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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천년의 수수께끼, 천불천탑 운주사



 

천년의 수수께끼, 천불천탑 운주사

구층석탑 높이 10.7m로 운주사 석탑 가운데 가장 높으며 운주사 입구에 있다. 커다란 바윗돌을 바닥돌로 삼았다. 보물 제796호.

운주사를 다시 찾은 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에 대한 비답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었던 운주사의 불상과 석탑들. 우리네 삶과 너무나 닮은 운주사였지만 마치 꿈속에서 보았다는 착각에 그리움이 짙어져 다시 이곳을 찾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운주사의 수수께끼가 영원히 풀리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한바탕 꿈이 아닌 현실에서 미륵세상이 도래하리라는 그 소망을 쉽게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운주사 일원 창건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 중기에서 말까지 매우 번창했다가 정유재란으로 폐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타리도 담장도 없이 그 흔한 일주문조차도 보이지 않던 운주사에 오늘 와보니 일주문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천불천탑도장’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보인다. 산불이 난 운주골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맞서고 있었다. 변함없는 건 석탑과 석불들, 그저 햇볕을 쬐고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비슷비슷한 생김새의 무표정한 불상들이다.


원형다층석탑 높이 5.71m로 호떡이나 도덧을 닮았다. 보물  제798호.

구름이 머무는 곳이었던 운주사
雲住寺가 배를 움직이는 운주사運舟寺로 된 데에는 도선국사의 풍수비보설과 관련이 있다. 도선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의 중심에 무게가 실려야 배가 안정된다고 하여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는 산이 많은 영남에 비해 호남은 산이 적으므로 배가 동쪽으로 기울어 일본으로 땅의 정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룻밤 만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운주사 유적들은 12~13 세기의 양식으로 보고 있어 도선이 살던 9세기와는 연대가 맞지 않다.


석조불감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으로,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보물 제797호


이외에도 신라의 고승인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주는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마고할미가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한편 운주사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그렇게 되었던 것은 미륵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던 조선 후기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운주사를 유명하게 한 것은 황석영의 <장길산>이라는 소설인데 천불천탑과 와불 이야기로 이곳을 미륵신앙의 성지로 만들었다. 물론 이들 미륵신앙은 운주사 불상들의 파격적이고 민중적인 모습에서 민중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를 기원하며 천불천탑을 염원한 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발형다층석탑 대웅전 뒤편의 탑으로 일반적인 탑의 상식을 초월한 이형탑이다. 마치 주판알같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2호

운주사는 이처럼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중기에서 말까지 매우 번창했다가 정유재란으로 폐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돌부처 70구와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으나,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까지는 천여 구의 불상과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과 들에 흩어져 있는 70여 구의 돌부처들은 수십㎝에서 10m 이상의 거대한 돌부처까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불상의 지방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 또한 그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3층·5층·7층·9층 등 층수도 다양하다. 둥근 공 모양의 원형탑이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한 원판형탑 등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다. 또한 탑들의 몸돌에는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 또한 유래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거북바위교차문칠층석 높이 7.17m로 거북바위라 부르는 다소 경사진 암반에 있다. 탑의 몸돌에 X자문이 새겨져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

운주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누운 부처인 와불이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불상은 실제로는 와불이 아니라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으로 이 부처가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후대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불상이 애초의 계획대로 세워졌다면 운주사의 중심불이 되었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북바위 아래의 불상들 불상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불상들이 반복되는 데서 강렬함과 역동성이 느껴진다.

운주사를 제대로 보려면 입구의 구층석탑에서 골짜기 안쪽의 항아리 모양의 발형 다층석탑까지의 석탑과 불상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면 된다. 다소 두서없는 운주사의 전체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보려면 대웅전 뒤편 산 위의 공사바위를 올라야 한다.

운주사 천불천탑 불사를 할 때 총감독이 이 바위에 앉아서 내려다보며 지시를 했던 곳이라 하여 공사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 이곳에 서면 운주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사바위를 내려서면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과 부부처럼 보이는 불상들이 보인다.

 

와형석조여래불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으로 이 와불이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

다시 대웅전으로 내려와 거북바위를 오르면 암반을 기단으로 삼은 칠층석탑에 눈에 들어온다. 거북바위 아래에도 불상 몇 기가 무리지어 벽에 기댄 채 서있다. 운주사의 불상은 개체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모양의 친근한 불상들이 반복되는 데서 어떤 강렬함과 역동성이 느껴진다. 와불 오르는 길에 우뚝 서있는 불상 한 기가 다소 생뚱맞기도 하지만 천년의 세월을 누워온 와불을 보고나면 이내 반가움에 빠져든다.


칠성바위 북두칠성의 방위각과 밝기가 흡사하여 칠성바위라 불리며 칠성신앙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와불에서 거북바위의 오른쪽 길을 잡으면 칠성바위에 이르게 된다. 7개의 원반형 석재는 얼핏 보면 7층 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배열 상태와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과 밝기와 매우 흡사하여 칠성바위라 불리며  칠성신앙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칠성바위를 내려오면 넓은 잔디밭이 나오는데 사실 이곳이 옛 운주사 터였다. 오랜 세월 따가운 햇볕과 비바람에도 견디어 온 운주사의 불상과 석탑들에 경외감마저 든다. 하나하나의 돌부처에 새겨진 기원과 소망이 온 골짜기를 메우고 있는 듯하다. 운주사는 사적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사바위에서 내려다본 운주사 일대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