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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하얀 눈속 천년 목사고을 나주를 가다



하얀 눈 속 천년 목사 고을 나주를 가다
- 나주읍성 금성관과 목사내아

‘나주는 노령 아래 있는 도회인데 북쪽에는 금성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에 닿아 있다. 고을의 형태가 한양과 흡사하여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 영산강은 서쪽으로 무안과 목포로 흐른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치 좋은 마을이 많다. 강을 건너면 큰 들이 되는데 동쪽으로는 광주와 경계가 닿아 있고 남쪽은 영암과 통한다. 기후가 화창하고 물자가 풍부하며, 땅이 넓어서 마을이 별과 같이 깔려 있다. 또 서남쪽은 강과 바다를 통해 물자를 운송하는 이점이 있어서 광주와 함께 이름난 고을로 일컫는다.’ <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편에 나오는 나주 이야기이다.

정수루

흔히 나주를 일컬어 ‘천년 목사 고을’이라고 한다. 나주는 백제 때 발라, 통일신라 때는 금산 혹은 금성이라 불렸다. 견훤이 이곳을 발판삼아 후백제를 세운 후, 후고구려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영산강을 따라 수군을 이끌고 이곳을 점령하고 나주로 불리게 된다.


왕건은 이 지방 토호였던 오다련의 딸인 훗날의 장화왕후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게 된다. 후에 나주는 견훤에게는 압박이 되었고 왕건에게는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중요 거점이 되었다.

망화루

고려 성종 때에 이르러 나주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나주목이 되었다. 현종 때에는 왕이 잠시 이곳으로 피난을 와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중요시되는 곳이었다.


그러다 고종 33년인 1896년에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로 옮기면서 나주는 중심 고을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나주는 흔히 ‘전주’와 ‘나주’를 합해 전라도라는 이름이 생길 정도로 900여 년 동안 전남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금성관 일대

지금도 나주의 옛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더러 남아 있다. 나주의 중심공간이었던 금성관을 위시한 객사 건물과 관아를 통과하던 관문으로 옛날에는 북이 걸려 있어 시간을 알려주기도 했다는 정수루, 목사가 정무를 보던 동헌 근처에 있던 살림집 목사내아가 그것이다. 이외에도 사적으로 지정된 동문인 동점문과 남문인 남고문이 복원되어 있어 옛 나주읍성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나주읍성과 나주목관아가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시대였다. 나주목 동헌이었던 제금헌을 나주 군청사로 쓰고 이후 금성관으로 다시 옮겼다. 목사내아는 군수 관사로 사용되어 원형이 변형되었다. 금성관의 동․서 익헌과 망화루는 이때 없어지고 금성관만 남았으나 개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원형이 상실되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조선시대 관아건축 양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일대는 나주의 유명한 음식인 곰탕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밤새 내린 눈이 옛 목사 고을을 뒤덮었다. 온통 하얀 천년의 터 사이로 오래되고 깊은 냄새가 비집고 들어온다.


목사내아 옆에는 나주목문화관이 있다.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딱히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 같이 매섭게 추운 날은 따뜻한 실내 전시관이 제격이다.


처마에는 사람의 키만 한 고드름이 달려 있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 정겨워서 가까이 다가서다 흠칫 놀라 뒷걸음쳤다. 아이스크림으로 먹던 추억 속의 고드름이 아니라 맞으면 꽤 위협적인 무기로 돌변한 고드름이었다.

나주목문화관



목사내아로 가던 중 관광안내소를 들렀다. 지도를 한 장 얻고 목사내아에 대해 물으니 안내원이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1시 이후에 오란다. 시계를 보니 12시 5분이다. 혹시 내부 수리 중이어서 그러느냐는 여행자의 물음에 돌아온 답은 어이가 없었다. 점심시간이라서 관리인이 없다고 했다.

점심시간이라고 문을 닫아거는 관광지가 어디 있느냐고 되물으니 “점심은 먹어야 될 거 아닙니까?” 하며 언성이 올라간다. 이쯤에서 물러서면 인정하는 꼴이 된다. 점심을 드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관광지이면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교대로 근무하던지 아니면 최소한 홈페이지나 입구에 사전 안내문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재차 따지자 고개를 돌려버린다. 여행자도 더 이상 캐묻기 싫어 발길을 돌려버렸다.

나주읍성 전경도

문화재 보호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지금은 숙박도 가능하고 예전 1박2일 팀이 왔을 때에는 밤새 난장판을 벌이지 않았던가.

나주목사내아 금학헌

전국을 떠돈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예 문을 닫아걸면 기대라도 하지 않을 텐데. 도시는 천년인데 관광 마인드는 1년 앞도 보질 못하니 이름난 고을이라는 것도 옛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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