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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경전선 800리] "길에 깔린 게 돈이었지" 시간 멈춰버린 삼랑진

 
 

 

 

 

 

 

이 글은 그동안 블로그에 몇 차례에 걸쳐 올렸던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삼랑진 편을 한 편으로 재작성하여 오마이뉴스와 코레일에 연재한 기사입니다. (연재기사 원본 보기)

 

 

 

"길에 깔린 게 돈이었지" 시간 멈춰버린 삼랑진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①] 정겨운 옛 모습 간직한 삼랑진

삼랑진역은 경전선 800리의 출발역이자 모태이다.
ⓒ 김종길

구불구불 느릿느릿... 세상에서 제일 불편하고 가장 느린 기차를 타고 삼랑진역에 도착한 때는 지난 7월 15일 오후 1시 45분. 삼랑진역은 잿빛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만 같았다.

경전선. 왜 이리 여행자의 마음을 뒤흔드는지 모르겠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유일한 철도라서 그럴까. 아니면 버스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는 무궁화호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2012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역들이 있기 때문일까. 원북역, 평촌역, 진주수목원역, 진성역, 갈촌역, 남문산역, 개양역...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역들이다.

경전선, 추억을 간직한 채 달리다

밀양 삼랑진역에서 광주 송정역을 잇는 308.2km의 경전선은 경사가 심하고 곡선이 많다. 열차는 옛 추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달리고 있다. 삼랑진은 경전선의 출발역이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1903년에 삼랑진과 마산포를 잇는 공사를 시작으로 1905년 마산선이 운행을 시작함으로써 지금의 경전선이 탄생했다. 삼랑진역은 경전선의 요람인 셈이다.

그 후 1922년에 광주 송정과 순천, 1923년에 마산과 진주, 1968년에 진주와 순천을 잇는 경전선이 완성되면서 경전선은 그 이름에 걸맞게 경상도와 전라도를 달리는 기차가 됐다. 300km가 넘는 경전선이 완성되는 데는 6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셈. 1968년까지만 해도 60여 개의 역이 있었다고 하지만,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더러 많은 역들이 자취를 감췄다.

경부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삼랑진역은 부산과 대구의 중간에 있다. 하루에도 수십여 대의 기차가 지나간다. 이곳을 밀양 철도 교통의 요충지라고 애써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옛날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
ⓒ 김종길

철길 옆에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923년에 지어졌다는 급수탑이 우람하게 서 있다. 급수탑은 예전에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던 시절, 기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역내에 지어진 철도 시설물이다. 189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했던 급수탑은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사라지고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남았다. 무성한 담쟁이덩굴에 덮여 옛 영화는 찾을 수 없지만 탄탄한 모습에서 한때 번잡했을 삼랑진역을 상상해 본다.

읍내에서 수십 년째 택시를 몰고 있는 정영호(62)씨는 삼랑진역에 증기기관차가 드나들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기차를 따라 뛰며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노리까리'라 했던 기차에 급수를 하는 장면도 직접 봤다고 한다. 인근에 있는 미전역에서 뱀처럼 긴 기차가 몸통은 그대로 두고 머리만 떼어 방향을 바꿨는데,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밀양은 여기에 비할 거도 아니었제. 사람들로 미어터졌어요. 기차가 설 때마다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어. 돈요. 길에 깔린 게 돈이었어. 여관도 엄청 많았고..."

삼랑진역 승강장과 대합실을 잇는 지하통로에는 옛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김종길

승강장에서 대합실로 가는 지하통로에서 삼랑진의 옛 모습을 더듬을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을 내려놓고 회색의 벽에 걸린 옛 삼랑진의 사진들을 바라봤다. 땅 위로는 오늘이 내일을 달리고 그 아래로는 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

'타임 슬립', 옛 철도관사를 찾아 삼랑진 골목길을 걷다

삼랑진에서는 옛 일본식 가옥의 흔적을 흔히 볼 수 있다.
ⓒ 김종길

삼랑진역을 나오자마자 타임 슬립이 되는 느낌이다. 반듯한 역사와는 달리 옛날 영화 촬영지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옥은 아직도 일본식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호만 봐도 재미있다.

서점 이름이 '인간서점', 미용실은 '머리이야기, 까꼬뽀꼬'이다. 보석방은 너무나 익숙한 '명성당', 약만 지어주는 한약방은 '삼대한약방'이다. 커피·주스만 적어 놓은 '명성휴게실'이라는 곳은 왠지 안을 들여다보고 싶다. 아마도 다방이겠지...

삼랑진역을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시간의 지층, 타임 슬립이 되는 느낌이다.
ⓒ 김종길

택배 회사는 이름이 따로 없다. 그냥 '택배'다. 시골에선 무슨 무슨 회사라는 게 낯설다. 그냥 두루뭉실하게 이름 붙여 운영하다 물건이 있으면 적당한 택배 회사를 불러 보내면 그만이다. 농약방은 간판조차 없다. 여러 가지 잡동사니와 더불어 그때그때 필요할 때 가져가면 된다. 얼핏 보기에 작은 수족관 하나 없는데 회를 파는 식당도 보인다. 무슨 회를 팔까. 분명' 바다 회'라고 적어 놨다.

거리를 둘러보고 새마을금고 뒤로 갔다. 역 앞 일본식 건물 앞에서 쉬고 있던 정영호(62)씨는 예전 박정희가 삼랑진에 왔을 때 역 앞 게양대에 서 있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그가 소개한 곳이 과거 삼랑진역 근처에 몰려 있던 철도관사였다.

철도관사는 일부 변형이 됐지만, 지금도 옛 가옥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 번잡했던 옛 삼랑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집의 모양이 달라 보이나 자세히 보면 집 하나하나가 판에 박은 듯 비슷하다. 축대도 일본 특유의 축조법이 보인다.

삼랑진역을 나와 새마을금고 뒤 골목으로 가면 옛 철도관사 건물들을 볼 수 있다.
ⓒ 김종길

"매일 기차역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엄청났지요. 그러다보니 철도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이 일대가 전부 철도 관사 자리지요. 한 30여 호 될 거요. 내가 여기서 한 50년 살았는데, 지금이야 살기에 좋으라고 개조를 했지만 겉모습은 옛날하고 똑같아. 골목길도 예전 그대로고 변한 게 거의 없어."

골목에서 만난 최진호(84) 할아버지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일제 때 지어진 이곳의 철도 관사는 해방 후 불하가 돼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점차 내부를 개조했다고 한다. 그는 철도에 종사하다 50년 넘게 이 집에서 살고 있다며 넌지시 자부했다. 마을 한쪽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지금은 상수도 시설이 집집마다 있으나 불과 십수 년 전 만해도 이 우물은 철도 관사가 있는 마을에 긴요하게 쓰였다.

딸기 시배지 삼랑진과 송지시장

삼랑진은 우리나라 딸기의 시배지다.
ⓒ 김종길

읍내를 나와 강변으로 향했다. 지하 도로를 건너야 했다. 지나가는 차들이 내는 소음이 귀청을 울린다. 손바닥으로 귀를 감쌌다. 문득 울릉도에서 도보 여행을 할 때 어두컴컴한 터널의 그 이상야릇한 공포가 새삼 떠올라 쏜살같이 지하로를 빠져나왔다. 침침한 길을 환하게 바꾸려는 듯 하얀 벽에 빨간 딸기가 그려져 있었다.

'딸기 시배지 삼랑진'. 말 그대로 삼랑진은 우리나라 딸기 시배지다. 1943년 당시 삼랑진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故) 송준생씨가 일본에서 모종 10여 포기를 들여온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흔히 밀양하면 유명한 깻잎·고추·배·대추 등에다 얼음골 사과·초동 단감·하남 감자와 함께 딸기는 밀양을 대표하는 농산물이다.

4일과 9일에 열리는 5일장 송지시장
ⓒ 김종길

송지시장이 보였다. 삼랑진 시장하면 이곳 송지시장을 일컫는데 4일과 9일에 열리는 오일장이다. 송지시장은 역에서 가까워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한다. 시장 음식으로는 비빔밥과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우리가 흔히 밀양의 대표 음식하면 밀양 돼지국밥을 떠올리지만 예전 삼랑진에는 '장어 도시락'이라는 별난 음식이 있었다.

통영의 충무김밥이 뱃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이곳 장어 도시락은 기차의 여행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다. 교통의 요지라 워낙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장어가 상하지 않도록 훈제해 밥과 함께 도시락에 넣어 허기진 여행객들에게 내팔던 음식이었다. 시장이 서는 날이 아니어서 '장어 도시락'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장어구이를 하는 식당은 더러 보였다.

송지시장의 웅어를 파는 횟집과 장어집
ⓒ 김종길

길거리 횟집에는 웅어를 판다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곳에서 '보리 누루미'라 불리는 웅어는 낙동강을 따라 삼랑진과 양산의 물금·창녕의 남지 등에서 잡힌다고 한다. 원래 바닷물고기인데 산란철인 5월 말에 낙동강으로 올라온다.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막걸리로 씻는 것이 특징인 웅어 회는 생산량이 많지 않아 가격도 kg당 4만~5만 원하는 고가의 생선이다. 밀양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 중의 하나다.

당분간 회를 먹을 수 없는 여행자, 입맛만 쩝쩝 다시고 길을 재촉했다. 이발소 간판은 세월을 비켜서 있었고, 오일장이 열리지 않는 시장에는 노인들만 삼삼오오 모여 오후의 지루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길은 피곤하고 여행은 비루하다

삼랑진 성당
ⓒ 김종길

길은 점점 피로했다. 삼랑진 성당이라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금세 지쳤을 것이다. 아직도 나의 여행은 비루했다. 도시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의 편백 때문일까. 시간을 거슬러온 시골의 소읍이 잠시 도시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머리가 지끈했다.

때마침 송지 초등학교가 나왔다. 인도를 따라 무궁화가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마을의 끝이라 차들도 거의 없고 사람의 발길마저 띄지 않았다. 꽃길을 따라 걷는 맛이 즐겁다. 여행자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어느새 마을은 끝이 나고 길만 길게 남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길을 물으려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냥 걷기로 했다.

송지초등학교에 핀 무궁화
ⓒ 김종길

마을을 벗어났다 싶었는데 이따금 집들이 다시 나타났다. 오랜 지층의 시간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그 풍경은 낯설었다. 이 궁벽한 시골에 여관이 보인다. 여관 혼자 우뚝 서 있다. '낙동장 여관'. 이 외딴 곳을 찾을 손님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왠지 을씨년스럽다. 익숙하지 못한 풍경으로 들어가기 전에 연습이 필요했다. 강으로 갔다. 한적한 시골에 서울의 청계천이 흐른다.

강둑에 올라서는 순간 다시 오늘로 돌아왔다. 너무나 반듯한 이 길, 막힘없이 뻥 뚫린 자전거 길을 보고 그제야 숨을 돌렸다. 익숙한 풍경, 그리고 잠시 뒤에 이어지는 공허... 강 아래와 강 위는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4대강 이후 번듯하게 생긴 안동과 부산을 잇는 자전거 길. 자연스런 강은 없어지고 청계천처럼 깔끔한 도시의 하천이 새로 생겼다.
ⓒ 김종길

4대강 사업은 이곳 역시 피해 가지 않았다. 깊게 흐르는 강과 자로 잰 듯한 반듯한 길이 도시의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한적한 시골에 서울의 청계천이 흐른다. 단지 규모만 다를 뿐... 익숙한 듯한 풍경이 되레 역겨웠다. 썩지는 않을까. 여행자는 다시 타임 슬립을 했다(이후 여행자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낙동강에서 심한 녹조가 발생했다).

콰이강의 다리... 삼랑진을 지나는 다리만 다섯 개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 세 갈래의 물결이 일렁거리는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 삼랑진. 뭍길인 영남대로와 함께 물길로 조선 후기까지 낙동강에서 가장 큰 포구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1905년에 삼랑진역이 들어선 후 철도 교통의 요충지가 됐다. 경부선과 경전선이 Y자로 분기하는 삼랑진에는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많다.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오우정 일대는 땅이 강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이곳에 다섯 개의 다리가 걸쳐져 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는 낙동대교, 삼랑진교, 구 낙동철교, 낙동인도교(구 삼랑진교), 경전선이 지나는 낙동철교가 그것이다.

구 낙동철교(좌)와 낙동인도교(우)
ⓒ 김종길

강을 거슬러 다리 아래를 하나씩 지나갔다. 다리를 지날 때마다 오싹한 느낌이 든다. 특히 구 낙동철교는 온통 쇳덩어리라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전쟁 영화의 흑백필름처럼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다.

강과 마을은 커다란 성벽 같은 제방으로 나눠져 있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강물을 막기 위해 쌓은 높다란 제방을 드나드는 데는 성문 같은 수문을 지나야 한다. 무슨 대단한 의식을 치르는 듯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한 후에야 제방을 넘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작은 승용차가 지나거나 인도교로 사용되는 구 삼랑진교인 낙동인도교를 이곳에선 '콰이강의 다리'로 부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주민들도 그렇게 불렀고 마을 곳곳에서 '콰이강의 다리'라고 써 붙인 글씨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낙동인도교와 제방의 수문 풍경
ⓒ 김종길

오우정과 삼강비에서 발길을 돌리다

인도교에서 오우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제방에서 보았던 하부마을을 지나 상부마을에 이르렀다. 강변을 따라 횟집들이 더러 보인다.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이곳에는 은어·잉어·향어·숭어·메기·붕어 등 민물 어종이 풍부하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만 해도 바닷물고기까지 이곳에 올라왔다고 하니 강의 넉넉함과 풍족함이 이를 데가 없었다.

잊을 만하면 다시 집들이 보인다. 읍내뿐만 아니라 하양·상부·하부 마을에서도 일본식 가옥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일부는 쓰러진 채 방치돼 있고, 일부는 낡아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이따금 잘 관리된 덕분에 오히려 고졸한 맛이 나는 집도 있었다.

"남의 동네에 저렇게 막 지어 놓으니 참 말이 안 나옵니다."

마을 뒷산에 높은 축대를 쌓은 곳에 오우정이 있었다. 마을 주민인 듯한 중년의 사내에게 길을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오우정 앞에는 후조창(삼랑창) 비석군(경남 문화재자료 제393호)이 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후조창은 조선 영조 대에 이르러 삼랑창을 증설하여 밀양·양산·현풍·창녕·영산·울산·동래 등 인근 7개 군현의 조세를 밀양부사 책임 하에 징수했다고 한다. 조운선만 15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우정과 삼강사비, 후조창 비석군
ⓒ 김종길

오우정은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민씨 5형제의 효성과 우애, 학문을 기려 세운 것이다. 앞에 삼강사 비를 세워 그들의 효행과 우애를 기렸다. 이들의 스승인 김종직은 이곳 밀양 출신으로 그가 나서 자랐다는 추원재가 부북면에 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마을엔 풀벌레 소리만...

막다른 길이라 돌아 나왔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마을, 작원관지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릴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마침 가게가 보였다. 주인인 듯한 할머니 한 분이 부추를 다듬고 있었다.

"손님 말이요? 오데. 하나도 없어요. 심심하고 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 이렇게 가게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거지."

생수 하나를 사서 마셨다. 작원관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거기가 어딘데 걸어간단 말이오. 못 걸어가. 자전거라도 타면 모를까. 얼마 전에 강변에 번듯한 자전거길이 생겼거든. 쌩하니 달려가면 몰라도..."

상부마을의 조용한 가게
ⓒ 김종길

버스를 기다릴까 하다 그냥 내쳐 걷기로 했다. 역에서 얻은 지도로 대충 봐도 삼랑진역에서 이곳 상부 마을을 경유해 작원관지까지 걸어가기는 꽤 먼 거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13km 정도였다. 걷다가 지치면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면 되지. 사실 수술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게다. 날씨는 또 왜 이리 더운지...

버스도, 기다리는 승객도 없는 정류장에서 잠시 쉬었다. 조용했다.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고요했다.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 이곳을 비켜간 듯했다. 벽면에는 '신고하여 애국하고 자수하여 행복찾자' 오래된 표어와 사람을 구한다는 인력소, 지붕을 개량한다는 문구 등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자전거 고속도로는 강을 달리고...

강으로 나왔다. 지도를 보니 강변 제방을 걷는 것이 지름길로 보였다. 안동에서 부산까지 이어진다는 낙동강 자전거 길은 그야말로 자전거 고속도로였다.

"4대강 공사하고 아직은 모르지. 큰비가 와봐야 알 수 있는데 올해처럼 비가 안 오기도 드물지. 아직은 알 수가 없어."

마침 자전거를 끌고 산책을 나온 마을 주민에게 4대강 공사 후 좋아졌는지를 묻자 돌아온 말이었다.

"4대강 하고 난 뒤 자전거 길은 시원하게 뚫렸어. 운동하기 좋아요. 저 강 건너 마을에서도 인도교를 건너 자전거 타러 온다니까. 주말 되면 부산에서 자전거 탄다고 새까맣게 올라오고. 이 길이 안동까지 이어져 있어. 건데 도시 사람이야 자전거 타고 바람 쐬면 좋겠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좋지 만은 않아. 분통 터져 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 서로 터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리가 아팠다. 흙길과 산길을 걷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지만 이런 아스팔트 길은 걷기에 정말 힘들다. 제방 아래를 내려가서 흙길을 걷다, 풍경이 답답하면 다시 제방 위로 올라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제방 아래의 민가에도 옛 적산가옥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 이젠 그 풍경이 자연스러워졌다. 작원관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더 이상 걷기에는 무리였다. 마을을 향해 걸었다. 교회 앞에서 택시를 불렀다.

오늘도 작원관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예전엔 여기를 '모래등'이라고도 하고 '모래등애'라고도 했지요. 비가 오면 이 일대가 전부 물에 잠겼어요. 저 짝에 양수시설이 있었어. 비만 오면 잠기니까, 양수시설로 다 퍼내곤 했지. 작원관도 원래 저 아래 강 끄트머리 언덕배기에 있었심더."

묻지도 않았는데 택시 기사는 열심히 설명했다. 작원관지는 예전 밀양이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알게 하는 곳이다. 고려시대 이후 육로의 중심지로 동래와 한양을 잇는 교통과 국방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양산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밀양으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작원관지
ⓒ 김종길

작원잔도(鵲院棧道)라 불리던 이 길은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험한 벼랑길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이유로 사람과 물자를 검문했던 관(關)과 관원들의 숙소인 원(院)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관민 700여 명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만8000여 명을 상대로 결사항전한 곳이기도 하다.

1995년에 이곳에 한남문이라는 성문을 복원하고 전적기념비와 위령비를 세웠다. 여행자가 애써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작원관지의 풍광도, 박제화 된 기념비도 아니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처럼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당당했던 옛 선인들의 기개가 오늘따라 무척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이날 8km 남짓 걸었다. 삼랑진역에서 철도관사 자리를 둘러보고 송지시장과 삼랑진 성당을 거쳐 오우정과 삼강사비에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상부마을에서 강변 자전거 길을 따라 걷다 송지 교회 앞에서 택시를 타고 작원관지로 갔다. 오후 6시 8분, 경부선 기차를 타고 구포에서 내렸다. 비가 쏟아졌다. 소나기였다.

삼랑진 일대 지도. 지도 중간의 삼랑진역에서 출발하여 송지시장을 지나 왼쪽 오우정에서 발길을 돌려 오른쪽 끝의 작원관지에서 여정을 마쳤다. 전체 15km 정도로 걸어서는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 다음지도

 

 (연재기사 원본 보기)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땅 위의 방랑자이자 바람의 여행자로 섬과 암자를 순례한 김천령, 그가 이번에는 철길을 따라 나섰다. 말없는 간이역을 노래하고 기찻길 옆 삶의 풍경을 담아내는 순례의 길이다. 그 길은 땅의 기운과 하늘의 빛, 숲의 정령과 대화하는 치유의 여행이기도 하다. 그의 순례는 남도의 경전선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의 영동선, 서해의 장항선까지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