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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정조의 이상, 복원된 화성행궁을 가다



 

정조의 이상, 복원된 화성행궁을 가다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성 내에 화성행궁이 복원되었다. 원래 화성행궁은 정조 20년인 1796년에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행궁은 흔히 그 기능을 보아 셋으로 분류한다. 전란을 피해 임시로 머무는 경우, 지방의 능에 참배할 경우, 혹은 휴양삼아 지방으로 나들이할 경우 왕이 머무는 곳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비운에 간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 참배와 양위 후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거동하는 일이 잦았고 마침내 수원성도 축조하게 되자 이곳은 지방 관아의 수준에서 점차 국사를 돌볼 수 있는 행궁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행궁이 완성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년 무렵이었고 무려 576칸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엄밀히 말해 화성행궁은 단지 사도세자의 능에 들르는 행궁이라기보다는 정조와 수원유수 등이 정무를 보는 조선 최대의 행궁이었다. 특히 정조는 1795년 2월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치렀다. 그러나 정조는 얼마 후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후 행궁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관공서와 민가가 들어서면서 행궁은 옛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 화성행궁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2년 1단계로 전체 576칸 중 482칸을 복원하였다. 올해까지 모든 건축물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화성행궁의 정문 격인 신풍루


집사청 일대

집사청은 국왕이 쓰는 북과 벼루 등을 보관하며 여러 가지 비품 등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좌의문

 

외정리소

외정리소는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행궁에서의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유여택

유여택은 중국의 고전인 시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정조가 화성유수를 임명하여 내려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정조의 행궁 행차 시 집무공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편소의 유여택은 유수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뒤주 체험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21일 동안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두었다. 이 뒤주는 사도세자의 옛 일을 체험하고 정조의 효심을 느껴보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경룡관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왔다.

 

장락당

정조가 헤경궁 홍씨의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며 중국 한나라 태후의 거처인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왔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다.



 

봉수당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는 악장과 자신의 마음을 읊은 시를 지어 “만년의 장수를 받들어 술을 드려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었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정조가 수원 행차 시 머물렀던 처소였다.

 

혜경궁 홍씨 회갑연 재현 장면


 

낙남헌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러 올 때 머물기 위해 지었다. 행궁터에 남아 있는 정조 당시의 유일한 건물이다.

 

노래당

노래당은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 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건물이다. 또한 정조가 순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내려와 머물려고 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운한각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건물이다. 순조가 부왕인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부왕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801년에 만들어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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