시간 20여분 소요된다. 자세한 정보는 순천역 앞 관광안내센터에 들르면 알 수 있다. 송광사에서 낙안읍성 가는 버스는 8시 55분, 11시 5분, 15시 5분, 17시 35분에 출발한다.


* 이 글은 코레일과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열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