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화가의 해변전시회, 그 자체가 그림이었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딱히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 보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이 더 소중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면서 잠시의 만남이 오래도록 남을 때가 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화가이다. 그녀가 사는 곳은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면 있는 섬, 우도이다. 그녀의 이름은 안정희. 부산대 미대를 나온 90학번. 우도에 놀러왔다 그대로 섬에 주저앉아 버린 여자이다.
사실 그녀에 대해선 아는 게 조금 있었다. 내가 자주 보는 다큐에서, 그리고 간간히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그녀의 삶의 단편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그녀를 만났던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일 게다.
등대를 앞에 두고 잠시 걷고 있는데, 바다로 불쑥 튀어나온 해변의 언덕 위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둥글게 큰 원을 그리며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은 그 자체가 그림이었다.
해변 언덕에 전시장을 꾸민 것도 독특하지만. 대개의 그림들이 이젤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것에 비해 어떤 그림들은 돌에 기댄 채로 그대로 두었다. 그림 주인공의 자유분방함이 전시장에도 오롯이 담겨 있다. 다만 바람에 그림이 날아갈세라 이젤을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은 잊지 않았다.
길옆에 <안정희 그림 詩>라고 적힌 작은 푯말이 보였다. 안정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몇 번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 불명확한 기억을 애써 머릿속에 집어넣고 해변의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여기가 훨씬 나아. 아, 거 뭐야. 갤러리라고 했냐? 미술관 같은 건 여기에 비할 것도 아니네 뭐. 이번 전시회 정말 좋다. 얼마나 멋지냐! 탁 트인 바다에서 하니....” “그렇죠. 나도 여기가 좋아.” 할머니의 끝없는 칭찬에 뒤따르던 여인이 추임새를 넣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다소 요란해 보이기도 하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차림을 한 여인이 할머니 뒤로 보였다.
지레짐작으로 안정희 씨라는 걸 눈치챘다. 아는 체하는 여행자가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아주 명쾌하다. “네, 그러죠.” 치렁치렁한 옷차림에 거뭇거뭇한 얼굴빛의 그녀였지만 아주 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우도에 들어온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다. 2001년 5월, 우도 토박이인 남편 편 씨는 마을 청년들과 등대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연히 이 등대 앞을 안정희 씨가 지나게 된다. 이 때 안 씨는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예전 친구와 함께 왔던 우도가 기억에 남아 혼자서 찾았던 것이다.
안 씨는 그 자리에 합석을 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그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안 씨는 섬을 떠났고 우도 총각은 아픈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1주일 뒤에 보따리를 싸들고 안 씨가 찾아왔다. 그러면서 우도에서 살겠다고 했단다. 그리하여 둘은 부부가 되었고, 세 살이나 어린 남편과 알콩달콩 섬 살림집을 차리게 되었다.
보일러공이 직업이었던 남편 편 씨는 땅콩농사를 짓고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 2년 전에는 버스 갤러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원래는 등대 주위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어묵, 파전, 막걸리,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엽서 등을 팔았다.
그녀가 처음 남편과 함께 등대 옆에서 운영한 포장마차가 ‘초록우도’였다. 그러던 것이 아내를 위해 차린 출판사 이름도, 온라인 카페 이름도 ‘초록우도’가 되었다. “전시회 축하해요. 마땅히 드릴 게 없어 커피봉지에 마음을 담았어.” 전시회를 찾은 지인이 봉투를 내밀자 몇 번이나 사양하는 그녀를 여행자는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참으로 맑아보였다.
소가 돌아누운 모습을 닮은 섬, 우도. 안 씨의 남편은 소띠라고 했다.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우직하게 서 있을 그는 듬직한 우도의 사내임에 틀림없겠다. 강렬한 원색의 그림, 마치 동화 같은 그녀의 그림은 이미 우도와 우도 너머에 있었다.
안정희, 사실 그녀는 요즈음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 씨의 사촌동생이다. 늘 바빴던 안철수 씨가 그녀의 삶을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Daum 카페 <초록바다>에 가면 그녀와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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