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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태조 이성계 초상화를 봉안한 전주의 심장, 경기전


 

태조 이성계 초상화를 봉안한 전주의 심장, 경기전


   경기전 전주시의 중심인 풍남동 중앙공원 안에 있다.


전주시의 중심인 풍남동에 중앙공원이 있다. 수만 평에 달하는 녹지공간은 전주한옥마을과 이어져 명실상부하게 전주를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이 중앙공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공원의 상징인 곳이 바로 경기전이다. 사람들도 이 일대를 중앙공원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흔히 경기전이라고 부른다.


  내삼문 경기전은 외삼문, 내삼문, 정전까지 일렬로 배치되어 엄숙함과 권위를 나타내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기전 일대의 외삼문, 내삼문, 정전이 보인다. 오랜 고목들에 둘러싸여 있는 경기전은 웅장하지는 않지만 엄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주요 건물이 모두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가장 깊숙한 정전까지 들여다보인다. 게다가 길게 이어진 전돌을 깐 복도를 중심축으로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권위와 질서, 엄숙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건물배치라 할 수 있겠다.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으면서도 왕실건축으로서의 경건함과 권위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전과 양 옆으로 회랑을 두고 있어 최고의 사당임을 나타내었다.


  정전 규모는 큰 편이 아니지만 전돌 복도가 나 있고 건물이 좌우대칭을 이루어 권위와 엄숙성이 돋보인다.


정전을 위시한 경기전의 건물은 하나같이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고건축에서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할 때 맞배지붕을 종종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진 정전 좌우의 회랑에는 조선조 역대 왕들의 어진이 있다.


경기전의 본전 안에는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왕조 왕들의 어진은 상당수 제작되었으나 현존하는 유품은 영조, 철종, 익종 그리고 이곳 경기전의 태조 어진 등 네 폭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 태조의 경우 15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숭전, 그리고 이곳 경기전 등 나라 곳곳에 진전이 마련되어 26점의 어진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정전 내부 정전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보물 제1578호


초상화는 가로 150㎝, 세로 218㎝로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고종 9년인 1872년에 낡은 원본을 태워 묻고, 서울 영희전에 있던 태조 어진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모사본이다.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 제931호)


  태조 어진 이 어진은 고종 9년인 1872년에 기존의 낡은 어진을 불태우고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으로 유일하다. 보물 제931호


정전 옆문을 나오면 실록각이 있다. 근래에 복원한 건물이여서 옛 맛은 없지만 조선시대 전기 4대 사고의 하나였던 전주 사고의 역사를 반추하고 서책을 보존하기 알맞은 옛 실록각의 구조를 짐작해볼 수 있다.


  실록각 옛 전주사고터 자리에 다시 복원한 2층 다락집 건물로 서책을 보관하기에 알맞은 구조임을 엿볼 수 있다


경기전의 남동쪽 담장 부근에 이르면 예종의 태실 및 태실비가 자리하고 있다. 고승들의 부도와 흡사한 태실 및 태실비는 원래 완주 태봉산에 있던 것을 197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예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 원래 완주 태봉산에 있었는데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태실비에서 다시 안쪽의 대숲으로 길을 잡았다. 낮인데도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대숲에서 잠시 쉬었다가 정문을 나왔다. 앞마당에는 얼핏 지나치기 쉬운 하마비를 두 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었다. 여느 하마비와는 달리 꽤나 정성을 기울였을 하마비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매화나무 실록각 앞의 매화나무가 특이하다. 봄이면 경기전 일대는 매화향이 가득하다고 한다.


사적 제339호인 경기전 정전은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명명하던 것을 세종 22년인 1442년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14년에 중건했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 경기전의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