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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아름다움과 치밀함에 감탄하며 수원 화성을 걷다

 

 

 

아름다움과 치밀함에 감탄하며 수원 화성을 걷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2년 9개월 만에 완성했다. 채제공이 성역의 총지휘를 맡고,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감독했다. 당대의 모든 능력과 기술이 집약된 수원 화성은 완벽한 도시 성곽으로 세계 최고의 계획된 신도시로서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둘레가 약 5.7km, 높이가 4~6m로 거중기 등의 신 기재를 이용하는 등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축조해 건축사상 독보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일부 시설물이 무너지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축조 상황을 기록해 놓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1975년부터 보수․복원하여 1997년 12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고인돌

 

지난 16일, 수원 화성을 찾았다. 오후 1시를 넘긴 시각에 중앙도서관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화성을 돌았다. 긴 성벽을 따라 서장대관광안내소를 지나 서삼치, 서남암문, 서남일치, 서남이치, 서남각루(화양루), 남포루, 남치, 성신사를 거쳐 화성행궁에 이르는 길이다. 비탈진 산을 오르다 제일 먼저 맞닥뜨린 건 고인돌 2기였다. 예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인근에 채석장 유적과 함께 있었다. 수원 화성에 고인들이 있다는 건 이곳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긴 안목을 갖게끔 한다.

 

 

산비탈을 잠시 오르니 이내 성벽을 따라 산책길이 나 있었다. 솔숲이 장한 이 길은 여태까지 본 화성의 길 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웠다. 인간이 만들어낸 성벽과 자연 그대로의 숲이 조화를 이뤄 마치 예전처럼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함께했던 수원시 관계자는 이곳의 소나무처럼 아름다운 곳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솔숲에 비하면 조금은 초라한 숲이지만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종종 자기가 사는 고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비하하는 이들을 종종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곤 하는데 이처럼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이는 그 도가 조금 지나치다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제일 먼저 서남각루의 돌출된 성벽이 나왔다. 다음으론 용도서치로도 불리는 서남일치다. ‘치(雉)’라는 것은 꿩을 의미하는데 자기 몸을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 하는 꿩의 습성을 본떠서 ‘치성(雉城)’이라 했다.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물인 치는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감시하여 성곽 아래의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화성에는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서남일치, 서남이치, 남치, 북동치 등 모두 10개의 치가 있다.

 

서남일치(용도서치)

 

서남일치(용도서치)는 용도동치인 서남이치와 마주하고 있다. 용도(甬道)로 불리는 긴 성벽 길에 서남각루 양쪽으로 튀어나와 각각 서쪽과 동쪽을 감시하고 적군을 공격하던 곳이다.

 

 

성벽은 아주 견고했다. 큼지막한 바위를 생긴 모양대로 깎아 차곡차곡 올린 모양은 그 자체로 작품이다. 그렝이 공법으로 얼기설기 얹은 바윗돌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정교하여 우리나라 성벽 축조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서섬치는 옛 수원 화성의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서삼치다. 서포루와 서남암문 사이에 있는 서삼치는 화성에서 옛 성벽을 가장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 오므라들게 ‘규형(圭形)’의 방식으로 쌓았다. 순수한 성벽은 주로 돌을 쌓았고 방어시설을 설치할 때는 벽돌을 쌓았는데 서삼치는 작은 돌에 회벽을 쳤다. 성벽 위로 1m 남짓한 여장(성가퀴)은 벽돌이 대부분이고 여러 개의 총구를 규칙적으로 뚫어 놓았다. 총구의 방향도 다양하게 하여 사방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설치되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적군이 성벽에 접근하거나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뜨거운 물과 기름을 부을 수 있는 시설물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본 서삼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쌓은 성벽, 자연석을 다듬어 그렝이 공법으로 생긴 모양대로 쌓았다.

 

서남암문은 얼핏 보면 화려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암문은 성곽 깊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진 곳에 있다. 대개 문루가 없이 석축 부분에 있는 사잇문으로 적에게 노출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했는데 문을 닫으면 성벽처럼 보인다.

 

서남암문

 

서남암문은 다른 암문과 달리 유일하게 포사(건물)가 있다.

 

서남암문은 용도의 출입문으로 화성에 있는 여느 암문과 달리 유일하게 포사(舖舍)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포사는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성 밖의 위험을 성안으로 알리는 시설이다.

 

서남암문에서 내려다본 용도

 

서남암문

 

긴 용도의 끝에 서남각루가 있다. 일명 화양루인 서남각루는 서남암문에서 남쪽으로 길게 연결되어 벼랑 위에 우뚝 서 있다. 화양루(서남각루)는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을 세워 성곽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된 시설물이다. 서남각루는 서남암문 밖 용도를 따라 170m의 지점의 외성에 위치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그 전망이 아주 좋다. 화성에는 이러한 각루가 동남각루,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북각루, 이곳 서남각루 등 총 4개소가 있다.

 

서남각루(화양루)

 

용도는 수원 화성에서 일종의 외성으로 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로 170m에 달한다.

 

담을 양쪽으로 쌓아 길로 쓰이는 용도(甬道)는 170m 정도에 달하는데 마치 용이 머리를 숨긴 듯 꼬리를 감춘 듯하여 용도(龍道)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용은 곧 임금이니, 임금이 머무른 화성이 용의 몸체라면 이 용도는 머리나 꼬리쯤 되지 않을까. 몸체를 지키기 위한 외성의 하나인 이 용도는 성을 방어하는 많은 시설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중요한 시설물이었으리라.

 

수원 화성의 서쪽 산비탈에는 소나무숲이 장하다.

 

서남암문에서 남포루로 내려가는 길은 짧지만 아름다운 길이다. 비탈을 따라 층층 놓인 계단과 여장의 동선도 그러하거니와 벼랑 끝에 우뚝 솟은 남치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수원 시가지의 풍경도 일품이다. 게다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숲길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남포루에서 내려다본 수원 시가지

 

남포루는 화성에서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5개의 3층 포루(砲樓) 중 하나다. 흔히 치성 위에 지은 집을 포(砲)라고 한다. 대포를 발사할 수 있게 구멍을 뚫어 놓은 혈석을 전면에 2개, 좌우에 3개씩 놓았으며 그 위에 벽돌을 쌓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했다. 여장 너머로 흘깃 봐도 그 규모가 엄청나다. 화성에는 이러한 포루가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등 5곳이다.

 

▲ 벽돌로 만들어진 3층의 남포루

 

성벽의 사이는 대각으로 서로 어긋나게 하여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고 안에서는 각도를 조절하여 사방의 적이 보이도록 설계하였다는 것도 놀랍다. 마침 쉬고 있던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자는 계속 그 사람을 주시했으나 그는 끝내 나를 보지 못했다.

 

밖에선 안을 볼 수 없으나 성안에선 밖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됐다.

 

성벽의 사이는 대각으로 서로 어긋나게 하여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고 안에서는 각도를 조절하여 사방의 적이 보이도록 설계하였다는 것도 놀랍다. 마침 쉬고 있던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자는 계속 그 사람을 주시했으나 그는 끝내 나를 보지 못했다.

 

남치에서 내려다본 수원 시가지. 수원제일교회와 오른쪽으로 팔달문이 보인다.

 

남치에서 성벽은 잠시 끊긴다. 발 아래로 수원 시가지가 보이고 가운데쯤 팔달문이, 저 멀리 수원제일교회가 보인다. 언제쯤이면 성벽이 완전히 이어질지, 이곳에서도 갈림과 분단의 아픔이 문득 떠오르는 건 새삼스러운 것일까?

 

▲ '고향의 봄' 홍난파 노래비

 

남치 옆 언더배기에는 고향의 봄 노래비가 있었다. 처음엔 작사자인 이원수와 관련이 있나 여겼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이곳 수원 출신이다. 작사자와 작곡자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들의 친일 행적 때문인지 비석은 외로워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도 끌지 못한 채 덩그러니 언덕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성신사

 

최근에 복원된 성신사는 화성 축성의 마지막 작업으로 화성을 지켜주는 신령을 모시던 곳이다. 화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이곳이 완성되자 비로소 3여 년에 걸쳐 화성은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신사 아래 사잇길로 행궁 가는 길을 잡았다. 행궁 앞은 몰려든 인파들로 북새통이었다. 화성성역의 막바지에 성신사를 설치하면서 내린 정조의 축문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