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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아득히 구름 끝에 매달린 암자를 가다

 

 

 

 

 

아득히 구름 끝에 매달린 암자를 가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⑱〕지리산 유람 필수 코스, 불일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벼랑 너머에서 나타났다. 파르라니 맑은 얼굴의 스님이 앞서고 그 뒤를 네댓 명의 등산객이 쑥덕이며 뒤따르고 있었다.

 

 

“여기는 꼭 들러야 돼. 사람들이 대개 폭포만 보고 이곳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라고.”

 

완벽한 등산복 차림을 한 오십 대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일행들을 멈춰 세우고 아는 체를 한다. 이곳저곳 여행 깨나 다녔다는 표정이다. 그가 잠시 설명하느라 지체하는 사이 스님은 암자 안으로 사라졌다.

 

 

“이곳은 말이야. 법정 스님이 머물기도 한 곳이지. 불일암. 다들 들어봤지?”

 

사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하자 ‘아’ 하며 순간 모두 동의하는 듯했다. 근데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넙데데한 얼굴의 사내는 확신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기 봐. 의자도 있잖아. 법정 스님이 앉았던 저 나무의자 말이야. 어, 그래 빠삐용 의자.”

 

 

고개 젓던 이를 의식한 듯 등산복 사내는 다그치듯 말을 이어갔다. 머쓱해진 사내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나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언의 신호를 받은 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한마디 던졌다.

 

“법정 스님이 머문 곳은 송광사 불일암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제야 혼자 갸우뚱하던 남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송광사 불일암이라고요.. 송광사에는 불일암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등산복 사내는 이방인이 끼어들어서인지 조금은 불쾌한 듯했고 자신의 주장을 쉬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인터넷을 찾아보는 게 제일이지.’ 누군가 제안했고 잠시 조용해지더니 ‘거 봐, 송광사에 불일암이 있네.’ ‘어, 법정 스님이 불일폭포 옆 불일암에도 머물렀다는 글도 있는데.’ 그야말로 아수라가 따로 없다. 조용했던 암자는 때 아닌 논쟁으로 번다해졌다.

 

 

언쟁을 벌이던 등산객들이 사라지자 암자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그제야 아까 봤던 스님이 선방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기척이 전혀 없다. 문을 열고 한마디 했을 법도 한데 스님은 요지부동이다. 삼매에 들었는가, 아니면 부질없는 언쟁에 지긋이 웃고만 있었을까.

 

 

<중아함경>과 <열반경>에는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말라족의 귀족으로 큰 상인인 풋쿠사가 쿠시나가르에서 파바로 가는 도중에 붓다와 마주쳤다. 그는 붓다에게 인사를 드리고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승인 아라다 카라마(그는 붓다가 처음 수행할 때의 스승이기도 했다)가 깊은 참선의 경지에 들어 5백 대의 마차 대열이 바로 곁을 지나가는데도 모르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스승의 수행의 깊이를 칭찬했다. 이에 붓다는 태연히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었다.

 

“언젠가 나는 아투마촌의 암자에 머물고 있었는데, 때마침 커다란 벼락이 떨어져 두 형제와 네 마리의 소가 죽는 큰 사건이 생겼소. 나는 그때 좌선을 하고 있어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사람들한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알았소.”

 

이 말을 들은 풋쿠사는 아라다 카라마보다 붓다가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 붓다의 우바새(재가신자)가 됐다고 한다. 정신을 통일해 바깥세계를 전혀 느끼지 않는 엄청난 집중력이 선정이라면, 이 선정의 깊이로 종교가의 우열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득히 구름 끝에 매달린 암자

“ (…) 돌 잡고 숲 뚫어 굽은 길 트였으니 / 우뚝한 집 푸른 구름 속에 홀연히 나타나네 / 하늘 바람 은하수에 불어오니 / 정신과 생각 표연히 인간세상 벗어나네” - 기대승의 <불일폭포> 중에서, 《고봉선생문집》

 

지금이야 나무 데크를 깔고 계단을 놓아 불일암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겨울에는 접근이 힘들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그 옛날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불일암 가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절벽의 잔도를 따라 겨우 폭포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김일손(1464~1498)은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이라 했다. 암자가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다’고 했고, 남명 조식(1501~1572)은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했는데,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한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성여신(1546~1632)도 ‘바위 허리에 난 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쪼개어 걸쳐 놓았다. 그 밑은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당시 불일암에 이르는 길은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진양지>에도 ‘비탈진 골짜기가 매우 험준하여 작은 길도 없기 때문에 절벽의 허리를 파고 바위를 따라 한 사람만 용납하는 벼랑 깎아지른 곳에 나무를 깎아 잔도를 만들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암자는 또 현애 위에 있어서 높이가 100여 척이 됐다’고 적고 있다. 응윤(1743~1803) 스님도 ‘갈고리를 허공에 매달고 바위틈을 따라 잡아당기며 나아가면 작은 집이 우뚝하게 서 있는데 속된 생각이 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불일암은 낭떠러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지리산 유람록의 효시를 연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골짜기의 절벽이 매우 높아서 해와 달이 비추질 못한다. 위아래의 높이가 모두 몇백 길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 나 있다. 절벽을 뚫고 오를 수 있는 곳에는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치고 놀라 식은땀을 흘리고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지 않는 이가 없다. 또한 절벽 끝에 암자가 있는데, 그 밑은 백여 길이나 된다.’고 적고 있다.

 

 

이외에도 1618년 불일암을 찾은 양경우(1568~1629)는 불일암을 ‘아득히 구름 끝에 매달린 풍경’으로 묘사했다. 1651년에 불일암을 찾은 오두인은 ‘깎아지른 듯한 사방을 둘러보니, 반쯤은 허공에 뜬 것 같았다. 매우 깔끔하면서고 고요하여 인간 세상의 경계가 전혀 아니었다. 물외의 청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주대는 <유두류산록>에서 ’낭떠러지 허공의 끊어진 곳에 위태로운 백 척의 사다리가 겨우 매달려 있다‘며 불일암 가는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지리산 유람 필수 코스

불일암은 진감국사 혜소가 도를 닦았고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오가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던 선비들에게도 꼭 들러야 했던 필수 코스였다.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한유한, 남효온, 유몽인, 허목 등 조선시대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26세 때인 1489년(성종 20) 4월에 불일암을 찾은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불일폭포를 지극히 아름다운 절경이라 했다. 그는 16일 동안 등구사에서 불일암까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가는 곳마다 기뻐하고 놀랄 만한 경치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한 곳 뿐이라고 했다.

 

1810년 4월에 불일암을 찾은 정석구는 <불일암유산기>에서 “(불일암은) 깊숙한 골짜기와 울창한 숲은 쌍계사만 못하고, 맑고 깨끗한 시내와 암석, 크고 화려한 도량은 신흥사보다 못하고, 편안한 형세와 안온한 언덕은 칠불암보다 못했다. 그러나 우뚝한 듯 편안하고, 좁은 듯 널찍하며, 작은 듯 크고, 완만한 듯 높아, 비할 데 없이 빼어나고 기묘하여 잡념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는 앞의 세 곳이 불일암만 못하다.”고 했다. 1935년 8월에 불일암을 찾은 하겸진은 <유두류록>에서 ‘이 (지리산) 계곡과 골짜기에서 가장 기이한 곳으로는 불일암에서 마무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고 불일암을 추켜세웠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1708년 두 달여 동안 영남을 유람한 김창흡은 <영남일기>에서 ‘(불일)폭포의 전체를 다 거론해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명승으로 이름나 유명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최치원 이래로 1천여 년 동안 식견을 지닌 이가 없음‘을 한탄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선비들의 명산 유람 기록인 지리산 유산기에 불일암과 불일폭포에 대한 묘사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을 이야기한 조선시대의 유산기는 수없이 많으나 하나같이 엇비슷한 내용으로 대략 이러하다. 불일암 가는 길의 험함과 허공에 위태하게 매달린 암자의 아득함, 불일폭포의 웅장함, 주위 산세의 기이함을 묘사하고 있다. 청학봉(향로봉)과 백학봉(비로봉)이 좌우에 있고 기이한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학담(鶴潭)과 용추(龍湫)의 두 못과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완폭대(翫瀑臺) 바위 글씨, 옛날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청학동인 신선의 세계로 이 일대를 묘사하고 있다. 지리산을 유람한 이들은 불일폭포를 일러 개성 송악산의 박연폭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도 했으나 골짜기의 기이하고 웅장함, 폭포수의 웅장함은 박연폭포보다 더 낫다고 했다.

 

 

깊은 벼랑을 돌자 폭포 소리가 세차다. 아마 두꺼운 빙벽 아래를 흐르는 소리일 것이다. 산모롱이를 돌면 폭포가 있겠지만 잠시 쏟아지는 햇볕에 걸음을 멈췄다. 햇살이 비추는 곳에 작은 암자가 있다. 오른편에 서 있는 장대한 전나무 한 그루 옆으로 철옹성같이 돌담을 둘러 지붕이라야 겨우 그 끝만 내밀 뿐이다.

 

 

평상에 앉는다. 나무 사이로 햇빛이 살을 뻗어 비춘다. 빛은 하늘로 이어진다. 빛의 순수함을 따라가면 자기의 본래면목에 이를 것인가. 티베트 <사자의 서(바르도 퇴돌)>에서 죽음에 이르면 강렬한 빛이 보인다고 했던가. 너무 밝아서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지혜의 빛을 따라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 자체가 원래 자신의 본래면목임을 깨닫게 되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 했다.

 

 

법당 뒤에는 폭포 위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작은 텃밭. 한겨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람도 자고 햇볕이 따스하다. 눈이 쌓여 계곡을 건널 수가 없어서 저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득한 산봉우리와 그 너머의 푸른 허공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옛날 이곳을 지나던 이가 바위에서 봤다는 글씨는 눈 속에 파묻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청학이 날아오를 만큼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산속의 적막함 속에서 참다운 말을 깨닫는 것, 오직 물외를 노닐어본 사람만이 그 뜻을 알리라.

 

 

깊은 절간에 붉은 꽃비 내리고

우거진 대숲에 푸른 연기 피어 오른다

흰 구름은 산마루에 엉키어 자고

푸른 학은 스님을 짝하여 조는구나

 

- 서산대사 휴정의 <불일암> 《청허당집》

 

 

 

 불일암 일대의 명소

불일암은 옛 문헌 대부분에서 쌍계사 위쪽 10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2.5km 정도로 1시간 남짓이면 이를 수 있다. 불일암은 진감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하던 암자로 전해진다. 암자와 폭포에 붙은 ‘불일’이라는 이름은 보조국사 지눌의 시호로 알려져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을 언제 다녀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삼정산 상무주암에서 40세 때인 1198년부터 1200년까지 3년을 머물렀던 보조국사는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에서 결사를 하게 된다. 삼정산에 머문 3년 동안 이곳을 들렀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으나 기록은 없다. 암자의 이름을 흔히 불교에서 부처를 가리키는 ‘불일(佛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불일폭포 그림에는 <佛一庵 瀑布>로 나온다. 불일암은 수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1983년에도 소실되었다가 2008년에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불일암 가는 길에는 예전 청학동으로 불리던 불일평전,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마족대 등이 있다. 불일폭포는 지리10경 중의 하나로 남한에서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높은 60m의 거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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