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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만해 한용운과 김동리가 다솔사에 간 까닭은?

 

 

만해 한용운과 '등신불'을 쓴 김동리가 다솔사에 간 까닭은?

 

'다솔' 참 예쁘다. 이름만 들어도 괜히 설렌다.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소나무가 많아서일까. 차나무가 많아서일까. 많이 거느려서일까. '솔松'과 ‘솔窣’의 음과 '다多'와 '다茶'가 주는 음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주가 다솔사가 아닌가 싶다. 절의 내력이야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의미라고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제대로 뜻만 안다면 자신의 느낌대로 이 산사를 기억하는 것도 좋으리라.

 

 

다솔사는 지금이야 차로 휑하니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길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인 고은은 자전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에서 하동을 찾아 장바닥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다솔사로 걸음을 놓았다. “정작 다솔사는 다솔사역에서 멀다. 그 먼 산길을 터벅터벅 올라가면 퇴락할 대로 퇴락한 고찰이 있는데 그것이 다솔사이다.”고 토로했다.

 

다솔사 솔숲길

 

시인의 말대로 버스도 자주 없던 그 시절, 다솔사에 가려면 다솔사역에 내려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야 했을 것이다. 산사가 그대로 역 이름이 된 다솔사역도 2007년 6월부터 기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 됐다. 이젠 다솔사에 가려면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버스로 곤양터미널로 가거나 기차로 완사역에서 내려 하루 몇 대 오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폐역이 된 다솔사역

 

 

 

다솔사는 얼핏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솔숲이 장관이다. 절을 지키는 소나무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르는 길은 든든하고 눈맛이 시원하다. 중간 중간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있어 숲을 한층 풍요롭게 한다. 주말이면 오가는 차들로 숲의 고요는 쉽사리 깨지지만 평일에는 그럭저럭 숲길만의 한갓짐을 즐길 수 있다. 울울창창한 숲길을 따라 절집을 오르다보면 '어금혈봉표(御禁穴封標)'라 적힌 바위가 나온다. 1890년 고종 때 어명으로 경상도 진주관아 곤양읍성에서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 혈(묘자리)을 금지한 표석이다.

 

어금혈봉표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이라는 내력만큼 산중의 그윽한 산사이다. 절이 창건됐던 지증왕 때는 영악사로 불리다 의상대사가 영봉사라 했다가 도선국사가 지금의 다솔사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대양루

 

숲길이 끝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지만 매번 이 주차장에 이르러 산사로 오르는 호젓함은 여지없이 끊겨버린다. 고요가 싹둑 잘려나간 생채기에 허연 생살이 아프다. 아래 휴게소의 주차 공간만 해도 충분한데...

 

 

층계를 밟아 오르면 육중하면서 고졸한 멋이 있는 대양루가 눈길을 끈다. '큰 볕이 내리는 누각'인 만큼 언제나 햇볕 넘치는 루(樓)이다. 대양루 옆에는 샘이 졸졸졸 솟아나고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퍽이나 아름답다. 아마 이 공간이 다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일 게다. 나지막이 층층 쌓아 올린 돌층계가 앙증맞고 기왓장으로 문양을 낸 흙담으로 향한 시선을 따라가면 짙은 숲 사이의 적멸보궁에 이르게 된다.

 

 

살짝 층계를 디뎌 대양루 안을 들여다본다. 2층인 대양루는 아래쪽 기둥들은 휘어진 대로 그대로 쓰고, 대신 위쪽 기둥은 잘 다듬은 목재를 사용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대양루 법고에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하여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다솔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대양루는 지금은 퇴락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민족정신 함양의 도장이었다.

 

대양루 내부

 

대양루 맞은편이 적멸보궁이다. 원래는 대웅전이었는데, 1979년 응진전을 수리하다가 탱화 뒤 벽에서 사리가 발견되어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증개축한 뒤 불사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적멸보궁 옆에는 파괴되어 형체를 알 수 없는 탑 한 기가 있다. 처음 불사리 108과가 이곳 탑에 모셔졌던 것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응진전 탱화 뒤 벽으로 옮겼다고 한다.

 

 

적멸보궁 안에는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의 모습인 와불상이 있다. 법당에서 보면 뚫린 벽면으로 사리탑이 보인다. 소원을 빌며 탑 주위를 빙빙 도는 사람들이 정성스럽다.

 

적멸보궁에는 와불상이 있고 뒤에 불사리를 모시 사리탑이 있다.

 

 

 

법당 옆 응진전은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1930년대에 만해 한용운이 수도하면서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다솔사를 거쳐 간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만해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때 12년간 이곳을 왕래하면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고 항일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했다. 그가 머문 곳이 요사채 '안심료(安心寮)'이다.

 

응진전과 극락전

 

안심료는 또한 소설가 김동리가 1960~1961년 동안 머물면서 '등신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김동리는 효당 스님이 '광명학원'이라는 야학을 세우자 야학교사로 부임하여 다솔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때 대양루가 수업장소였다고 한다. 그 후 만해로부터 중국의 한 살인자가 속죄를 위해 분신 공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뒷날 '등신불'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등신불'의 배경이 다솔사이다.

 

 

이외에도 불교철학을 연구하는데 힘쓴 김범부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효당 최범술, 김법린 등이 이곳을 거쳐 갔다. 특히 다솔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난 최범술은 60년 가까이 이곳에 머물면서 절 뒤쪽 비탈에 차밭을 일구었다. 지금도 차밭이 적멸보궁 뒤로 넓게 펼쳐져 있다. 흔히 다솔사는 '다사茶寺'로 불리며 차로 유명한데, 이는 독립 운동가로 나중에 출가를 해 스님이 된 효당 최범술이 만들어낸 '반야로차' 때문이다. 효당의 부도는 다솔사 입구 휴게소 언덕배기에 있다.

 

안심료

 

안심료는 그럭저럭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만해와 김동리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들의 이곳에서의 행적을 소개하는 푯말만 툇마루에 이리저리 있을 뿐이다. 안심료 앞에는 만해가 자신의 회갑을 맞은 1939년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허백련 등과 함께 심었다는 황금 편백나무 세 그루가 있다. 황금빛 잎사귀를 가지고 있어 '황금공작편백'으로 불리는 이 세 그루는 훤칠하니 잘도 생겼다.

 

만해 한용운이 회갑을 맞아 기념으로 심은 황금공작편백

 

 

차향으로 이름 높은 다솔사 차밭

 

고졸하지는 않지만 그윽한 다솔사 전경

 

효당 최범술 부도

 

절 아랫마을까지 걸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숲을 나와 아스팔트길을 걷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따금 차들이 쌩쌩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면 노랗게 꽃을 피우는 모감주나무에 꽈리모양의 열매가 열렸다. 버스시간은 3시, 곤양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시각이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겨우 알아낸 버스시간. 터미널에서 다솔사까지는 10여 분 걸릴 거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순신장군 백의종군로 표지석

 

마을에 다다르자 다리 힘이 스르르 풀렸다. ‘노량 23.6km, 합천 (율곡) 97.3km. 이순신 백의종군로’라고 적힌 표지석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렌즈로 버스가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카메라에서 얼른 눈을 뗐다. 버스가 온 시각은 3시 4분. 10여 분 걸릴 거라 예상하고 늑장을 부렸다면 버스를 놓쳤을 것이다.

 

하루에 몇 차례 다솔사 아랫마을을 지나는 버스를 겨우 타다

 

승객은 단 한 명, 아주머니 한 분. 기사에게 하마터면 놓칠 뻔한 버스에 대해 얘기했고 기사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버스는 원전을 지났다. 이때가 3시 10분쯤이었다. 곤양과 완사의 중간쯤에 있는 원전은 완사역에 딸린 오늘날의 여관쯤 되는 봉계원이 있었는데,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어 십오리원이라고도 했다. 이순신이 합천 삼가에서 노량으로 백의종군할 때 수군의 패보를 들은 십오리원이 바로 지금의 원전이다.

 

완사 버스정류장

 

완사역에서 다시 경전선 부전행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