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전선, 남도 800리

삼랑진 '콰이강의 다리'... 오싹하네

 

 

 

삼랑진 '콰이강의 다리'... 오싹하네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 삼랑진 편 下

 

읍내를 나와 강변으로 향했다. 지하 도로를 건너야 했다. 지나가는 차들이 내는 소음이 귀청을 울린다. 손바닥으로 귀를 감쌌다. 문득 울릉도에서 도보여행을 할 때 어두컴컴한 터널의 그 이상야릇한 공포가 새삼 떠올라 쏜살같이 지하로를 빠져나왔다. 침침한 길을 환하게 바꾸려는 듯 하얀 벽에 빨간 딸기가 그려져 있었다.

 

 

딸기 시배지 삼랑진과 송지시장

 

‘딸기 시배지 삼랑진’. 말 그대로 삼랑진은 우리나라 딸기 시배지다. 1943년 당시 삼랑진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 송준생 씨가 일본에서 모종 10여 포기를 들여온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흔히 밀양하면 유명한 깻잎, 고추, 배, 대추 등에다 얼음골 사과, 초동 단감, 하남 감자와 함께 딸기는 밀양을 대표하는 농산물이다.

 

 

송지시장이 보였다. 삼랑진 시장하면 이곳 송지시장을 일컫는데 4일과 9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송지시장은 역에서 가까워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한다. 시장 음식으로는 비빔밥과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우리가 흔히 밀양의 대표 음식하면 밀양돼지국밥을 떠올리지만 예전 삼랑진에는 '장어도시락'이라는 별난 음식이 있었다.

 

 

통영의 충무김밥이 뱃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이곳 장어도시락은 기차의 여행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다. 교통의 요지라 워낙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장어가 상하지 않도록 훈제하여 밥과 함께 도시락에 넣어 허기진 여행객들에게 내팔던 음식이었다. 시장이 서는 날이 아니어서 '장어도시락'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장어구이를 하는 식당은 더러 보였다.

 

 

길거리 횟집에는 웅어를 판다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곳에서 '보리누루미'라 불리는 웅어는 낙동강을 따라 삼랑진과 양산의 물금, 창녕의 남지 등에서 잡힌다고 한다. 원래 바닷물고기인데 산란철인 5월 말에 낙동강으로 올라온다.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막걸리로 씻는 것이 특징인 웅어 회는 생산량이 많지 않아 가격도 kg당 4만~5만 원하는 고가의 생선이다. 밀양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 중의 하나다.

 

 

당분간 회를 먹을 수 없는 여행자, 입맛만 쩝쩝 다시고 길을 재촉했다. 이발소 간판은 세월을 비켜서 있었고, 5일장이 열리지 않는 시장에는 노인들만 삼삼오오 모여 오후의 지루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길은 피곤하고 여행은 비루하다

 

길은 점점 피로했다. 삼랑진성당이라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금세 지쳤을 것이다. 아직도 나의 여행은 비루했다. 도시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의 편백 때문일까. 시간을 거슬러온 시골의 소읍이 잠시 도시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머리가 지끈했다.

 

 

때마침 송지초등학교가 나왔다. 인도를 따라 무궁화가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마을의 끝이라 차들도 거의 없고 사람의 발길마저 띄지 않았다. 꽃길을 따라 걷는 맛이 즐겁다. 여행자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어느새 마을은 끝이 나고 길만 길게 남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길을 물으려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냥 걷기로 했다.

 

 

마을을 벗어났다 싶었는데 이따금 집들이 다시 나타났다. 오랜 지층의 시간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그 풍경은 낯설었다. 이 궁벽한 시골에 여관이 보인다. 여관 혼자 우뚝 서 있다. ‘낙동장 여관’. 이 외딴 곳을 찾을 손님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왠지 을씨년스럽다. 익숙하지 못한 풍경으로 들어가기 전에 연습이 필요했다. 강으로 갔다.

 

 

한적한 시골에 서울의 청계천이 흐른다.

 

강둑에 올라서는 순간 다시 오늘로 돌아왔다. 너무나 반듯한 이 길, 막힘없이 뻥 뚫린 자전거 길을 보고 그제야 숨을 돌렸다. 익숙한 풍경, 그리고 잠시 뒤에 이어지는 공허... 강 아래와 강 위는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4대강 사업은 이곳 역시 피해 가지 않았다. 깊게 흐르는 강과 자로 잰 듯한 반듯한 길이 도시의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한적한 시골에 서울의 청계천이 흐른다. 단지 규모만 다를 뿐... 익숙한 듯한 풍경이 도리어 역겨웠다. 썩지는 않을까. 여행자는 다시 타임 슬립 했다.(그 후 여행자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낙동강에서 심한 녹조가 발생했다.)

 

 

콰이강의 다리... 삼랑진을 지나는 다리만 5개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 세 갈래의 물결이 일렁거리는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 삼랑진. 뭍길인 영남대로와 함께 물길로 조선 후기까지 낙동강에서 가장 큰 포구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1905년에 삼랑진역이 들어선 후 철도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경부선과 경전선이 Y자로 분기하는 삼랑진에는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많다.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오우정 일대는 땅이 강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이곳에 다섯 개의 다리가 걸쳐져 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는 낙동대교, 삼랑진교, 구 낙동철교, 낙동인도교(구 삼랑진교), 경전선이 지나는 낙동철교가 그것이다.

 

 

강을 거슬러 다리 아래를 하나씩 지나갔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오싹한 느낌이 든다. 특히 구 낙동철교는 온통 쇳덩어리라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전쟁 영화의 흑백필름처럼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다.

 

 

강과 마을은 커다란 성벽 같은 제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강물을 막기 위해 쌓은 높다란 제방을 드나드는 데는 성문 같은 수문을 지나야 한다. 무슨 대단한 의식을 치르는 듯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한 후에야 제방을 넘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작은 승용차가 지나거나 인도교로 사용되는 구 삼랑진교인 낙동인도교를 이곳에선 '콰이강의 다리'로 부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주민들도 그렇게 불렀고 마을 곳곳에서 '콰이강의 다리'라고 써 붙인 글씨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우정과 삼강비에서 발길을 돌리다

 

인도교에서 오우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제방에서 보았던 하부마을을 지나 상부마을에 이르렀다. 강변을 따라 횟집들이 더러 보인다.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이곳에는 은어, 잉어, 향어, 숭어, 메기, 붕어 등 민물 어종이 풍부하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만 해도 바닷물고기까지 이곳에 올라왔다고 하니 강의 넉넉함과 풍족함이 이를 데가 없었다.

 

 

 

잊을 만하면 다시 집들이 보인다. 읍내뿐만 아니라 하양, 상부, 하부 마을에서도 일본식 가옥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일부는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고, 일부는 낡아 그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고, 이따금 잘 관리된 덕분에 오히려 고졸한 맛이 나는 집도 있었다.

 

 

"남의 동네에 저렇게 막 지어 놓으니 참 말이 안 나옵니다."

 

마을 뒷산에 높은 축대를 쌓은 곳에 오우정이 있었다. 마을 주민인 듯한 중년의 사내에게 길을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오우정 앞에는 후조창(삼랑창) 비석군(경남 문화재자료 제393호)이 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후조창은 조선 영조 대에 이르러 삼랑창을 증설하여 밀양, 양산, 현풍, 창녕, 영산, 울산, 동래 등 인근 7개 군현의 조세를 밀양부사 책임 하에 징수했다고 한다. 조운선만 15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우정은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민씨 5형제의 효성과 우애, 학문을 기려 세운 것이다. 앞에 삼강사 비를 세워 그들의 효행과 우애를 기렸다. 이들의 스승인 김종직은 이곳 밀양 출신으로 그가 나서 자랐다는 추원재가 부북면에 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마을엔 풀벌레 소리만...

 

막다른 길이라 돌아 나왔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마을, 작원관지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릴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마침 가게가 보였다. 주인인 듯한 할머니 한 분이 부추를 다듬고 있었다.

 

 

"손님 말이요? 오데. 하나도 없어요. 심심하고 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 이렇게 가게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거지."

 

생수 하나를 사서 마셨다. 작원관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거기가 어딘데 걸어간단 말이오. 못 걸어가. 자전거라도 타면 모를까. 얼마 전에 강변에 번듯한 자전거길이 생겼거든. 쌩하니 달려가면 몰라도...."

 

 

버스를 기다릴까 하다 그냥 내쳐 걷기로 했다. 역에서 얻은 지도로 대충 봐도 삼랑진역에서 이곳 상부 마을을 경유하여 작원관지까지 걸어가기는 꽤 먼 거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13km 정도였다. 걷다가 지치면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면 되지. 사실 수술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걱정은 하지 않았을 거다. 날씨는 또 왜 이리 더운지....

 

 

버스도, 기다리는 승객도 없는 정류장에서 잠시 쉬었다. 조용했다.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고요했다.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 이곳을 비켜간 듯했다. 벽면에는 '신고하여 애국하고 자수하여 행복찾자' 오래된 표어와 사람을 구한다는 인력소, 지붕을 개량한다는 문구 등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자전거 고속도로는 강을 달리고...

 

강으로 나왔다. 지도를 보니 강변 제방을 걷는 것이 지름길로 보였다. 안동에서 부산까지 이어진다는 낙동강 자전거 길은 그야말로 자전거 고속도로였다.

 

 

"4대강 공사하고 아직은 모르지. 큰비가 와봐야 알 수 있는데 올해처럼 비가 안 오기도 드물지. 아직은 알 수가 없어."

 

마침 자전거를 끌고 산책을 나온 마을 주민에게 4대강 공사 후 좋아졌는지를 묻자 돌아온 말이었다.

 

"4대강 하고 난 뒤 자전거 길은 시원하게 뚫렸어. 운동하기 좋아요. 저 강 건너 마을에서도 인도교를 건너 자전거 타러 온다니까. 주말 되면 부산에서 자전거 탄다고 새까맣게 올라오고. 이 길이 안동까지 이어져 있어. 건데 도시 사람이야 자전거 타고 바람 쐬면 좋겠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좋지 만은 않아. 분통 터져 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 서로 터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리가 아팠다. 흙길과 산길을 걷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지만 이런 아스팔트 길은 걷기에 정말 힘들다. 제방 아래를 내려가서 흙길을 걷다, 풍경이 답답하면 다시 제방 위로 올라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제방 아래의 민가에도 옛 적산가옥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 이젠 그 풍경이 자연스러워졌다. 작원관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더 이상 걷기에는 무리였다. 마을을 향해 걸었다. 교회 앞에서 택시를 불렀다.

 

 

오늘도 작원관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예전엔 여기를 ‘모래등’이라고도 하고 ‘모래등애’라고도 했지요. 비가 오면 이 일대가 전부 물에 잠겼어요. 저 짝에 양수시설이 있었어. 비만 오면 잠기니까, 양수시설로 다 퍼내곤 했지. 작원관도 원래 저 아래 강 끄트머리 언덕배기에 있었심더."

 

묻지도 않았는데 택시 기사는 열심히 설명했다. 작원관지는 예전 밀양이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알게 하는 곳이다. 고려시대 이후 육로의 중심지로 동래와 한양을 잇는 교통과 국방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양산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밀양으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작원잔도鵲院棧道라 불리던 이 길은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험한 벼랑길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이유로 사람과 물자를 검문했던 관關과 관원들의 숙소인 원院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관민 700여 명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만 8000여 명을 상대로 결사항전한 곳이기도 하다. 1995년에 이곳에 한남문이라는 성문을 복원하고 전적기념비와 위령비를 세웠다. 여행자가 애써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작원관지의 풍광도, 박제화 된 기념비도 아니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처럼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당당했던 옛 선인들의 기개가 오늘따라 무척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이날 8km 남짓 걸었다. 삼랑진역에서 철도관사 자리를 둘러보고 송지시장과 삼랑진 성당을 거쳐 오우정과 삼강사비에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상부마을에서 강변 자전거 길을 따라 걷다 송지 교회 앞에서 택시를 타고 작원관지로 갔다. 저녁 6시 8분, 경부선 기차를 타고 구포에서 내렸다. 비가 쏟아졌다. 소나기였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경전선 여행 첫 번째- 타임슬립, 기차 타고 떠난 삼랑진 골목 여행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