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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길

혼자서 혹은 여럿이 남쪽바다 숲의 매력에 빠지다

 

혼자서 혹은 여럿이 남쪽바다 숲의 매력에 빠지다

고기떼를 부르고 바람을 막은 물건방조어부림

 

나는 하루에 최소한 네 시간 동안, 대개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일체의 물질적 근심걱정을 완전히 떨어버린 채 숲으로 산으로 들로 한가로이 걷지 않으면 건강과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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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여러 주일, 여러 달, 아니 사실상 여러 해 동안 상점이나 사무실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지내는 내 이웃 사람들의 참을성, 혹은 정신적 무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산책>

 

물건리방조어부림은 약 300년 전 마을사람들이 방풍과 방조를 목적으로 심었다

 

숲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나오기 전에 이미 존재해왔으며 인간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 본연을 찾아가는 곳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숲을 소중히 가꾸어 왔으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일부러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어 신성시해왔다.

 

원시의 숲 그대로이다

 

특히나 마을의 역사와 문화, 신앙을 간직한 마을숲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보호하고 조성한 숲으로 마을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마을이 생긴 이래 마을숲은 신앙의 중심 혹은 주민들의 휴식처와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내왔다. 이러한 마을숲들은 대개 동네 어귀에 조성되어 풍수나 비보를 위한 숲으로, 솟대나 돌탑, 당집을 감싸 안은 숲으로, 그 자체가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신성을 표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숲들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 마을숲들이 대개 해안이나 깊숙한 산간에 집중되어 있어 숲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남해섬에도 동구숲·동산숲·호안숲·해안숲 등 다양한 마을숲의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해안숲이다. 해안숲 가운데 가장 크고 울창한 숲이 바로 ‘물건방조어부림’이다.

 

 

죽방렴으로 잘 알려진 지족마을을 지나 삼동면소재지에서 3번 국도를 따라 곧장 가면 독일마을이 나온다. 이국적인 독일마을이 참 예쁘다고 느낄 때 멀리 바다가 보이고 초승달처럼 크게 휘어진 해안을 따라 울창한 숲이 내려다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그 숲이 바로 물건방조어부림이다.

 

 

이 숲은 1959년에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된 방풍림으로 마을주민이 관리하는 역사적인 유물이다. 길이 1,500m, 너비 약 30m로 약 300년 전 마을사람들이 방풍과 방조를 목적으로 심었다.

 

 

‘방조어부림(防潮御府林)’이란 본디 고기떼를 부를 목적으로 해안가·호숫가·강가 등지에 나무를 심어 가꾼 숲을 말한다. 나무숲이 고기떼를 부른다는 것은 녹색을 좋아하는 물고기들의 습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원래 이곳 사람들은 ‘방조어유림(防潮御游林)’이라 불렀다고 한다. 숲은 파도와 바람을 막고 물고기들을 끌어들이는 고기잡이 장소로서의 구실과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예전에는 숲이 마을까지 연결되었다고 하니 숲의 규모가 꽤나 줄었다.

 

 

매년 10월 보름이면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내는데, 숲 속에 서 있는 이팝나무가 서낭당나무로 되어 있다. 1933년 큰 폭풍이 몰아쳤을 때에도 이웃 마을인 대진포는 피해가 컸음에도 물건리는 이 숲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19세기 말엽 이 숲의 일부를 벌채하였다가 그 해 폭풍을 만나 상당히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런 후 이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고 생각하여 숲의 나무를 베는 사람은 5원씩(당시로 백미 5두였다고 한다)의 벌금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합심하여 숲을 잘 지켜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 말엽 일본인들이 목총을 만들기 위해서 이 숲에서 7그루의 느티나무를 자르려고 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총칼에 맞서 이 숲을 없애겠다면 차라리 우리를 죽여 달라고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숲길은 보일듯 말듯 흙길이었다가 자분자분 몽돌길로 바뀌기도 한다

 

이 숲에서 자라는 나무의 높이는 대체로 10∼15m이다. 상층목이 약 2,000그루이고, 하층목은 8만 그루가 넘는다고 한다.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열거만 해도 숨이 찰 지경이다.

 

 

상층은 팽나무·푸조나무·상수리나무·참느릅나무·말채나무·이팝나무·무환자나무·아카시아·후박나무 등이고, 하층은 산딸나무·때죽나무·소태나무·모감주나무·광대싸리·까마귀밥나무·백동백나무·생강나무·찔레나무·초피나무·갈매나무·쥐똥나무·누리장나무·붉나무·보리수나무·두릅나무·병꽃나무·화살나무 등이다. 상층과 하층 사이에는 인동덩굴·담쟁이덩굴·새머루·줄딸기·청미래덩굴·청가시덩굴·댕댕이덩굴·복분자딸기·노박덩굴·개머루·송악 등의 덩굴식물이 자라고 있으니 가히 ‘마을숲의 보고’라 할 만하다.

 

 

아내와 딸, 셋이서 숲길을 걸었다. 숲 가운데로 난 길은 또렷하지도 그렇다고 희미하지도 않았다. 수풀 사이로 길이 보일 듯 말 듯 하다가도 어느새 수림 사이로 소롯한 흙길이 나타나고 어떤 길은 바닷가 몽돌이 깔려 자분자분 걷기에 좋다. 길의 매력에 푹 빠지기에 충분한 오솔길이었다.

 

숲을 벗어나면 몽돌해변이 펼쳐진다

 

초승달처럼 길게 휘어진 숲 가운데에 들어서면 어떤 외부의 소리도 차단되어 숲 고유의 정적이 생긴다. 숲의 두터움이 만들어낸 정적이 단조로울 새라 간혹 숲 자체가 소리를 내고 수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파도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파도소리를 따라 원시의 숲을 벗어나면 어느덧 세상은 온통 밝은 빛으로 하얘지고 몽돌해안이 길게 이어진다. 방파제 끝 등대가 있어 바다와 하늘을 가르고 이따금 나타난 어선 한두 척이 마을이 있음을 말해준다.

 

매년 10월 보름이면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내는데, 숲 속에 서 있는 이팝나무가 서낭당나무로 되어 있다

 

요즈음 부쩍 숲을 자주 찾는다. 몸이 원하는 것도 있지만 맑고 고요함을 원하는 정신도 숲을 기어이 찾게 하고 있다. 혼자 집을 떠나 원시 그대로의 숲을 걷는다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나 아내와 딸과 함께 숲길을 걷는다는 것도 분명 행복한 일이다.

 

 

혼자서 걷는다는 것은 자기만의 고독을 즐기는 것이자 명상과 자유스러움, 소요의 모색이기도 하다. 오히려 혼자임으로 해서 덜 외롭고 내면을 더듬다 보면 길이 이내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늘 혼자 길을 떠날 수도 없고 늘 혼자 걸을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론 자신이 얻은 경험의 어느 한 몫을 내어주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길의 침묵을 나누어 가지는 것도 좋은 일이다.

 

 

혼자 혹은 둘이서, 그도 아니라면 여럿이 숲을 거닐더라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침묵이다. 사람들과 나눌 이야기를 굳이 숲길의 고요함을 깨뜨려가면서까지 수다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우주와 하나 되는 느낌, 온갖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감정, 숲에 자라는 모든 생명과 침묵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시간의 고요함과 한갓짐을 절대 깨뜨려서는 안 된다.

 

요즈음 사진 찍는 재미에 빠진 아홉 살 딸애가 잠시 찍어주었다

 

혼자서 혹은 여럿이라도 숲의 매력은 늘 충만하다

 

숲에서 본 독일마을

 

☞ 물건방조어부림은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있다. 독일마을 아래에서 해안 쪽 마을길로 들어서면 숲에 이른다.

 

작년 초봄, 독일마을에서 본 물건리방조어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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