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암자로 가는 길

중국 선승의 머리를 묻은 암자

 

 

 

 

 

중국 선승의 머리를 묻은 암자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⑲〕지리산의 별천지, 국사암

 

▶ 국사암 가는 길에서 본 쌍계사

 

적묵당 옆 여여문. 마음이 곧 적(寂)이고,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듣는 바 없이 듣는 것이니, 무설이니 설선이니 적묵 따위가 무엇이랴. 있는 그대로의 마음, 그냥 그대로의 마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대웅전 옆 와편담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비질을 하던 행자승이 먼저 말을 건넨다. 지난해 8월 쌍계사에 왔다는 행자승은 오늘 처음 담장을 눈여겨봤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행자승은 무엇을 비질할 것인가.

 

쌍계사 금당 오르는 길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렬로 정연하게 들어선 건물들. 이곳에서 해강 김규진과 선조의 일곱 번째 왕자인 의창군 광의 글씨를 본다. ‘삼신산 쌍계사’라고 적힌 일주문 현판과 대웅전 현판이 각기 그들의 글씨다. 금당 앞에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 현판이 걸려 있다. 쌍계사의 만허 스님으로부터 손수 만든 차를 선물 받고 그 답례로 추사 김정희가 이 글씨를 써 주었다고 한다.

 

 

쌍계사 금당을 오른다. 금당은 산사에서 비켜선 외딴 공간이다. 범종루 옆 계곡을 건너 높다란 층계를 오르면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작은 산문이 나타난다. 그 푯말 너머 깊숙한 곳에 금당은 자리하고 있다. 관광객들도 찾지 않는 이곳은 안거 중인 스님들만 고요를 넘나들 뿐이다.

 

산문을 여니 육중한 청학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한 층을 오르면 제법 너른 마당 끝으로 좌우에 봉래당, 영주당을 품고 있는 팔상전이 다소곳하다. 다시 가파른 층계를 올라서니 맑고 훤한 금당이 선연하고 선방인 동방장과 서방장이 좌우로 뻗어 있다. 이 금당에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 머리뼈)이 묻혀 있다.

 

 ▶ 금당의 탑에는 육조 혜능의 머리뼈가 묻혀 있다고 한다.

 

육조 혜능의 두개골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을까. 육조 혜능은 또 누구인가. 옛날 붓다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알 수 없어 수런거렸는데 다만 가섭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염화미소의 이심전심이었다. 미소로 붓다의 법을 이은 가섭은 선의 시조가 됐고 28조였던 달마가 인도의 마지막 조사였다. 달마는 6세기 초에 중국에 와서 중국 선종 1조가 됐다. 중국 선종은 달마를 초조로 해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을 거쳐 6조 혜능에 이른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붓다가 가섭에게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으로 전한 것처럼 달마도 9년 동안의 벽관을 통해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장벽과 같이하여 문자나 교리에 이끌리지 않았다. 이가 곧 ‘선은 문자에 있지 않아서(불립문자, 不立文字), 교설을 떠나 따로 전하니(교외별전, 敎外別傳), 인간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직지인심, 直指人心) 그 성품을 보고 깨달음을 이룬다(견성성불, 見性成佛)’이다. 선은 문자를 떠나 한 송이 꽃과 한 번의 미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육조 혜능

중국 선의 육조이자 남종선의 시조인 혜능의 정상을 이곳에 모신 이는 신라의 삼법 스님과 대비 스님이었다. 의상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삼법, 대비 두 스님은 한겨울 눈 속에서 칡꽃이 핀다는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를 찾아 나선다. 현재 <쌍계사기>는 전하지 않으나 일본의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이 쓴 <조선선교사>에는 삼법 스님이 육조 혜능의 정상을 쌍계사에 봉안한 내력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지리산 쌍계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삼법이 중국 육조 혜능의 도가 훌륭함을 듣고 그에게 배우기를 원했으나 713년 혜능이 입적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를 애통히 여기던 중 육조의 어록인 <육조단경>을 읽고 발심하여 김유신의 부인인 법정니에게 이십천금(二十千金)을 빌려 당나라에 들어가 홍주의 개원사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대비 스님을 만나 이 절에 사는 장정만에세 이십천금을 주고 육조의 정상을 구해 723년에 법정니가 있던 경주의 영묘사로 왔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육조 혜능)이 나타나 강주(지금의 진주, 화개는 당시 강주에 속했다)의 지리산 아래 눈 속 칡꽃이 만발한 곳에 신라 만대의 복전(福田)이 있다고 게송으로 일렀다. 이에 삼법 스님은 대비 스님과 함께 지리산을 샅샅이 뒤져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육조의 정상을 깊이 봉안하고 한 채의 절을 그 위에 세웠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금당 문을 살짝 열었다. ‘찌이익~’ 문소리가 허공을 날카롭게 가른다. 놀랍게도 법당 안에는 불상 대신 칠층석탑이 있었다. 절 마당에 있어야 마땅한 석탑이 법당 안에 들어서 있다니…. 저 탑 아래 혜능의 정상이 묻혀 있다고 하니 더욱 놀랍고 놀라운 일이다.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 금당 앞을 거닐다 스님들만 다닌다는 포행 길로 빠졌다. 동백이 숲을 이루어 낮인데도 한밤중인양 어둑어둑하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붉은 꽃 한 송이도 피지 않은 걸로 보아 봄은 여태 산 아래서 머뭇거리고 있을 것이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사천왕수

국사암 가는 길은 짧지만 아름답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길은 아니지만 무심코 마음 한 자락 툭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심의 길이다. 바스라진 낙엽,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오랜 돌무더기 서낭당, 장하게 뻗은 소나무들, 오솔길은 보일 듯 말 듯 숨긴 듯 드러난 듯 구불구불 암자까지 이어진다.

 

▶ 사천왕수

 

암자 산문 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진감선사 혜소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는 느티나무다. 가지가 동서남북 네 갈래로 뻗어 있어 큰 절의 사천왕처럼 불법을 수호하여 사천왕수(四天王樹)라고 불린다. 나무 둘레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다.

 

▶ 사천왕수(가을)

 

불교에서 나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돌아가신 붓다. 그 길에서 가장 중요한 때에 늘 나무가 등장했다. 붓다가 탄생할 때에 등장한 무우수, 농경제에 갔을 때의 염부수, 깨달음에 이를 때의 보리수, 열반의 나무 사라수 등 네 가지 나무가 그것이다. 붓다의 생애는 길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큰 변화는 나무 밑에서 이루어졌다.

 

                                 ▶ 사천왕수

 

이 중 염부수는 붓다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나무이다. 붓다가 태자였을 때였다. 가래로 파헤친 흙속에서 벌레가 꿈틀거리자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벌레를 쪼아 먹었다. 이를 본 태자는 산 것끼리 서로 잡아먹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는 현실의 참혹함이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태자는 숲에 들어가 나무 아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때 태자가 앉은 나무에는 그늘이 움직이지 않고 태자의 몸 위에 언제까지고 서늘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고 한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도 유명하다. 보리수는 원래 아슈밧타 또는 핍발라라고 불리던 나무의 일종인데, 붓다가 그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인연으로 보리수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보나무라고도 한다.

 

나무 아래서의 명상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인도 종교 수행의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인도에서는 신성한 나무를 숭배했고, 특히 선정을 닦는 사람들이 그 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예가 많았다. 나무 아래서 명상을 한다는 것은 비와 이슬을 막고 뜨거운 햇빛을 가리어 배후가 안정될 뿐 아니라 나무에 신이 깃들어 수행자의 몸을 지켜준다는 종교적인 의미도 있다.

 

▶ 다섯 개의 현판이 있는 국사암

 

보시

탑봉을 올랐다. 이곳 고대에는 승탑이 하나 있다. 진감선사 혜소의 승탑으로 보기도 한다. 불일폭포를 내려오다 국사암 갈림길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 산모롱이 길가에서 곧장 위로 치닫는 비탈길을 오르면 너른 터가 나타난다. 장한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승탑의 숲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어 깊은 묵상에 빠져들게 한다. 승탑을 지나 인적 없는 오솔길을 한참이나 따라갔다. 예부터 이곳은 화개 10경 중의 하나로 ‘따로 마련된 선경’이라 했다.

 

                                 ▶ 고대의 승탑

 

나뭇가지 사이로 암자와 화개동 일대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진감선사가 나무오리를 날려 절터를 정한 곳도 아마 이곳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진감선사는 화개에 왔을 때 나무오리를 만들어 날려 세 곳의 절터를 잡았다. 첫 번째가 지금의 목압사 터이고, 두 번째가 국사암, 세 번째가 쌍계사 금당자리였다. 

 

 

법당 옆을 돌아 산신각으로 향하던 중, 펑펑 솟는 샘물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겨울임에도 얼지 않은 샘도 신기했지만 바가지에 물을 담는 순간 돌확 모서리의 무언가에 눈길이 절로 쏠렸다. 귤과 과자 들이 그릇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릇째 내놓은 걸로 봐선 누구라도 부담 없이 먹고 가라는 것이다.

 

 

 

이곳을 오가는 길손들, 특히 산을 막 내려온 등산객들의 허기를 달래기에는 이만한 보시가 없겠다. 육바라밀(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열반으로 이르기 위한 수행법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등 여섯 가지 수행 덕목) 중 제일 앞에 보시를 두었으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절로 깨닫게 한다.

 

 

 

 지리산의 별천지, 국사암

 

진감선사 혜소(774~850)는 통일신라시대의 선승이다. 804년에 당나라에 유학해서 27년 만인 830년에 귀국하여 쌍계사(옥천사)를 중창하고 남종선과 불교음악인 범패와 차 문화를 널리 전했다. 국사암도 진감선사가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암자의 이름은 보월암이었다. 진감선사 혜소가 여러 차례 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자 민애왕이 진감국사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그가 머물던 암자를 ‘국사암(國師庵)’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몇 년을 이곳에 주석하자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벼와 삼처럼 줄을 지어 찾아와 송곳 꽂을 자리도 없자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짓고 옥천사라 했다. 이후 경남 고성에 옥천사가 있다 하여 쌍계사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다. 쌍계사 경내에는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있다. 이 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국사암에는 ㄷ자 형 인법당(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승려가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집)이 인상적이다. 인법당은 ㄷ 자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한 건물에 무려 다섯 개의 현판이 달려 있다. 국사암(國師庵)·명부전(冥府殿)·칠성각(七星閣)·옹호문(擁護門)·염화실(拈花室) 등이다. 한 건물에 여러 전각의 현판들이 있는 걸로 보아 예전 규모가 있었을 때에는 각기 독립된 건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예전 지리산은 사찰과 암자가 빽빽이 들어선 불국토였다. 그중 화개 일대에 가장 많은 절과 암자가 있었다. 1472년에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은 지리산에 4백여 개의 절이 있다고 했을 정도였고, 임진왜란 전에는 화개 일대에 절과 암자가 100여 개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632년 <진양지>의 기록에만 해도 50여 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쌍계사와 국사암, 불일암, 칠불암, 원통암, 도원암만 남아 있다.

 

1714년 송암산인의 <지리산 국사암기>에는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는 국사암, 다소곳이 들어 앉아 별천지’라고 했다. 1879년 국사암에 이른 송병선은 <두류산기>에서 ‘비고도 밝게 빛나고, 깊고도 먼 정취가 인간세상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도의 봄, 이 한 권의 책과 함께!(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