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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운무에 싸인 보길도의 비경, 글씐바위


 

운무에 싸인 보길도의 비경, 글씐바위


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2008년 휴양하기 좋은 섬 Best 30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가진 섬이다. 고산 윤선도의 숨결이 서린 부용동 정원을 비롯하여 섬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 40호인 상록수림으로 둘러싸인 예송리 해수욕장과 해발 195m의 보족산 아래의 공룡알해변, 낙조가 일품인 망끝 전망대 등이 있다. 통리와 중리 해수욕장을 지나면 섬의 동쪽 끝 백도리에 이른다. 잔잔한 파도가 하얗게 부셔지는 벼랑 끝에는 그 옛날 어느 늙은 유학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글씐바위(글쓴바위)는 입구부터 예전과 달랐다. 움푹 파인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던 예전의 비포장길은 사라지고 반듯한 주차장과 산책로가 새로이 조성되어 있었다. 풀숲을 헤치며 비지땀을 쏟고서야 겨우 찾아갔던 예전의 번거로움은 없어지고 가만히 산책하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다.

 

산책로가 끝나자 탁 트인 바다가 암반 위로 펼쳐진다. 오전까지 내린 비로 인해 바다에는 해무가 짙게 깔렸다. 햇빛과 바람이 들자 안개는 다시 구름으로 바뀌었다. 바위 일대의 바다는 온통 전복양식장이다.

 

서울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들은 제각기 손에 톳을 한 움큼씩 쥐고 있었다. 전복양식장으로 바다가 꽉 찬 글씐바위 일대는 청적해역이다.


“톳을 많이 따셨네요.”

“어머, 톳을 아시는가 봐요.”

“아, 예. 맛이 그만이겠는걸요.”

“이거 어떻게 먹는 줄 아세요?”

“그냥 날 것으로 먹기도 하고 살짝 데쳐 먹어도 좋습니다. 초장에 찍어 먹으면 그만이지요.”

여행자의 넉살에 고마움의 표시로 옅은 미소를 보냈다.

 

암벽을 타고 올랐다. 쇠로 만든 난간이 있었지만 비온 뒤라 제법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올라서니 세찬 바람 한 줄기가 몸을 날릴 기세로 불어왔다. 더위는 일시에 멈추었다.

 

바위 끝에 검은 먹물 자국이 배인 곳이 있다. 우암 송시열이 남긴 오언절구다. 그는 정계를 은퇴한 후 숙종에게 훗날 경종인 왕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려 83세의 나이로 유배 길에 올랐다. 제주도로 가던 도중 보길도 백도리 이곳 벼랑에 올라 시 한수를 남겼다.

 

여든 셋 늙은 몸이

멀고 찬 바다 한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나니 역시 궁하다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남녘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담비갖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


83세의 늙은 몸으로 유배를 떠나던 그의 복잡한 심경이 시에 오롯이 담겨있다.

 

2월 중순에 유배지인 제주도에 도착해서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3월 초에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압송 도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바람이 분다. 탁본으로 먹물이 어지러운 암각시문을 훑고 지나간다. 벼랑 끝에 매달려 위태하게 자라는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하다. 바위틈에는 붉은 점점 나리꽃이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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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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