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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지리산의 하늘정원, 서암정사

 

 

 

 

 

지리산 원혼을 달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지은 암자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⑧] 지리산의 하늘정원, 서암정사

 

서산에 노을이 진다. 붉은 노을빛에 마음속 번뇌를 한 움큼 던져 본다. 해가 떨어지자 번뇌도 사라진다.

 

 

푸른 눈의 스님이 종을 친다. 종소리는 지리산 북쪽 골짜기를 우렁차게 울린다. 여차하면 칠선계곡을 타고 올라 천왕봉까지 이를 기세다. 모두 서른세 번. 어스름의 고요를 뚫고 멀리 울려 퍼진다. 중생들의 무명을 깨우고 혼을 깨우는 소리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으로 해체된다고 했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음(中陰)이라는 곳을 혼이 떠도는데 불교에서는 그 기간이 49일이라고 봤다. 해서 49제를 지냈다. 혼이 중음을 떠돌면서 유일하게 듣는 지상의 소리가 종소리이다. 종소리를 듣고 망자는 혼미한 정신을 차려 지옥, 축생, 아귀의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좋은 세계로 환생할 수 있다.

 

절에서 불사를 할 때도 종 만드는 불사가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한다. 종은 아침저녁으로 두 번 치는데 아침에는 스물여덟 번, 저녁에는 서른세 번 친다. 28은 불교에서 삼계(三界)인 욕계의 6천, 색계의 18천, 무색계의 4천을 합한 28천의 중생들이 들으라는 것이고, 33은 욕계 6천의 제2 도리천인 33천의 천상세계에 각각 들리도록 종을 치는 것이다.

 

 

해가 지자 종을 치던 스님은 그림자로 남았다. 육신의 모든 껍데기를 훌훌 벗어버린 참그림자. 그 모습이 하도 엄숙하여 심장이 요동친다. 호주에서 온 벽안의 스님은 묵언수행 중,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지리산의 하늘 정원

의탄리에서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 근래에 벽송사보다 더 알려진 서암정사로 가는 길이다. 여행자는 예전 이곳을 ‘지리산의 하늘정원’이라며 그 아름다움을 여러 매체에 소개한 적이 있다. 지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연암벽에 새겨진 독특한 불상 조각과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쁜 정원을 가진 암자는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근 사찰에서 불사(佛事)를 하면 형식과 규모에 급급한 나머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공사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일까. 옛것에 대한 강한 믿음은 요즈음 조성한 어떤 불사에도 마음 한 자락 내어줄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곳의 불상 조각을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다. 이 불상들이 먼 훗날 훌륭한 유산이 될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조차 할 정도로 조각은 아름다웠다. 층계를 올라 용왕당을 지나 산신각이 있는 비로전에 이르면 그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이 놀라움은 벽면 전체가 불상으로 가득한 석굴법당에 들어서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  비로전 마애불

 

그러나 서암정사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예전의 그 소박했던 풍경 대신 화려함이 암자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았던 옛 암자와는 달리 지금의 암자는 화려했다. 사치스럽지는 않으나 번듯한 풍경이 낯설었다. 무엇 때문일까. 가만 살펴보니 종이 매달려 있던 소박한 옛 법당 미타굴 대신 새로 지어진 눈부신 대웅전 때문이었다. 지리산 속에 푹 안긴 예전의 소담스런 풍경이 아니라 지리산의 기를 다 모은 채 주위를 호령하는 위압적인 자리매김 때문이었다.

 

 

                          옛 법당 미타굴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정된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지리라. 논밭이 있던 벽송사도 말끔히 정비되었고 돌층계를 올라 고목 사이를 지나갔던 서암정사의 옛길도 달라졌다. 오직 그대로인 건 저 고목인데, 한구석에 널브러진 채 팽개쳐 있다. 쓰임을 다했는지, 그냥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쓸쓸한 기운이 주위를 맴돈다. 벼랑 끝 소나무 한 그루가 지리산 다랑논을 배경으로 매달려 있던 풍경도 사라졌다. 예전의 그 소박했던 굴뚝도 사라지고 금빛으로 광채를 내는 법당이 푸른 잔디밭 위로 우뚝 솟아 있다. 다만, 하늘정원이라는 이름처럼 예뻤던 연못은 그대로였다.

 

 

지리산 비극의 현장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축소시켜 묘사한 석굴법당. 극락이 서쪽에 있으니 불상은 대개 동쪽을 보고 있으나 이곳에선 자연암벽에 불상을 새겨야 했기 때문인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석굴법당은 암자에서 제일 서쪽에 있다. 서암정사의 동쪽은 수십 년 전 지리산 원혼들이 스러져간 골짜기이다.

 

 

왜 이곳에 석굴법당을 조성하고 자연암벽에 불상을 조각했을까. 한라산의 탐라계곡, 설악산의 천불동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칠선계곡엔 우리가 애써 잊고 있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지배와 저항, 유람과 은둔의 역사의 양면에서 지리산은 은둔과 반항, 저항의 역사를 한 축으로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 한국전쟁 전후의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인근에 있는 벽송사가 빨치산의 야전병원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지리산 북부에 있는 칠선계곡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빨치산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잔여세력이 산악지대로 숨어들면서 지리산은 ‘빨치산과 토벌대’라는 역사의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그해 11월 남로당 연락부장이며 일제 때 일경의 검거를 피해 지리산에 은신한 경험이 있는 이현상이 자진해서 지리산에 들어가면서 여순사건의 잔여세력과 부근의 야산대 등으로 500명 규모의 ‘지리산 유격대’ 일명 빨치산이 조직됐다.

 

 

지리산 유격대는 49년 7월부터 그 공식 명칭이 제2병단이 되었다. 병단장은 6연대장을 겸한 이현상이었고, 동부 지리산은 제5연대장 이영회가 맡았다. 바로 이곳 벽송사 일대는 이영회 부대로 일컬어지는 경남도당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경남도당은 칠선계곡과 벽송사 골짜기로 이어지는 지리산 하봉 근처에 근거지를 두었다. 초기에는 인민군 패잔병 집단인 302, 102부대 등이 핵심 무력이었는데 후에 ‘불꽃사단’이라는 유격대를 편성했다. 사단장은 경남도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이던 김의장, 참모장은 노영호였다.

 

 

그러다 1951년 11월 28일, 경남유격대 사령관인 이영회가 62명의 대원과 함께 천왕봉 동북방의 상봉골이라는 골짜기에서 전경 제5연대 수색대와 교전하던 중 이영회는 죽고 나머지 부대원들도 거의 전멸하게 된다. 경남유격대를 상징하던 이영회의 죽음과 함께 지리산 주변, 아니 남한 전역의 빨치산 편제부대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실 이곳뿐만 아니라 영원사골, 백무동골, 칠선골, 벽송사골, 조개골, 대원사골, 중산리골, 거림골, 삼점골 등 지리산 일대가 모두 빨치산의 활동지였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그들 빨치산의 운명은 5여 년 만에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비극이 빨치산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 반쪽인 경찰과 국군의 참담함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산에서 5년간 죽어간 이만 해도 수만 명이었다. 당시에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적으로, 빨치산과 토벌대로 구분되었지만 결국 하나의 민족일 수밖에 없는… ‘불이(不二)’였다. 외팔이 대장으로 군경 토벌대를 놀라게 했던 유명한 빨치산 최태환은 이 비극이 결국 ‘불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최태환은 낙동강 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인민군과 백마고지전투에서 쓰러진 국군이 결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듯이, 그들에게 있어서 조국은 하나였다고 말했다.

 

 2007년 어느 가을날의 서암정사

 

원혼을 달래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60년대, 한 스님이 벽송사에 들어오게 된다. 청산에 파묻힐 요량으로 심산유곡의 수행처를 찾아 발길 닿는 대로 온 원응 스님이다. 벽송사에 들어온 원응 스님은 1970년대 초 어느 봄날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그곳이 지금의 서암정사이다. 원응 스님은 이곳에서 한국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무수한 원혼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 상처를 달래기 위해 1989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불사를 했다.

 

오늘도 서암정사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젊은 커플들이 많다. 예쁜 연못에 탄성을 지르고, 자연암벽의 불상 조각에 감탄하고, 굴법당에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빌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온갖 추억에 젖는다. 그러나 까마득한 전설이 아닌 불과 반세기 전에 피로 얼룩졌던 비극이 이곳 골짜기에서 벌어졌다는 걸 아는 청춘들은 없는 듯하다. 그들과 같은 또래의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이 산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을….

 

 

“옴(AUM)~ 옴(AUM)~ 옴(AUM)~”[각주:1]

무상한 삶의 진리를 일깨우는 종소리가 어둑어둑한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지리산 골골마다 서려 있는 비극의 혼을 달래는 것이리라.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것이리라. 원한이랑 이곳에 묻어두고 영혼이나마 훨훨 극락에 올라 자유로우소서!

 

수많은 강물 만 갈래 시냇물, 바다에 가니 한 물맛이로다. 百千江河萬溪流 同歸大海一味水

삼라만상 온갖 모습이여, 고향에 돌아오니 본래 한 뿌리이니. 森羅萬象各別色 還鄕元來同根身

                                                                           - 서암정사 입구 돌기둥에 적힌 시

 

▲  원응 큰스님

 

서암정사

 

서암정사는 사천왕문을 들어서서 배송대를 지나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은 2012년도에 완공했고 지하에는 원응 스님이 1985년부터 금니사경을 해온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금니사경전시관이 있다. 범종각이 있는 연못 일대는 이곳이 ‘지리산의 하늘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공중에 뜬 연못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범종각에서 바라보는, 망망하게 아스라이 펼쳐진 지리산 골짜기로 넘어가는 일몰은 곧 화엄의 세계다.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석굴법당이다. 원응 스님이 한국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무수한 원혼들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1989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불사를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석굴법당 안에는 아미타불을 위시한 보살상들이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로 정교하게 장엄되어 있다. 암자의 가장 높은 곳에는 비로전이 있다.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선재동자 등의 불보살을 모신 비로전은 극락정토와 화엄세계가 서로 조화로운 화엄정토의 도량을 구현했다.

 

이처럼 큰 불사를 조성한 데는 석공들의 노고가 많았다. 석굴법당의 아미타 본존불은 이승재 석공이 시작했고, 본존불 외에 석굴법당의 여러 부조는 홍덕회 석공이 조각했으며 맹갑옥 석공이 조역을 했다. 주산신과 독수성은 맹갑옥 석공이 바깥 돌을 치고 홍석희 석공이 세 조각(細彫刻)으로 마무리했다. 사천왕상과 비로전은 이종원 석공이 중심이 되어 완성했고 배송대는 이금원 석공이, 용왕단은 이인호 석공이 각각 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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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부터 인도인들은 종소리를 옴(AUM)이란 의성어로 인식해 왔다. 옴(A-U-M)이란 소리 속에는 우주의 창조와 보존, 파괴의 진리가 동시에 담겨져 있다고 봤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