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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향기는 간 데 없고 겨울바람만, 경복궁에서



 

향기는 간 데 없고 겨울바람만, 경복궁에서


 

오랜만에 찾은 경복궁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인 궁궐에는 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사람들도 몸을 웅크리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로지 바람만이 궁궐에 머물고 있었다. 사진 자료가 없어 다시 찾았음에도 추운 날씨로 망설이기를 몇 번 끝에 경복궁에 들어섰다. 광화문은 복원 공사로 여전히 어지럽고 흥례문 앞마당은 수문장 교대로 어수선하였다.


 

경복궁은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3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 태조의 명에 따라 개국공신 정도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짓고 강녕전, 교태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그 후 경복궁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하였다.


 

<선조수정실록>등의 기록에 의해 대개 경복궁이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에 의해 불탔다고 알고 있으나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선조실록>의 5월 3일 기사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록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당시 일본 장수 오제키의 <조선정벌기>에도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진궁의 화려함을 방불케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경복궁은 왜군에 의해 불탔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흥례문을 지나 명제교를 건너면 근정문이 나온다. 조선 제일의 목조건물인 근정전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근정전 바닥돌인 박석은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 이는 표면을 고르지 못하게 하여 신하들이 항상 아래를 보고 걷도록 하였고 햇볕으로부터 왕의 눈이 시리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근정전 바닥과 기둥에는 쇠고리가 있는데 근정전에서 의식을 할 때 햇볕과 비를 피하기 위해 차양막의 줄을 연결시켜 사용하기 위해서 설치하였다.


 

근정전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의 상징이다.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낮은 기단을 만들고 2층의 건물을 올렸다. 물론 내부는 층 구분이 없는 하나의 통층이다.

경복궁 월대에는 청룡, 현무, 주작, 백호 등의 사신과 12지신을 새겨 놓았다. 또한 향로와 비슷한 세 발 솥인 ‘정’과 하늘의 화마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서 달아나라는 뜻으로 큰 독인 ‘드므’가 놓여 있다. 근정전 내부에는 홍익인간을 표방하며 임금의 후광과 같은 그림인 일월오악도가 있다.


 

열을 지어선 회랑에서 잠시 바람을 피하고 사정전으로 향했다. 사정전은 왕의 공식적인 집무실인 편전이다. 사정전은 온돌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온돌을 갖춘 좌우의 만춘전과 천추전 등의 보조 편전을 두어 사계절 이용 가능하도록 하였다.

사정전에서는 매일 새벽 3~5시 사이에 ‘상참’이라는 어전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세종은 이 상참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고 한다. 상참은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대조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천하에 왕 노릇하기도 쉽지는 않은가보다.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던 곳을 침전이라고 한다. 강연전과 교태전은 각기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강년전과 교태전에는 다른 전각에서 볼 수 있는 지붕의 용마루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곳이 다른 건물보다 존엄하고 격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여 차별성을 두었으며 세자나 왕손들을 생산하는 중요한 공간으로서 임금의 머리 위에 왕을 상징하는 또 다른 용이 있다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간 음양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잉태하는 곳에서 용마루가 그 흐름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옮겨다 인공으로 단을 쌓아 계단식 정원을 만들고 아미산이라 이름 지었다. 가운데 단에는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낸 육각형 굴뚝 4개를 나란히 세웠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인 1865년에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교태전 옆문을 빠져 나가면 자경전 일원이다.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정왕후 조씨인 조대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이곳에 모셨다. 자경전은 온돌방이 많아 10개의 굴뚝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으로 만들었다. 자경전의 십장생 무늬 굴뚝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경복궁에서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은 단연 경회루이다. 큰 연회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며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장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흥선대원군이 1867년에 재건하였다.

경회루에 얽힌 재미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세종 때 교서관에 근무하던 구종직이란 자가 숙직을 서던 어느 밤에 경회루가 보고 싶어 몰래 숨어들어 풍치를 즐기다가 왕과 마주치게 되었다. 미관말직이지만 경회루의 풍광이 너무 보고 싶어 죄를 저질렀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세종은 풍류를 아는 자라 여겨 노래를 불러 보게 하였다. <춘추>까지 외우게 한 왕은 다음날 그를 불러 종5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경회루의 멋진 풍광도 살을 에는 칼바람에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발길을 궁궐 깊숙이 옮기니 집옥재 일원이다. 집옥재는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 풍의 건물이다. 밖에서 보면 단층이나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왼쪽으로는 청나라 풍의 팔각 누정인 팔우정이 있고 오른쪽에는 온돌방 형식의 조선식 건물인 협길당이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경복궁은 사실 창덕궁에 비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다. 실제 조선의 왕들도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머물기를 더 좋아하였다. 중국의 자금성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궁궐이지만 규모가 주는 삭막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복궁 후원 영역을 청와대가 차지하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을 터이지만 그나마 향원정이 있어 경복궁은 그 삭막함을 조금은 덜 수 있다.

경회루가 남성적인 웅장한 미가 있다면 향원정은 아늑한 여성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처럼 남쪽으로 다리를 놓았다. 건청궁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왕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꽃향기가 멀리까지 퍼지는 곳인 향원정에는 향기는 간 데 없고 세찬 겨울바람만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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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