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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테마가 있는 여행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비의 바위열전 15곳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비의 바위열전 15

산이 많은 우리 땅은 자연스레 바위 또한 많다. 옛사람들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기도 하고 정원에 바위를 끌어들여 경석으로 쓰기도 했다. 혹은 돌장승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돌무지를 쌓아 안녕을 빌었다. 경치 좋은 바위에는 글을 새겨 영원히 기리기도 했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바위에 이름을 지어주고 이야기를 만들어 생명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지난 3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취재한 바위 중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바위 15개를 꼽아 보았다. 단순히 바위의 생김새가 특이해서 뽑은 것이 아니라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서 어떤 가치를 읽을 수 있다는 데 주목했다. 게다가 여기에서 소개하는 곳은 대개 경관이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더위도 한 풀 꺾이는 초가을에 바위여행을 떠나봄은 어떨까?


영월 서강의 비경, 선돌

서강이 아래를 휘감아 도는 곳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선돌은 신선암이라고도 불린다. 두 갈래로 갈라진 바위의 높이만 70여 미터요. 선돌 아래 층암절벽은 천 길이나 될 법하다. 옛 길이 선돌 아래에 있다고 한다.

선돌 아래 깊은 소沼에는 자라바위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근 남애마을 장수가 태어나 적과 싸우다 패하자 이곳에서 투신하여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선돌을 보며 소원을 빌면 한 가지씩 꼭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 서면 구름과 물안개, 유유히 흐르는 서강, 우뚝 솟은 선돌, 고요한 산골마을이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그 옛날 영월부사를 지낸 홍희간, 뛰어난 문장가 오희상, 홍직필 세 사람이 본 선돌의 경관도 오늘과 같으리라. 구름에 쌓인 선돌의 산수에 반한 그들은 선돌 암벽에 '운장벽雲莊壁' 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한반도를 쏙 빼닮은 흑산도 지도바위와 구문여

흑산도 일주도로를 돌다 보면 대표적인 바위명승인 ‘지도바위’와 ‘구문여’를 만날 수 있다. 지도바위는 마리마을과 비리마을 사이의 해안가에 떠있는 바위이다. 바위 사이에 구멍이 뚫린 모습이 한반도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지도바위’라 부른다. 이 지도바위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자연이 경이롭다.

구문여는 청촌리와 천촌리 사이에 있는 바위로 작은 섬에 중앙이 뚫려 있는 형태이다. 거센 파도가 구문여 바위를 삼킬 듯이 달려들 적에 중앙 공간 사이로 물줄기가 분수처럼 쏟아 나오는 장관을 연출한다. 태풍이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 구문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을주민 백씨에게 왜 구문여라 부르는지 물어 보았더니 돌아오는 답이 걸쭉하다. “아따, 딱 보면 모르겠소. 구멍 아니요. 거시기하고 꼭 닮지 않았소.”

구문여


하늘로 솟은 거대한 기둥, 제주 갯깍주상절리대

'갯깍'은 '바다(갯)끄트머리'라는 제주도 방언이다. '주상절리柱狀絶理'는 말 그대로 기둥 모양의 절리다. 대개 육각이나 삼각의 긴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성분이 섞인 용암 덩어리가 평행 또는 수직으로 흐르다 바닷물과 만나 형성된 바위들을 일컫는 말이다.

1km 에 달하는 대포동의 주상절리만큼 이곳 색달해안도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다만 대포동의 주상절리가 육각의 기둥모양으로 바다 위로 솟아 있다면 이곳은 절벽에 각이 진 기둥들이 40여 미터의 높이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이곳의 좋은 점은 사람이 붐비지 않고 입장료가 없다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 동굴과 자연동굴이 있어 체험 장소로도 제격이다.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남긴 글씨, 보길도 글씐바위

보길도 백도리 해안 벼랑에는 검은 먹물 자국이 배인 바위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오언절구를 남겼다. 그는 정계를 은퇴한 후 숙종에게 훗날 경종인 왕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려 83세의 나이로 유배 길에 올랐다. 제주도로 가던 도중 이곳 벼랑에 올라 시 한수를 남겼던 것이다.

여든 셋 늙은 몸이
멀고 찬 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남녘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담비갖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

83세의 늙은 몸으로 유배를 떠나던 그의 복잡한 심경이 시에 오롯이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바위로 가장 크다는 거창 문바위

금원산 입구에서 여울을 두 번 건너고 나면 '문바위'에 이른다. 금원산 지재미골 입구에 있는 문바위는 그 육중한 목소리로 여기서부터 절의 영역이노라고 호령하는 듯하다. 가섭암터의 일주문에 해당하는 문바위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바위로 가장 큰 바위로 알려져 있다.

문바위 앞에 서면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어 절로 경건해진다. 호신암, 가섭암, 금달암, 두문암, 지우암, 기도암, 용의 여의주 등 많은 이름을 가진 문바위는 선조들의 큰 바위에 대한 신앙심이 깊게 배여 있는 이름난 바위이다. 바위 앞면에는 고려 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이원달 선생을 기려 '달암 이선생 순절동 達岩 李先生 殉節洞'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단양팔경의 으뜸, 사인암

전국에 내로라하는 팔경이 있지만 단양팔경만큼 확고하게 인정받은 명승지는 드문 편이다. 단양팔경의 빼어남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제4경인 사인암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승지이다.

하늘로 치솟은 바위벽은 금이 가서 마치 책을 층층이 쌓은 듯하다. 바위색도 먹물색이어서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그린 듯 아름답다. 사인암은 고려 말 경사와 역학에 능통했던 단양사람인 역동 우탁 선생이 사인벼슬을 지낼 무렵 여기에서 노닐었던 것을 기려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재광이 '사인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신선이 노닐 만큼 풍광이 뛰어나 암벽 아래 너럭바위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


남녀가 꼭 껴안은 모습의 울진 사랑바위

울진에서 봉화로 가는 36번 국도는 하늘로 솟은 절벽과 깊게 파인 계곡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이다. ‘산태극수태극’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비경 불영계곡이 끝나는 서면 삼근리에 이르면 길 왼편 벼랑에 바위가 하나 있다. 일명 '사랑바위'라 불리는 이 바위는 높이가 약 4m로 바위 하나에 두개의 얼굴이 있다. 멀리서 보면 한 몸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이 얼굴을 서로 맞대고 남녀가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미륵바위라고도 불리는 이 사랑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호환으로 부모를 잃은 남매가 약초를 캐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옥황상제가 병이 났으니 삼지구엽초를 구해 주면 큰 상을 주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남매는 3일 동안 정성껏 기도하고 삼지구엽초를 캐러 갔으나 삼지구엽초는 높은 벼랑 위에 있었다. 팔을 뻗은 오빠가 실수로 떨어져 죽자 누이는 사흘 밤낮을 울다 절벽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 산신령이 두 남녀를 바위로 변하게 하여 평생 떨어지지 않게 포옹하도록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통곡소리가 들리던 산은 ‘통고산(통곡산)’으로, 사랑하는 오누이가 떨어져 죽을 때 흘린 피가 묻은 소나무는 껍질과 속까지 붉은 ‘울진소나무(금강송)’가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핏빛 선명한 지리산 인월 피바위

황산에서 대승을 거둔 이성계가 도주하는 왜구를 섬멸하고자 하였으나 날이 저물자'달을 당겨' 밤늦게 까지 싸웠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 지리산 '인월引月'이다. 남천변에는 피바위가 있다. 황산대첩 당시 섬멸 당한 왜구들이 흘린 피가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는 붉은색을 띄고 있고 바위 홈에 담긴 물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짙은 선홍빛으로 붉다. 인근에 이성계가 승리를 기념하여 바위면에 자기의 이름과 장수들의 이름을 새긴 어휘각과 일제에 의해 파손된 황산대첩비이 있다.


알프스의 설산을 축소하여 옮긴 듯한 청송 백석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경주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고와리는 조선 인조 때 송탄 김한룡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시냇물이 너무나도 맑고 산세가 아름다워서 마을 이름을 '고계高溪'라 칭하였다. 고상한 뜻을 품고 세속을 초월하여 은거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 즉 고와지사高臥之士가 사는 곳이라 하여 '고와리'라 하였다. 혹은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에 고두곡이라는 장수가 왜군에게 부하를 잃고 백석탄을 지나다가 자연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동안 이곳에 머물며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고 하여 '고와동'이라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설도 있다.

계곡으로 들어가면 흰 돌무더기들이 온 계곡을 메우고 있다. 백석탄白石灘. '하얀 돌이 반짝이는 여울'이라는 뜻인 백석탄은 마치 알프스 연봉의 설산을 축소하여 옮겨 놓은 듯하다. 수만 년의 시간이 만들어 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술작품이 계곡에 무리지어 있다.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흰 바위들이 하냔 꽃처럼 피어나 선계가 따로 없다.


맑은 종소리가 나는 신비의 돌, 밀양 만어석

김수로왕이 46년에 창건하였다는 만어사가 있는 만어산은 해발 670m 정도의 산으로 특이한 돌너덜지대를 안고 있다. 조촐한 만어사 경내와는 달리 절집 앞으로는 족히 수천여개는 됨직한 크고 작은 돌들이 널브러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폭 100여 미터, 길이가 약 500미터에 달하는 돌너덜지대의 규모도 장관이지만 그 생김새도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게다가 이 검은 돌들을 두드리면 서너 개 중 한 두어 개 정도는 맑은 종소리가 난다. 이들 만어석은 다른 돌들에 비해 유독 단단하고 무겁다고는 하나 왜 종소리가 나는지는 불분명하다.


신선의 술병이 꽂힌 비경, 고창 병바위

고창읍에서 선운사로 가다보면 너른 들판에 느닷없이 우뚝 솟은 바위산들을 보게 된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의 이 바위들은 저마다의 이름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할매바위, 병바위, 소반바위, 안장바위, 선바위, 형제바위. 신선이 세상일은 저만큼 밀쳐두고 잠시 경치에 취할 만큼 독특한 생김새의 바위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아산초등학교 인근에는 신선이 술에 취해 이곳에서 넘어져 들고 있던 술병이 거꾸로 땅에 꽂혔다는 병바위와 소반이 엎어진 모양이라는 소반바위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병바위 일대는 호남 8대 명혈로 지목된 인촌 김성수의 조모인 정씨 부인의 묘가 있다. 술 취한 신선이 누워있는 형국이라는 선인취와형이라 한다.


해와 구름이 감춘 선경, 진안 운일암 반일암

운일암 반일암은 해발 1,125m인 운장산 동북쪽의 계곡으로 대불천, 주자천으로도 불린다. 깎아지른 절벽에 길이 없어 하늘과 돌, 나무만 있을 뿐, 오가는 것은 구름 밖에 없다 하여 운일암雲日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옛날 전주와 용담현을 오가는 지름길인 이곳이 너무 험하여 길을 다가기 전에 해가 떨어져 그렇게 불리었다고도 한다.

반일암半日巖은 계곡이 깊어 하루 중에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반나절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길 하나 없던 이곳도 지금은 계곡 옆으로 포장도로가 놓여 주위 풍광을 어지럽히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계곡에는 수없이 많은 집채만 한 바위가 장관을 이룬다.


쌀을 심으면 쌀이 나왔다는 부여 쌀바위

높이가 30m에 달하는 부여 저동리 쌀바위는 바위로는 보기 드물게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충남문화재자료 제371호다. 절 이름과 바위가 직접 관련이 있고 바위의 색과 형상도 그럴싸하여 더욱 관심을 끈다. 음경석․촛대바위․부처바위라고도 불리는 이 바위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노파가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위해 날마다 이곳에 와서 정성껏 불공을 드렸다. 어찌나 열심히 기도를 했는지 집에 쌀이 떨어진 사실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관세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며 말하기를 “이 쌀 세 톨을 바위에 심으면 하루 세 끼 먹을 쌀이 나올 것이다.”라 하였다.

노파가 꿈에서 깨어보니 정말 바위에서 쌀이 나왔고 얼마 후에는 그토록 바라던 손자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파는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더 많은 쌀에 욕심이 난 노파가 부지깽이로 쌀이 나오는 구명을 후벼 팠다. 그러자 구멍에서 쌀이 나오지 않고 핏물이 흘러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때부터 절 이름도 미암사米巖寺라 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인돌, 화순 핑매바위

화순 고인돌 유적은 1995년에 발견되어 1998년 사적 제410호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을 정도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화순의 대신리와 효산리에는 각각 319기와 277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화순 고인돌 유적지의 특징은 효산리와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 계곡일대 5km에 걸려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0톤 이상이 넘는 수십 기의 고인돌과 무려 200톤이 넘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인 ‘핑매바위’ 등이 있다. ‘핑매바위>’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알려져 있다. 덮개돌은 길이 7m, 두께4m, 무게는 200톤에 달한다. 현대의 장비로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그 엄청난 돌의 크기에 놀라고 만다.

마고할미가 운주골에서 천불천탑을 모은다는 이야기를 듣고 치마폭에 돌을 싸가지고 가는데 닭이 울어 탑을 다 쌓았다고 하여 그만 돌을 버리고 갔다고 해서 ‘핑매바위’라고 한다. 핑매바위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왼손으로 돌을 던져 그 구멍에 돌이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들어가지 않으면 딸을 놓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바위 위에는 사람들이 던진 돌이 수북이 쌓여 있다.


외설악의 대표 얼굴, 설악산 울산바위

울산바위는 사면이 절벽이고 높이가 950m이다. 거대한 바위가 병풍같이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다. 동양에서 제일 큰 돌산이라고도 한다. 외설악의 대표 얼굴인 울산바위는 그 위용에 맞게 전설 한 자락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물주가 천하제일의 산을 만들고자 금강산으로 온 산의 봉우리를 불러 들였다. 경상도의 울산에 있던 바위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으나 지각을 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던 울산바위는 고향에 돌아가면 체면이 구겨질 것을 염려하여 정착할 곳을 물색하다가 하룻밤 쉬어 갔던 이곳 설악산의 자리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금강산이 으뜸이라는 우회적인 전설일 수도 있으나 울산바위는 과연 설악의 명승이다.

울산바위가 설악산에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울산현감이 신흥사 주지에게 매년 세금을 받아 갔다. 세금에 대한 부담이 커지자 한 동자승이 바위를 가져가든지 아니면 바위가 설악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울산현감에게 오히려 자릿세를 내라고 하였다. 이에 울산현감이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바위를 끌고 가겠다고 하니 동자승이 속초 땅에 많이 자라던 풀로 새끼를 꼬아 바위를 동여맨 뒤, 다시 새끼를 불로 태워 '재로 꼰 새끼'처럼 만들었다. 그제야 울산현감은 하는 수 없이 포기하였다.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의 속초束草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충북 단양의 도담삼봉 전설과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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