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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자연스런 아름다움, 청산도 동촌돌담길



아름다운 돌담길, 슬로장터 아쉬움만....
청산도 마을 도보여행 ④ (청산도 동촌마을)

청산도 여행 이튿날, 아침부터 도청항이 소란스러웠다. 부두 어디선가 끊임없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슬로시티 걷기대회가 있다는 방송이었다. 더 이상 잠을 청하기도 힘들어 민박집에서 나왔다. 이른 아침인데도 부두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청산도를 나가야 한다. 많은 인파로 나가는 배가 있을까 염려되었다.


매표소로 향했다. 청산도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봄철인데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배편이 증편되어 있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직원에게 나가는 배가 있는 지를 물었다.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마저도 오후 2시 30분 이후에 겨우 몇 편만 여분의 표가 있었다. 일단은 승선권 예매를 했다. 오늘 걸어봐야 알겠지만 청산도는 어차피 다음에 한 번 더 다녀갈 요량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기로 했다. 기사님께 몇 시에 출발하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다. 조금 있으면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재차 몇 시쯤이냐고 물었더니 배가 들어오면 출발한다고만 했다. 시간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이런 시간관념은 청산도에서 몇 번이나 느꼈다. 도시인의 합리적이고 정확한 시간개념은 섬에서는 적어도 거추장스럽고 버려야 할 그 무엇일 뿐이었다.


잠시 후 배가 들어오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버스에 탔다. 버스 좌석은 이내 찼으나 서서 가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도청항을 출발한 버스는 당리로 향했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렸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버스는 한산했다. 버스 안에서 보는 섬의 풍경은 따뜻했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기사님이 물었다. 동촌이나 상서마을로 갈 거라고 했다. 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리면 된다고 덧붙여 말했다. 상서마을이 버스 종점이니 다른 곳에 내리려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버스는 온통 푸른 섬을 신나게 달렸다. 당리, 읍리를 지나 고개를 넘으니 청계리이다. 다시 신풍리와 조금 떨어진 부흥리를 지나니 버스는 이내 양지리에 도착하였다. 중흥리에 다다를 즈음 지도로 가늠해보았다. 원동리, 상서리, 동촌리가 보였다. 마을 전경을 담으려면 이쯤에서 내려야 했다.

버스는 마을을 지날 때마다 경적을 울린다. 여객선 시간표에 맞추어 도청항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는 정확한 시간 따윈 버린 지 오래였다. 멀리 다른 마을에 다다른 버스가 경적을 울리면 이웃 마을 사람들은 버스가 오나 보다 하며 승강장으로 나온다. 양지리에서 만나 한 아주머니도 그랬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기에 언제 오느냐고 물었더니 “기다리면 올 거여.” 그뿐이었다.


중흥리에서 내렸다. 오래된 우물 하나가 보였다. 바가지며, 두레박이 아직 있었다. 길 건너편 동촌마을로 향했다. 논 가운데 갈대가 듬성듬성 있는 걸 보니 늪인 줄 알겠다. 늪을 지나니 푸른 청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느긋하게 논길을 따라 걷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마늘밭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지도로 대충 감을 잡았지만 마을 이름을 정확히 알기는 무리였다. 여행자가 부르자 아주머니는 잠시 허리를 폈다.

마늘밭 가운데에 있던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마을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저건 동촌, 상서, 원동, 바닷가 마을은 신흥, 푸른 지붕을 한 교회 이쪽은 중흥, 저쪽은 양지라고 설명했다. 중흥리 마을 입구에 큰 우물이 있다고 했더니 청산도에는 마을마다 우물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상수도가 들어와서 사용을 하지 않지만 최근까지 마을 공동우물로 사용했다고 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들판은 더욱 바빴다. 모내기를 위해 모판을 정리하느라 주민들의 옷은 흙투성이다. 괜히 죄송해진다. 바쁜 농사철에 여행을 다니는 것만큼 죄스러운 건 없다. 농촌 출신이라서 그런지 농번기에 길 위에 서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마을은 돌담 깊숙이 숨어 있었다. 돌담 너머로 빼죽 얼굴을 내민 지붕들이 아니었다면 옛 성터로 여겼을 것이다. 입구에 있는 슬로장터에서 동촌마을 탐방은 시작되었다. 느리게 걸으면서 섬을 느끼는 이들에게 길 사이사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슬로장터’다. 잠시 지친 다리에 쉼을 주고 섬의 맛을 입안에 가득 채우는 곳이겠지.


청산도에서 슬로장터가 있는 곳은 이곳 동촌마을회관과 바로 옆 마을인 상서마을회관, 도락마을 해변, 서편제 복원 세트장, 화랑포 삼거리, 구장리 정자, 국화마을 회관 등지이다. 막걸리, 수산물, 간식류 등을 맛볼 수 있다.


동촌마을의 슬로장터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느티나무 아래 천막을 치고 마을주민들이 쑥이며 각종 야채들을 다듬으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장터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걷기대회가 있어 손님맞이를 위해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느긋하게 막걸리에 쑥 부침개라도 먹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청산도의 ‘슬로장터’는 깃발이 걸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양지리에 있는 청산느림보학교에서는 주말에만 청산도 고유 음식인 청산도탕을 맛볼 수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길 위의 즐거움이다. 먹으면서 느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이 청산도에 있다.



2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안쪽에 우물이 있다. 지붕을 씌우지 않은 이 우물은 마을 돌담 사이에 버젓이 맨몸을 드러내고 있다. 마을주민 한 분이 우물곁에 앉아 장화에 묻은 흙을 열심히 씻고 있다. 방금 논일을 끝낸 모양이었다. 아직도 물이 펑펑 솟아나는 우물은 얼핏 보아도 맑다. 물을 마실 수 있겠다는 여행자의 말에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가 있어 먹지 않고 채소를 씻거나 자신처럼 손발을 씻는데 이용한다고 말했다.


우물을 지나 구불구불 이어지던 돌담길 끝에 고목 몇 그루가 단정히 서 있었다. 입구의 마을 유래비에는 ‘영조 22년인 1754년에 팽나무 네 그루를 심었는데 이 나무(수령 250년)가 거목이 되어 주민들은 이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며 음력 정월 초사흘에 농악놀이로 당산제를 지내왔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나무 세 그루가 고사하여 1970년 다시 식목하여 잘 자라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영조 22년은 1754년이 아니라 1746년이다. 게다가 완도군에서 세운 안내문에는 수령 360년으로 되어 있다. 그 옆에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 310년이다. 지정일자는 1982년이다. 현 시점으로 추산하면 팽나무는 약 390년, 느티나무는 340년 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록으로 추산하면 나무의 수령은 채 300년이 되지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나무의 나이는 나무에게 맡길 뿐, 시원한 그늘에 감사하며 잠시 쉬었다. 길 가는 나그네에게 그늘 한 자락 내어주고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지켜주었으니 그깟 나이가 무슨 대수겠는가.



바람이 많이 부는 섬이어서 높은 돌담이 있음에도 이날 바람은 너무나 잔잔했다. 설혹 바람이 분다고 해도 강한 바람은 집안에 들지 못하고 돌담이 만든 틈에서 순둥이로 바뀐다. 돌담에 말뚝이 보였다. 대개 섬에서는 강한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는 걸 막기 위해 지붕을 끈으로 단단히 묶은 후 큼직한 돌을 끝에 매다는 방식인데, 이곳에서는 원래 있던 돌담에 말뚝을 박아 지붕을 동여맨 끈을 고정시켰다. 돌담을 이용한 마을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골목 어느 집에서 걸음을 멈췄다. 밖에서 얼핏 보아도 어디론가 길게 사라지는 미로 같은 돌담이었다. 무척 궁금하여 저도 모르게 담을 따라 발길이 이어졌다. S자로 휘어지던 긴 돌담길 끝에 나지막이 지붕을 인 집이 있었다. 헛기침을 했으나 주인이 없었다. 오래 머물 수 없어 돌아 나오는데 돌로 담벼락을 쌓고 그 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인 문짝이 없는 허름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뒷간이었다. 뒷간 옆에는 가축을 키웠던 흔적이 있었다. 아마 뒷간에서 인분을 먹이는 똥돼지를 키웠던 모양이다. 지금은 보기 드문 풍경이지만 옛날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뒷간 형태이다.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도니 처음의 우물이 나왔다. 높은 돌담에 층층 갇힌 우물과 노란 유채꽃이 주는 풍경이 소담했다. 상서마을로 향했다.


동촌은 청산도의 명산인 매봉산 동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과 이웃한 상서마을의 돌담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반면 이곳 동촌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이곳 돌담길은 청산도에서 가장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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