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뱃속 씨앗이 자란 거대한 나무, 창선 왕후박나무
신선의 섬. 예로부터 섬 어디를 가나 낭만과 서정적 풍경이 있는 남해섬을 이렇게 불렀다. 안평대군, 한호, 양사언과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자암 김구는 <화전별곡>에서 남해를 일점선도(신선의 섬)라 표현했다. 화전은 남해를 가리키던 옛 이름이다.
옛 사람들이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듯이 남해섬 해안선 팔백리를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이처럼 수려한 풍경은 섬 속의 섬 창선도로도 이어진다.
남해 본섬에서 지족해협의 다리를 건너면 남해 특유의 죽방렴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곧장 오른쪽으로 가면 길은 늑도, 초양도를 건너 삼천포(사천시)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대개 익숙한 이 길을 가지만 실은 다리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한적한 어촌마을과 잔잔한 바다풍경을 만나게 된다. 무릇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듯 여행도 달라진다. 그 풋풋한 길의 끝에 대벽리 단항마을이 있다.
단항이라는 마을이름은 지형과 관련이 있다. 마을 뒤의 연태산이 삼천포를 향하여 길게 누워 있는데 그 산의 모양새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산 아래 마을이 학의 머리에 있는 붉은 댕기 모양이라 하여 붉을 단丹자를 쓰고 그 마을의 위치가 학의 목 부분이라 하여 단목이라고 하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단항丹項이 되었다고 한다.
단항마을 표지석에서 바다로 걸어갔다. 넓은 바다를 가릴 정도로 무성한 잎을 단 엄청난 크기의 나무가 떡하니 서 있었다. 그 늠름한 나무의 자태에서 장수의 기개가 느껴질 정도다. 멀리서 눈짐작으로 가늠하던 나무의 크기는 가까이서 보면 까무러칠 정도로 거대하다. 나무 밑에 서면 눈도 카메라도 몇 번이나 파노라마로 이어 붙여야 나무를 보고 담을 수 있다.
딸아이에게 나무를 꼭 껴안으라고 했다. 나무의 크기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오랜 세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지켜준 나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우와, 진짜 크다. 나도 나무가 되고 싶어.” 왜냐고 물었더니 답은 간단했다. “오래 살 수 있잖아. 이 나무처럼 500살까지.” 요즈음 삶에 대한 집착이 유독 강해진 녀석이다.
이 나무는 왕후박나무다. 후박나무의 변종으로 잎이 더 넓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며 주로 울릉도와 제주도 등 따뜻한 섬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워서 정원수나 공원수 등으로 흔히 쓰이며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용으로도 심고 있다.
수령이 500살 정도인 이 나무는 높이가 9.5m, 밑동의 둘레는 11m나 된다. 가지는 밑에서 11개로 갈라져 있다. 가지의 둘레만 해도 1m가 넘는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약 500년 전 이 마을에 고기잡이를 하는 노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큰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의 뱃속에 씨앗이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씨를 뜰에 뿌렸더니 자라서 지금의 왕후박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매년 마을의 안녕과 왕성한 고기잡이를 위해 당제를 지내다고 한다. 오랜 세월 마을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은 나무는 천연기념물제29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이 이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고 전해진다. 이 왕후박나무는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단항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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