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다음에 오면 이것 꼭 보세요!"
경전선 순천행... 무진기행은 시작됐다
순천역에 도착했다. 전남 동부지역의 중심지답게 순천역은 붐볐다. 이곳에서 나의 무진기행은 시작됐다.
전라도 음식이 다 맛있다는 건 편견일 뿐이고...
역을 빠져나오니 도심이다. 우선 밥을 먹기로 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보니 H식당이 제법 알려져 있다. 도로를 건너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나른하고 지루한 햇살이 내리쬈다. 무기력한 몸이 순간 비틀거렸다. 행인에게 위치를 물어 H식당을 찾았다. 식당 안은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대개 젊은 축이었고 연인들이었다. 아마 인터넷에 올려 진 소문을 보고 온 모양이다.
가짓수는 많으나 볼품없었던 7000원 백반정식
결론을 말하자면 식사는 볼품없었다. 아니 최악이었다. 7000원하는 백반정식, 가짓수는 나름 구색을 갖췄지만 시쳇말로 ‘게미’가 없고 간도 맞지 않다. 짜고 맵고... 아내는 혀를 끌끌 찬다.
수백 번 전라도를 온 우리에겐 애당초 전라도 음식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 같은 건 없었다. 근데 이건 좀 심하다 싶다. 그것도 블로그, 기사, 책까지 맛집으로 소개되고 있다니... 전라도 음식은 무조건 맛있다는 ‘열혈인’들을 종종 본다. 그들의 공통점은 반대급부로 경상도 음식에 대해 혹평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열혈인’들은 단지 몇몇 식당에서 먹어본 후 그 맛을 ‘일반화’ 시키며, 예전부터 내려온 ‘전라도 음식 우월주의’를 확신하며 신봉자가 되고 전파자가 된다. 여행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겐 아주 단순한 말만 강조할 뿐이다. 전라도가 대체로 음식 맛이 좋은 건 사실이나, 전라도든 경상도든 음식을 잘하는 집이 맛있는 집이라고.... 남의 혀를 믿지 말고 자신의 혀를 부지런히 놀려야지 맛이 제대로 보인다. 그 다음은 말초적인 혀를 버려야겠지만....
순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67번 버스를 타고 순천만으로 가다
버스를 타고 무진의 방죽을 가다
쓰린 속을 달래며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승강장은 노인들의 차지다. 순천만 가는 버스가 이곳에 서는지를 묻자 모두 사전 연습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고개를 끄덕인다. 배낭을 멘 일행의 행색을 살피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조금 있으니 배낭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순천만을 그렇게 자주 왔어도 기차 타고 버스로 가기는 처음인 걸로 기억된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형도가 말한 소금의 도시 순천과 김승옥이 말한 안개의 도시 무진에 대한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버스가 왔다. ‘버스는 무진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와지붕들도 양철지붕들도 초가지붕들도 유월 하순의 강렬한 햇볕을 받고 모두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철공소에서 들리는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버스로 달려들었다가 물러났다. 어디선지 분뇨 냄새가 새어들었고 병원 앞을 지날 때에는 크레졸 냄새가 났고 어느 상점의 스피커에서는 느려빠진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처마 밑의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빨가벗고 기우뚱거리며 그늘 속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읍의 포장된 광장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햇볕만이 눈부시게 그 광장 위에서 끓고 있었고 그 눈부신 햇살 속에서, 정적 속에서 개 두 마리가 혀를 빼물고 교미를 하고 있었다.’
순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67번 버스를 타고 순천만으로 가다
버스 안은 두어 군데 빼고는 빈자리가 없었다. 아내는 운 좋게도 자리 하나를 잡았다. 다음 버스정류장에서 할머니 한 분이 탔다. 좌우를 살펴보니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아내에게 눈짓을 했다. 이것저것 물건을 야무지게 묶은 보따리를 안은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하더니 변죽 좋게 말을 늘어놓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마지막 이 말만 아니었다면 목적지까지 할머니는 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이는 하나 뿐이요? 둘은 낳아야지.”
아내는 마지못해 웃었고 그 뒤로 할머니는 계속 졸아야만 했다.
버스는 사나웠다. 손잡이를 꽉 쥔 손이 아파왔다. 앞으로 뒤로 흔들리지 않으면 차는 달리지 않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아저씨 그 좀 천천히 갑시다.’ 이 말을 하려는 순간 버스가 멈췄다. 비틀거리던 몸이 바로 섰다.
순천만 자연생태관과 천문대
내리쬐는 햇볕, 도로를 건너는 배낭들, 차로 빼곡한 주차장, 입장료를 끊느라 길게 늘어선 줄... 너무나 다른 풍경이었다. 그래, 십년이야. 그럴 수도 있지. 음습한 갈대숲도, 길고 몽롱했던 방죽도 보이지 않았다. 움푹 팬 흙길도, 고막을 찢는 듯한 적막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깨끗한 공원이었다. 나른한 무력감이 등줄기에서 머리로 올라왔다.
4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갈대열차를 타면 순천문학관에 들른다.
무진교를 건너 용산전망대까지
땀이 비 오듯 했다. 시각은 2시 15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이었다. 갈대숲에서 1시간 만에 용산전망대를 다녀와야 했다. 3시 20분에 출발하는 생태체험선을 타야 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은 덥다는 핑계로 선착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멍하니 빈둥거리는 것도 오늘 같이 더운 날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홀로 땡볕에 나섰던 것이다.
갈대숲 탐방로
갈대숲 탐방로
아랫배가 아파왔다. 수술한 데가 문제가 생겼을까. 이번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급히 걸어서겠지, 잠시 쉬기로 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긴 방죽 안쪽 갈대숲에 집 한 채가 보였다. 예전 이곳을 찾을 때만 해도 청둥오리를 팔던 식당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겨울에 철새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탐방소로 쓰인단다.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웅덩이에 덜컹거리며 갈대숲을 찾던 그때가 아득한 시절로 추억된다. 지금의 반듯한 공원이 낯설기는 하지만 외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다행이다.
갈대숲 탐방로
갈대숲 탐방로
전망대까지 내쳐 걸었다. 구름이 끼어 있는 하늘 밑의 바다로 길게 초원이 뻗어 있었다. 바다를 향해 달리던 산과 뭍으로 몰아치던 바다가 합의를 본 듯, 둥근 원형의 탁자가 수없이 박혀 있었다. 바다도, 뭍도 아닌 갯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알몸인 채 서성거린다.
왜가리의 날갯짓
지금은 바다의 시간... 뭍이 힘겨루기에 밀린 모양이다. 뭍과 바다의 합의는 꽤 넓은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이 시각에는 바다가 점점 완충지대를 넘어선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되면 붉은 해도 떨어질 테고 세상은 어두워진다. 그러면 바다도 다시 제자리로 뒷걸음칠 것이다.
바다인지 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풍경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이곳을 지나다 경치에 반해 입을 벌리는 바람에 여의주를 떨어뜨려 이곳에 머물게 되어 용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작위의 냄새가 역력하다. 혼자 빙긋 웃다 용산을 내려왔다.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용산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풍경
아직 뛸 수는 없어 잰걸음으로 경보 수준으로 걸었다. 휙휙. 바람소리가 귀를 때린다. 전화가 왔다. 10분이 남았다고 했다. 다리 이름이 무진교다. 아래를 보니 막 배가 떠나려 닻줄을 풀고 있었다. 아이가 손짓을 했다. 뛰었다.
갈대숲 탐방로
갈대숲 탐방로
‘왜가리’의 느린 날갯짓
긴 방죽길을 걷는 대신 오늘은 생태체험선을 택했다. 안개 낀 방죽을 걷는 대신 햇볕 쨍쨍한 바닷길로 들어섰다. 먼지 폴폴 날리는 땅 대신 묵직한 나무갑판 위에 섰다. 뿌옇고 몽롱한 안개 대신 푸른빛 감도는 하늘을 따랐다.
25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생태체험
다행인지 여느 관광지의 유람선에서처럼 귀를 쩡쩡 울리는 ‘뽕짝’하며, 유행가는 없었다. 순천만을 설명하는 해설사의 말만 조용조용 들려왔다. 그것도 확성기가 아니라 한사람에 하나씩 지급되는 귀에 꼽은 수신기로 말이다. 적어도 이곳에선 <무진기행>의 ‘어떤 개인 날’과 ‘목포의 눈물’ 사이에 얼마만큼 유사성이 있는지에 대해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
배가 물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해설사는 바빠졌고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볼에 감기는 바람이 좋았다. 오늘따라 새들이 느리게 난다고 해설사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카메라는 늘 힘들다. 무슨 무슨 새라고 설명을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왜가리’뿐이다. 그날 놈이 몇 번이나 여행자 앞 허공을 느린 날갯짓으로 왔다갔다 해서였다.
왜가리의 날갯짓
왜가리의 날갯짓
“다음에 오면 일몰을 꼭 보세요.”
기차시간이 다 됐다. 20분마다 운행되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불안하다. 버스가 금방 갔는지 곧 올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관광안내원으로 헛갈릴 정도로 열심히 떠드는 기사. 선암사는 2만원, 송광사는 3만원, 낙악읍성도 3만원, 뭐 이런 식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의 택시요금은 1킬로 당 1000원으로 계산하면 된다. 기사 양반의 넉살에 택시를 탔는데 막 모퉁이를 돌아오는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젠장!
순천만은 물이 빠지면 갯벌이 드러나 더욱 좋다
“다음에 오면 일몰을 꼭 보세요.”
이미 몇 차례 다녀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택시기사는 왜 순천만에 오면 일몰을 꼭 봐야 하는지 장황하게 설명할 태세였다. 하지만 싱겁게도 그의 기대를 나는 여지없이 무너뜨려버렸다. 그는 다른 이야기로 슬쩍 화제를 옮겼다.
“정원박람회 굉장할 겁니다.”
“아, 저기가 박람회 장소군요. 나무를 마구 뽑아서 심었다는....”
순간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을 가로챈 것을 뒤늦게 안,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실망한 빛이 역력했으나 마지막 안간힘으로 박람회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더 이상 그의 말에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나는 택시 안에서 내내 “예, 예.”만 반복했다.
길게 뻗은 둑을 따라 기사는 차를 몰았다. 저 긴 방죽길은 바다로 뻗어 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 같은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모든 소리마저 흡수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버리는 안개는 오늘 없었다. 다만, 쨍쨍한 오후의 마지막이 방죽길을 거스르며 창 너머로 달리고 있었다.
체험선에서 본 용산전망대
그러고 보니 시인 기형도도 잠시 순천을 찾았었다. 김승옥과 김현을 생각하며 시인은 무진으로 무작정 떠났다. 태어나 한 번도 사진조차 구경 못 한 도시 순천을, 그는 막막한 절망과 음습한 권태가 안개처럼 부두와 상점과 낡은 건물들을 감싸고 있을 도시로 상상한다. 이미 부산 가는 표를 산 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4시간(여행자도 그랬다.), 쓸쓸하고 부랑자의 그것처럼 음습한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그는 이 도시를 몸의 일부분처럼 느낀다.
순천만 자연생태관
오후 5시 5분, 경전선 부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무진을 떠나며 나는 적어도 심한 부끄러움은 느끼지 않았다. 가을에는 낙안읍성을 거쳐 선암사에서 굴목재를 넘어 송광사로 갈 작정이다.
순천만 천문대
☞ 순천만은 5.4㎢(160만평)의 빽빽한 갈대밭과 22.6㎢(690만평)의 광활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 갈대꽃이 피는 늦가을이나 철새가 날아드는 겨울에 찾으면 좋다. 순천만에서 발견되는 철새는 총 230여종으로 우리나라 전체 조류의 절반가량이 된다고 한다. 순천만은 2006년 람사르협약 등록,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순천만에 가면 갈대숲 탐방로(1.2km, 왕복 30~40분)를 지나 용산전망대(2.3km, 왕복 1시간 30분)에 올라 일몰을 보는 것이 좋다. 4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갈대열차를 타고 순천문학관에 들르거나, 25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생태체험선을 타고 다양한 철새를 만나는 것도 좋다. 공원 안에 있는 자연생태관과 천문대도 들를 만한 곳이다.
순천역에서 순천만으로 가는 시내버스(67번)는 오전 6부터 저녁 8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20여분. 순천역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쭉 가다보면 한국철도공사 전남본부 간판(주차장)이 커다랗게 보이고 바로 옆에 파출소가 있다. 파출소 건너편의 서울약국과 편의점(7일레븐) 앞 버스정류장에서 67번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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