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시간, 전설의 부여 내산면 은행나무
이번에는 작심하고 제일 먼저 무량사로 향했다. 사실 무량사는 부여에 속해 있으면서도 외지고 깊은 만수산 자락에 있어 부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인근 지역인 보령, 청양 등과 바로 붙어 있어 이들과 연계하여 여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부여에서 29번 국도를 따라가다 40번 국도로 갈아타자 길은 이내 좁아진다. 얼마쯤 가자 미암사 표지판이 나오고 길 오른편으로 은행나무를 가리키는 안내문이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핸들을 돌렸다. 오래된 나무를 원체 좋아해서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혼자 길을 떠났으니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굴다리를 지나니 앞으로 무논이 펼쳐진 산간마을이 나왔다. 좁고 긴 농로를 한참이나 들어가서야 마을이 나왔다. 마을 초입에는 제법 널찍한 주차장이 있었다. 은행나무는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거대했다.
마을길을 걸어 뒤편으로 가니 꽤 너른 터에 장대한 은행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은행나무가 차지한 면적만 해도 1,158㎡이고, 높이 30m, 둘레가 9m에 달했다. 가지가 사방으로 30m까지 뻗어 있어 그 위용이 더욱 대단하다.
은행나무는 황금색 잎이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어 예로부터 마을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이 은행나무도 정자나무이면서 당산나무이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초에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을 빈다고 한다.
이 나무는 백제 성왕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할 즈음에 당시의 좌평 맹씨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사실이라면 무려 1500여년이나 된 나무이다. 전염병이 돌 때에도 이 마을만은 화를 면했다 하여 영험한 나무로 여겨져 왔다. 은산에 있는 승각산 주지가 대들보로 쓰기 위해 나무의 가지를 베어가다가 재앙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양평 용문사․영동 영국사 등 사찰에 남아 있는 것이 있고, 영양 서석지․아산 맹씨 행단 등 오래된 고택에 있는 경우도 있다. 서울 성균관 대성전, 전주 향교를 비롯해 서원․향교 등 유교교육기관의 뜰에 은행나무가 유독 많이 심겨져 있다. 이는 행단과 관련이 있다.
이곳 은행나무 앞에도 행단杏壇이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행단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행단은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 앉아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와 관련이 있다.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의 묘 앞에 있는 행단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송나라 때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그의 조상의 묘를 증수할 때 강당 옛 터에 돌로 단을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이라 했다. 그 후로 행단은 공자의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원에 은행나무를 심어 공자의 사상을 추앙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을에 은행나무가 있다는 건 그만큼 유교적 전통이 강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 청나라 고증학자 고염무는 당초 행단은 은행나무가 아니었으며 공자의 후손인 공도보가 단을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이라 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행단의 나무는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이야 어떠했든 간에 그 후로 은행나무는 공자와 관련되어 있는 나무로 저간에 인식되어 있다.
녹간마을의 은행나무는 천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혼자 감탄을 하며 탑돌이 하듯 나무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아무도 없어 나무의 기운을 느끼기에는 좋았지만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나무의 크기를 사진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진에서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이다. 아쉬운 마음에 한동안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차 한 대가 서더니 아저씨 한 분이 은행나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저씨는 거짓말처럼 두 팔을 뻗더니 은행나무를 껴안았다. 순간 여행자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내산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20호로 지정되어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148-1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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