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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구수한 남도를 닮은 석성, 남도석성



 

남도의 가락처럼 구수한 남도석성

  쌍홍교와 남문

수많은 성곽을 둘러보았지만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석성이 있다. 남도의 구수한 가락을 닮아서인지 아니면 성곽하면 웅장한 규모를 먼저 떠올리는 습성을 단박에 깨게 만드는 앙증맞은 규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남도석성은 언제 다시 한 번 꼭 찾고 싶었던 곳이었다.

 성은 아직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날의 폭설과 추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침에 깨어나니 진도의 날씨는 봄을 방불케 하는 따뜻한 날씨였다. 진도는 다리만 건너도 육지보다 따뜻하다고 하지만 봄날처럼 따스한 날씨의 변덕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남도석성에 도착하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변화가 있다면 화장실이 새로 생기고 작은 주차장이 생겼을 뿐이었다.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고 아이는 두꺼운 외투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부모의 괜한 걱정에 투덜댈 뿐이었다.

 성안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개울 위에 걸쳐진 두 개의 홍교였다. 쌍홍교와 단홍교라 불리는 이 구름다리는 규모는 작지만 편마암 자연석재를 사용하여 다리를 놓은 것으로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단홍교는 언제 놓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쌍홍교는 해방직후에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고 한다. 빼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그 투박함에 오히려 정감이 갔다.

 동문 밖

성 위를 걸었다. 아이들은 무릎까지 닿는 높은 층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벽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성 위에 오르니 성안의 마을과 잔잔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삼별초의 군선도 이 어디쯤 정박을 했을 것이다.

 복원된 관아

성안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진돗개는 낯선 이를 경계해서인지 연신 짖어대고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경쾌한 소리는 이곳에 아직 사람이 살고 있어 황량하지 않음을 말해 주었다. 밭에는 아직도 싱싱한 배추가 그대로 남아 있고 진도 겨울철 농사일의 상징인 대파도 햇빛에 녹색 빛을 더하였다.

 마을에서 만난 진돗개

성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치가 중간 중간 돌출되어 있고 동문의 성벽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너져 있었다. 동문 옆의 층계를 따라 마을에 들어섰다. 근래에 복원한 관아와 내아, 객사를 둘러보았다. 깔끔한 건물은 오래되어 수수한 마을의 민가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아 다소 생경스러웠다. 앞으로 선소와 활터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니 남도석성의 원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겠다.

 

남도석성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해안 방어를 위해 성을 쌓았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삼국시대부터 성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여 왔고 이후에 여러 차례 개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왜구 등쌀에 못 이겨 진도 사람들은 모두 섬을 떠났고 세종 19년인 1437년이 되어서야 진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의 성은 그 후에 쌓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남도석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종4품 만호를 배치하여 조도해협과 신안 하의도 해역 등을 관할하였다. 성 앞의 남도포는 동쪽의 금갑포와 함께 동쪽으로 가는 바닷길의 요지이며, 동시에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목 줄기에 해당되는 요새지로 해안 방어의 중요한 거점이다.

 남문과 옹성

남도석성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으며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원종 때 배중손이 진도에 와서 1270∼1273년에 걸쳐 몽골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다. 성의 둘레는 610m이고 높이는 2.8m~4.1m에 이른다. 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등 세 개의 문이 있으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이 뚜렷이 남아 있다.

성밖에는 바로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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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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