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장과 사람

소설 토지, 하동읍내시장 한복판 우물의 정체는?

 

 

 

 

소설 <토지>, 하동읍내시장 한복판 우물의 정체는?

 

2일과 7일에 열리는 하동읍내시장 오일장은 소설 <토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지금이라도 용이와 월선이가 장터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장은 처음인데도 외려 친숙하게 다가온다.

 

 

한다사 식당에서 재첩 한 사발 얻어먹고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프지 마라. 인자 아프모 안 된다.”

 

할머니 세 분이 길 가는 것도 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얼굴로 봐서는 누가 아픈지 모를 정도로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 애틋하다.

 

 

‘○○미곡’이라고 적힌 싸전에는 고무 대야에 곡물들이 그득하다. 맞은편 인도 끝에는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줄을 지어 밭에서 따온 고추며, 호박이며 깻잎 따위를 팔고 있다. 오일장인 일요일인데도 시장은 한산했다.

 

 

‘하동공설시장’이라고 적힌 다소 낡은 간판을 지나 시장 안으로 들어섰더니 제법 너른 공터가 나왔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공터는 마치 광장 같아서 시장의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게 길이 사방으로 나 있었다.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됐다.

 

 

 

처음엔 원두막 모양이라 그냥 쉼터 정도로 여겠는데 가까이 가보니 지붕 아래로 우물이 보였다.

 

“우물요. 한 100년 넘었을 게요.”

 

우물에 대해 묻자 할머니 두 분은 고개를 저었고 참기름 집에서 나온 이가 아는 체를 했다.

 

 

“옛날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두레박으로 퍼서 먹다가 상수도가 들어오고 하니 우물이 필요 있어요? 한 20년 전쯤인가 우물이 막혔지. 그러다 3, 4년 전에 시장 활성화를 위해 옛 모양 그대로 다시 복원을 한 거요.”

 

잠시의 막힘도 없이 술술 말을 이어가는 그의 행적이 궁금하여 무슨 일을 하시냐고 했더니 금방 나온 참기름 집을 가리키면서 “이 집 주인이요.” 라고 했다. 떡 방앗간도 같이 운영하는 그는 김주환(67) 씨였다. 떡 방앗간도 참기름 집도 모두 ‘새시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참기름만 40년을 해왔소. 건물도 옛적 그대로지요. 한 57, 8년쯤 되었지 아마.”

 

시선을 멀리 둔 그는 옛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야기하는 품이 예사롭지 않아 다른 일도 하느냐고 묻자 하동시장 번영회 회장이란다. “어이쿠, 회장님인 줄 모르고 죄송합니다.”라고 했더니 무슨 별 말씀이냐, 며 펄쩍 뛰었다.

 

 

인사를 하고 가게 안을 들어섰는데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깨알같이 적은 연락처가 보였다. 일종의 고객 명부인 셈인데 족히 수백 명은 됨직한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가 마당발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명부였다. 근데 저렇게 적어 놓으면 찾는 일도 예사가 아니겠다 싶었다.

 

 

 

“지금은 전부 중국산이여. 올해 깨 작황이 좋지 않아 국산은 씨가 말랐어.”

 

참깨를 볶은 후 키질을 하듯 고무대야에 담긴 참깨 껍질을 바람을 이용하여 날리던 그가 말했다.

 

 

하동 읍내에서 태어난 그는 하동 토박이다.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번영회에는 모두 7명이 근무하고 있단다.

 

 

 

“예전 하동시장은 그 뭐시기냐. 전국에서 꼽는 3대 시장이었지. 한창 잘 나가던 때는 시장이 17만평이었소. 건데 지금은 5만 6천 평으로 3분의 1이나 줄어 버렸어. 오늘 같이 토, 일요일이면 시장이 텅텅 비어 버려요. 그나마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장이 잘 되는데 주말이 되면 사람들이 전부 외지로 나가 버려요.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는 거지.”

 

나중에 둘러보았더니 시장 주위에는 대형 마트가 네 곳 정도 보였다. 마치 시장을 포위하듯 사방에 있는 마트를 보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동시장의 면적은 1만 3625㎡이며, 연면적은 4,781㎡이다.

 

 

하동시장은 조선말까지 만해도 전주시장, 김천시장과 함께 영남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고 한다. <하동군사(河東郡史>에 따르면, 하동읍내 시장은 1703년에 두치진(현 송림이 있는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에 세워졌다가 1년 만에 폐시되고 1704년부터 1730년까지 26년 동안 구 읍내시장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그 후 1915년에 당시 이장희 하동군수와 30여 명의 유지들이 하동군 하동읍 중앙동에 현대화된 시장터를 마련한 후 해량진시장과 광평시장을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이후 3일과 6일에 오일장 형식으로 장이 섰으나 1935년경부터는 2일과 7일로 변경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249번지 현 시장 위치로 옮겨왔다. 난전 형태의 장옥으로 섰다가 섬진강이 범람하는 재해 등으로 해마다 피해가 있자 1976년 하동시장을 공설 시장으로 등록하고 새롭게 단장을 해 오늘날의 현대식 시장으로 변모됐다.

 

 

지리산과 남해 그리고 섬진강이 바로 곁에 있는 하동장은 산과 물, 들판에서 나는 풍부한 산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리산의 산나물과 약재, 남해의 해산물, 섬진강의 민물고기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녹차·감·밤·매실 등 하동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로 거래되고 있다.

 

 

옛날 섬진강 물길이 바다까지 이르면서 그 물길 따라 화개, 범포, 해량, 광평 등 시장들이 형성됐다. 다리 건너 광양 땅 진월, 다압, 진상, 옥곡 사람들까지 다압나루에서 강을 건너 읍내시장에 왔단다. 섬진강의 광평나루와 해량초구는 늘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뒤섞여 붐볐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번듯한 다리가 놓인 지금이야 남아있는 건 관광지가 된 화개장터와 읍내시장뿐이다.

 

 

 

동네부엌·영남신발·여울목식당·통일상회·평화상회·화개청과·매일상회·현대신발·하동순대·꼬마친구·호야상회·한성상회·꼬까방·덕성미곡상회·다래탕재원 등 시장에 늘어선 점포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 있다. 한산한 어시장의 손님 없는 점포에서 주인이 무언가를 튀기고 있었다.

 

 

“이거 전어 뼈에요. 맛 한 번 보실라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튀긴 전어 뼈를 건넸다. 바스락거리며 담백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의외의 맛에 놀랐다.

 

주말인데도 외지인도 별로 없고 이곳 사람들마저 외지로 빠져나갔는지 읍내시장은 한산했다. 장날이면 열린다는 문화공연도 오늘은 볼 수 없었다. 시장 허름한 식당에서 칼국수 한 그릇을 맛나게 먹고 평사리 가는 버스에 올랐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