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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길

첩첩산중 오지 산길, 꿈에서 걷다

 

 

 

 

 

 

첩첩산중 오지 산길, 꿈에서 걷다

  - 오지 도등기 마을 가는 산길

 

꿈. 인간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꿈을 꿀까? 여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요즈음 부쩍 꿈을 많이 꾼다. 새벽에 잠을 깨기가 일쑤, 간혹 한참을 멍하니 있다 창에 비친 희뿌연 빛을 보며 다시 잠을 청한다. 그래도 고마운 건 끔찍한 꿈은 사라졌다는 것, 꿈도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떠났다. 깊은 산중 첩첩 산길을 나는 걷고 있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오지의 산길. 큰 내를 만났다. 걸음을 멈추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계곡물에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시고서야 내를 건널 수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인적 하나 없는 산길을 홀로 터벅터벅 걸었다.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동공을 크게 하여 건너편 산과 골짜기를 더듬었다. 옅은 안개 아래로 몇 채의 집들이 보였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군.’ 혼자 중얼거리며 마을로 내려갔다.

 

 

이상하게도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달구지 하나 지날 정도의 마을길에도, 산비탈을 일군 손바닥만 한 밭에도, 사립문을 열치고 본 마당에도 사람은 없었다. 깊은 정적만이 흘렀다. 개도 더 이상 짖지 않았다. 마을을 나왔다.

 

 

다시 길은 계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어졌다. 마을 끝자락의 밭에 복숭아꽃이 피어 있었다. 산중에서 본 도화는 요염하다, 고 여기고 있는데 갑자기 길이 없어졌다. 순간 땅이 푹 꺼지는가 싶더니 발 아래로 숲이 펼쳐졌다. 온통 연둣빛에 드문드문 복사꽃, 산꽃들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은은한 봄빛에 나도 모르게 ‘아’ 하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

 

작년 봄, 옥계동에 자리한 침수정에서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침수정 대문의 열쇠를 갖고 있어 이 옥계동의 경치를 손에 쥐고 있는 거나 진배없었다. 침수정을 내려와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골짜기 사이로 희끄무레한 산길이 보였다.

 

 

정자 앞을 흐르는 물이 요동치며 소를 만드는 계곡물 건너, 끊어질 듯 스멀스멀 사라지며 위태로이 산을 넘는 산길이었다. '저 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무엇이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여행자의 표정을 살피던 아주머니는 산을 넘어 한참을 가면 ‘죽장’이라고 했다.

 

차를 몰았다. 길은 처음부터 큼직한 돌이 튀어나오고 군데군데 움푹 파진 길이었다. 차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길이 좁아 차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 비포장길을 오르자 아래로 긴 협곡이 펼쳐졌다. 긴 골짜기를 따라 비포장길은 계속되었고 계곡과 나란히 가는가 싶으면 때론 계곡을 건너기도 했다. 계곡 인근에만 포장이 되어 있었는데 물이 넘쳐 조심해서 건너야 했다.

 

 

 

처음으로 집을 보았으나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허연 페인트로 바위에 무심하게 칠한 ‘영덕→’ 이라는 글씨만 보인다.

 

 

“반은 포장이 되어 있고 반은 울퉁불퉁 흙길인데 갈 만한 길이오.” 아주머니의 말이 순진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가도 길은 울퉁불퉁 그대로였다. 양 옆의 높은 산봉우리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계곡물은 지치지도 않고 길과 함께했다.

 

 

 

슬슬 지겨워질 즈음, 갑자기 길이 넓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낡은 집들이 몇 채 보이더니 마을이 나타났다. 산중치곤 제법 너른 터에 마을은 자리하고 있었다. 하옥. ‘아’ 그제야 무릎을 ‘탁’ 쳤다. 이런 바보 같으니 여기가 바로 하옥이었구나. 깊은 계곡에 지도마저 잊은 채 무언가에 홀려 꿈을 꾼 듯 온 것이었다.

 

 

 

이제부턴 사람의 흔적이 더러 보인다. 옛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는 이곳 골짜기에는 등잔 불빛을 따라 길을 따라와 터를 잡았다는 도등기 마을, 배와 지미를 닮은 배지미 마을, 세상을 등지고 산 둔세동이 있다.

 

그 옛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는 이곳에도 분교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수련원으로 쓰고 있었다. 차를 돌릴 만한 터가 있는 배지미에서 세상과의 길은 넓어진다. 잠시 당집에 들렀다.

 

 

 

‘죽장 24km'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비포장길은 계속 되어도 길가에 전봇대가 줄지어 있어 인간세상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 하옥에서 흘러나온 계곡물은 여행자가 지나온 옥계계곡과 만나 영덕의 젖줄인 오십천으로 흘러간다. 20km가 넘는 이 긴 산길도 마침내 끝이 났다.

 

 

작년 봄, 우연히 이 길을 알게 된 건 분명 행운이었으나 무작정 떠난 길이라 걷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일까. 그때 이 길을 걷지 못했으니 오늘 꿈에서 걸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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