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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절로 도가 트인다는 수행처로 그만인 문수암

 

 

 

 

 

 

수행처로 그만인 암자, 절로 도가 트입니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④] 칠암자 순례길, 문수암

 

상무주암에서 문수암 가는 길은 평탄하다. 내면에 집중해서 걷을 수 있는 길. 그러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오솔길. 얼마간 걸으니 바위 벼랑 아래로 맑은 샘이 보인다. 여기서 다리쉼을 해도 좋겠지만 문수암이 지척이라 그냥 스쳐간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편 언덕에서 한줄기 빛이 어둑한 숲속을 환하게 비춘다. 마치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듯. 순간 사방이 환해지더니 앞이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났다. 언덕처럼 불쑥 솟은 평평한 땅을 둘러싼 나무 몇 그루, 그 사이로 아스라이 펼쳐진 장대한 능선 물결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이야!’

 

 

감탄도 잠시,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이번에는 벼랑 끝에 매달린 집 한 채가 아득하다. 초록색 지붕에 갈색 벽을 두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퇴락한 건물 한 채. 그 뒤로 다시 집 한 채가 암벽에 기대어 공중에 매달려 있다. 앞으로는 일망무제. 비록 천왕봉은 보이지 않고 중봉만 보이지만 이곳의 풍경은 선경이 따로 없다. 절로 도가 트일 만한 땅이다. 암자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산자락들이 겹겹 펼쳐지고, 그 아래로 사바세계가 정감 있게 골짜기마다 깃들어 있다. 거대한 바위봉우리 아래, 문수암과의 첫 대면은 이렇듯 드라마틱했다.

 

 

암자에서 쉬고 있는 부부로 보이는 산객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인기척을 느낀 스님이 손바닥만 한 암자마당 끝에 서서 이쪽 언덕을 지그시 올려다본다. 금낭화 붉은 포실한 오솔길을 따라 암자로 내려갔다. 암자에 이르자 벼랑 끝 해우소는 산자락에 깊이 싸여 있고 선방은 구름 위에 걸려 있다.

 

 

산객 둘이 사라지자 암자는 이내 적막에 휩싸인다. 돌층계를 오른다. 바위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동굴을 울린다. 천인굴에서 솟는 물이다. 천인굴은 예전 임진왜란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굴 안은 천 명이 몸을 숨긴 곳이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지만 수십 명은 거뜬히 들어앉을 정도로 널찍하다.

 

 

스님은 툇마루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엄나무란다. 그 손길이 정성스럽다. 나물을 매만지는 산승은 침묵을 지키고, 나그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이따금 새 소리가 적막을 깰 뿐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산중 암자엔 정적만 가득했다. 나물을 다듬는 것은 스님의 일상, 이것 또한 수행의 방편일까.

 

 

한참 후에 스님이 침묵을 깼다.

“몇 해 전 이곳에 어느 신문사에서 기자가 왔다갔지요. 나중에 우연히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세상에 그 기자라는 양반이 나를 도인으로 만들었어요. 내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 이렇게 앉아 나물이나 다듬다가 배고프면 밥 먹고 사는 게 전부인데, 도인이라니….”

 

 

평상심이 곧 도이다

문득 마조 도일(709~788) 선사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조 선사는 당나라 말의 유명한 선승이다. 육조 혜능의 손제자로 중국의 전통적인 조사선을 확립한 인물이다.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마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나고 죽는 마음을 일으켜 꾸며대고 취향을 갖는 것은 모두 오염이다. 곧 바로 말하면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 평상심이란 꾸밈도 없고, 옳음과 그름도 없고, 취함과 버림도 없고, 연속과 단절도 없고, 천함과 성스러움도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행위가 다 도이다.“ - <경덕전등록>

 

 

일상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조사선의 선법이 잘 드러난 법문이다. 걸을 때는 걷기만 하고,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누울 때는 눕기만 하는 게 ‘평상심’이고 그것이 곧 ‘도’라는 것이다. 얼핏 지극히 쉬운 당연한 말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걸을 때는 걷기만 하고,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누울 때는 눕기만 하고 있을까. 걸을 때 온갖 것에 눈길을 빼앗기고, 밥 먹을 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잠잘 때 온갖 걱정에 뒤척이는 게 우리의 모습 아닌가. 온갖 생각을 하고, 그 생각들이 다시 망상이 되어 떠도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제대로 먹는 것, 제대로 눕는 것, 제대로 자는 것, 그래서 몸이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도의 시작이 아닐까. 마조 선사는 이러한 일상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고, 그 근원을 달마의 ‘일심(一心)’에 두었다. “너희들 각자의 마음이 부처임을 확신하라. 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신의 성품을 오염시키지 않는 ‘본래의 마음’, 번뇌와 집착이 없는 평상무사(平常無事)한 마음이 곧 평상심이다.

 

 

 

임제원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킨 임제 의현(?~867)도 “불법에는 인위적인 꾸밈이 없다. 오직 애써 꾸며대지 않는 평상시의 생활뿐이다. 변소에 가고, 옷 입고, 밥 먹고,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자는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이르는 곳마다 주체적이면 머무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隨處作主 立處皆眞).” - <임제록>

 

 

‘어디에 가 있건 주인이 되라. 그러면 참되리라’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일상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몸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여기’를 떠나 안 가는 곳이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이것’, 이게 전부다. 그 외는 모두 오염이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통찰하여 발견하는 것, 이것이 모든 것 속에서 궁극의 차원을 만나는 길이다. 결국 당신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밖에서 부처를 찾는 이에게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지만, 여기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부처는 없다’고까지 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도 결국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 결국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다. 부처와 도는 저기에, 저 너머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 오염되지 않은 이곳에 있다. 그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이 사바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눈팔지 말고 그 길로 쭉 가시오

“이제 여기를 떠나야 될 지도 모르겠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요. 작년에는 모 방송국에서 칠암자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인터뷰를 요청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촬영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다시 올라왔지요.”

 

 

스님의 이름을 여쭙자 ‘그거 알아서 뭐 하게’ 하면서도 인터넷에 이미 많이 올라와 있다고 하신다. 사실 여행자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직접 뵙기는 처음이라 여쭈었던 것이다. 나중에 헤어질 즈음 스님은 자신이 도봉 스님이라고 했다.

 

 

문수암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의 문수암은 1960년대에 지었다. 전하는 얘기로는 선학원 소속의 암자로 1965년 혜암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비구니 스님이 20년 정도 머물다가 도봉 스님이 30년 전부터 머물고 있다. 도봉 스님은 1982년부터 도솔암에 있다가 1984년쯤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이 오지암자에 전기가 들어온 때는 1991년이었다. 산 아래 도마 마을에서 견성골 골짜기를 거쳐 삼불사, 상무주암까지 전기가 들어왔다.

 

 

봄여름가을에는 암자 생활에 문제가 없는데, 겨울이 문제였다. 높은 지대다 보니 겨울이면 암자 옆 샘물이 꽁꽁 얼어 붙어버린다.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 넘어 상무주암 가는 길에 있는 샘까지 가야 한다. 암자 주위에서 유일하게 얼지 않아 거기에서 물을 길어온다.

 

 

그래도 이곳은 수행처로 그만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수행했던 비구니 스님들이 지금은 이곳이 그리워 암자를 떠난 것을 여간 아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도봉 스님과 영원사의 법철 스님, 도솔암의 정견 스님은 혜암 스님에게서 배웠던 사제 간이었다. 문수암이라는 현판 글씨를 보니 앞서 본 상무주암의 현판을 쏙 빼닮았다. 경봉 스님의 글씨란다. 도봉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1892~1982) 스님을 모셨다고 했다.

 

 

스님이 차 한 잔을 건넨다. 인터넷에선 이곳 문수암에 오면 스님이 오미자차를 준다는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참, 이제 뭐 주기도 겁이 나요. 그냥 마시고 가면 될 것을 굳이 올린답니다. 아무나 붙들고 그냥 차를 건넬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곳까지 와서 인연이 닿으니 차 한 잔 드리는 거지요. 이건 네 가지 약재를 넣은 것이니 한 번 드셔보시오.”

 

그 맛이 오묘했다. 툇마루에 앉아 탁 트인 전망을 보고 마시는 차 한 잔은 마치 신선의 묘약을 먹는 듯 신비롭기까지 했다.

 

 

“처사님, 보아하니 글 쓰시는 분 같은데 부탁이요. 나에 대해서는 쓰지 마시오. 굳이 쓰려거든 그냥 이곳 풍경이 참 좋더라고만 적어 주시오.”

 

칠순을 넘기고도 몇 해가 지났는데도 스님의 눈빛은 맑다.

 

 

지팡이를 들어 길을 나서니 스님이 마당까지 나와 배웅을 하신다. 돌층계를 내려와 삼불사 가는 길을 가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길은 두 갈래. 아래로 곧장 가면 견성골, 전신주를 따라가면 삼불사다. 높은 축대 끝에 서서 스님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한눈팔지 말고 그 길로 쭉 가시오.”

 

 

문수암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문수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암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경남 고성의 문수암, 전북 고창의 문수사 등을 비롯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게다가 비록 문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오대산(상원사)을 비롯하여 춘천의 청평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수도량이다. 지리산에만 해도 이곳 삼정산의 문수암, 함양의 문수사, 노고단 아래의 문수대, 구례 문수골의 문수사 등이 있다.

 

문수사리(文殊師利)는 산스크리트어 mañjuśrī의 음사로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유수(濡首)라 번역되어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뜻으로 반야지혜의 상징한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비로자나불의 양쪽 협시보살이 되어 삼존불의 일원을 이루고 있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서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행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었다.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널리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 문수신앙을 최초로 들어온 이는 자장이다. 문수보살의 상주처는 신라의 고승 자장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드렸던 중국 산서성 청량산(오대산)으로, 1만 명의 보살과 함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의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믿고 신봉한다. 지금도 그곳의 상원사는 문수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예불하며 수행하는 도량이다.

 

문수보살은 동자승으로도 나타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노인이나 동물로도 나타나 문수보살과 인연이 깊은 사람만이 그를 알아본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대산이 예로부터 문수보살의 처소로 알려져, 세조의 병을 고쳤다는 전설까지 생겨났고, 신라 때의 고승인 원효와 의상이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