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걷기 좋은 길

백제 여인과 남몰래 걷고 싶은 길




1,500년 전 백제의 시간을 걷다, 부소산성


아직도 뜨거운 햇살, 부소산으로 갔습니다. 백마강을 옆구리에 끼고 부여 시내를 부드럽게 내려다보는 산이 부소산입니다. 그곳에는 옛 가락에 늘 빠지지 않는 삼천궁녀의 낙화암도 있습니다. 학창시절 경주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수학여행 코스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예전의 기억은 간 데 없고 다만 주차장만 낯에 익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니 숲길이 이어집니다. 돌로 바닥을 깔았는데 걷기가 영 불편합니다. 그래서 숲으로 난 길을 걸었습니다. 안내판이 나왔습니다. 길은 두 갈래, 어떤 길로 가도 낙화암과 고란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행자는 오른쪽 비탈길을 택했습니다. 낙화암만 곧장 다녀올 거면 왼쪽 길이 빠르지만 그냥 느긋하게 걷기로 마음을 먹은 바에야 그 옛날 백제의 흔적을 구석구석 느끼고 싶었습니다. 삼충사에서 옛 성의 흔적을 따라 반월루와 사자루를 거쳐 낙화암과 고란사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전체 4km정도로 2시간 남짓 걸리더군요.

삼충사

삼충사에 제일 먼저 들렀습니다.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홍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1,500년 전 그들의 충심이 사당 옆 붉은 배롱꽃에 서려 있는 듯합니다. 숲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사당은 그 단정함으로 엄숙하기 그지없습니다.


삼충사 옆을 돌아 숲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길은 옛 부소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토성의 흔적이지요. 울창한 솔숲에 토성의 흔적이 가려질 법도 하지만 옛 흔적은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해설사가 아니었다면 이 호젓한 길을 모르고 누구나 가는 무미한 길로 갔을 것입니다.


햇살도 숲에 가려 잠시 번득이는가 싶더니 이내 자취를 감춥니다. 숲의 기운과 옛 역사의 뭉텅한 흔적만을 쫓아 얼마간 걸으니 구름에 비켜선 누각 한 채가 나타났습니다. 반월루입니다.

부소산의 누각 이름에는 해와 달이 있습니다. 해를 맞이하는 영일루가 동쪽에 있고, 달을 구경했던 송월대가 서쪽에 있습니다. 반월루는 딱 그 중간쯤에 있습니다. 높이 106m에 불과한 언덕 같은 부소산이지만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라 해와 달을 보기에 이처럼 좋은 장소도 없을 듯합니다. 그 옛날 밤이면 화려했던 사비궁과 유유히 흘러가는 백강을 보며 후원 부소산에서 달구경을 했다면 이보다 기막힌 경치가 어디 있었을까요.

반월루

땀 한 번 훔치고 반월루에 올랐습니다. 누각의 층계를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풍경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침내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을 몰고 왔습니다. 그 바람의 끝에 드넓은 부여가 나타났습니다. 가슴이 탁 트이는 전경이었습니다. 부여 시내를 천천히 에둘러 흐르는 백마강은 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부여 시내와 백마강

한참이나 넋을 빼고 보았습니다. 아예 난간에 걸터앉아 멍하니 내려다보았습니다. 굳이 저기가 어디라고 말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아득한 풍경은 백마강을 거슬러 그 옛날 사비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숲길이 이어집니다. 옛 백제 왕자들이 산책했다는 태자골 숲길이 나옵니다. 길이 여러 갈래니 굳이 욕심내지 않고 그 숲길은 왕자들에게 내어주고 사자루로 향했습니다.


얼핏얼핏 숲 사이로 보이는 길이 너무 곰살맞습니다. 쭉쭉 뻗은 소나무와 짙은 풀 사이로 허연 속살을 드러낸 야릇한 길입니다. 백제의 여인과 남몰래 단둘이 걷고 싶은 그런 길입니다. 꼭꼭 숨겨 놓고 싶은 길입니다. 가끔 길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해 다시 길 위에 서곤 합니다. 어느새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사자루

길은 사자루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합니다. 사자루는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자리로,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건물을 세울 때 정지원이라고 적힌 백제시대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사자루 현판은 의친왕 이강이 썼습니다.

고란사 나루

사자루에서는 금강이 백마강으로 들어오는 장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인위적으로 모래를 파냄으로 인해 백제에 대한 회상마저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낙화암으로 곧장 가지 않고 고란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사자루에서 고란사까지는 제법 경사가 있는 내리막입니다.

고란사 현판

강변 언덕에 있는 고란사는 아주 작은 절입니다. 황톳물 백마강이 바로 앞에 흐르고 강을 오르내리는 선착장이 코앞입니다. 고란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백제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궁녀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법당 건물은 조선 정조 21년(1797)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왔다는 것입니다.

고란사하면 누구나 고란초와 낙화암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 흔했다는 고란초는 이야기일 뿐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물을 먹고 아이가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란약수는 지금도 콸콸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고란사라고 적힌 법당 현판이 너무 예뻐 절로 눈길이 갔습니다. 자세히 보니 해강 김규진의 글씨였습니다.

낙화암 백화정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낙화암으로 돌아갔습니다. 낙화암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었습니다. 낯섦이 없으면 편안해야 되는데, 애잔하고 가슴 한 구석이 퀭한 듯합니다. 백화정에 잠시 올랐다가 벼랑 끝에 서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강 아래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구슬픈 음악을 실고 배 한 척이 다가옵니다.


낙화암에 오면 누구나 삼천궁녀를 떠올립니다. 그에 대한 말도 무성하지요. <삼국유사>에는 사비도성이 함락될 때 궁인들이 투신했다고 하여 '타사암'이라 불렸다고 적고 있습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문인들의 글에 자주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궁녀의 수를 삼천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15세기 후반의 문인 김흔이 <속동문선-낙화암>에서 '
삼천가무위사진三千歌舞委沙塵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겨' 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역사를 극적으로 묘사한 시적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낙화암에 서 보니 이조차도 허망하게 여겨집니다.


지는 해를 남겨두고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이 서둘러 내려가 버린 빈 숲길을 혼자 걸었습니다. 숲에 새겨진 길처럼, 희미한 백제의 역사도 이제 조금은 또렷이 다가온 듯합니다.


터만 남은 서복사지에는 어둠이 내렸습니다. 숲을 빠져나왔습니다. 왕궁 터 너머로 햇빛이 아주 잠깐 비추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백제,
천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

신동엽의 <금강> 중에서

관북리 왕궁 터

김천령의 여행이야기에 공감하시면 구독+해 주세요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김천령의 풍경이 있는 한국기행]에 링크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