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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절은 망했지만 걸작품을 남긴 고달사지


 

절은 망했지만 걸작품을 남긴 고달사지


절터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는 거대한 둥치의 나무가 있다.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고달사지를 처음 갔을 때는 노란 산수유와 붉은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봄날이었다. 절터로 가는 입구만 제외하고 삼면이 야트막한 야산에 둘러싸여 아늑했던 폐사지를 그 후 여행자는 잊지 못하였다. 절은 망하고 터만 남은 곳, 폐사지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고 언제 산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이었던 고달사는 전성기인 고려시대에는 사방 30리가 절 땅이었고 수백 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었다고 한다.


 석불대좌(보물 제8호), 높이 1.57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 와보니 발굴로 어수선했던 지난날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절터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절터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는 거대한 둥치의 나무가 있어 오고가는 길손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원종대사 혜진탑비(보물 제6호)의 귀부와 이수, 이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휑한 폐사지를 멀리서 보면 간혹 눈에 띄는 석조물 외에는 이렇다 할 볼거리는 없다. 그러나 미리 실망을 할 필요는 없다. 폐사지가 주는 그 스산함이 오히려 고즈넉함으로 다가오니 한때 선풍을 떨쳤던 산사를 그리며 산책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다.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발톱
  

고달사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거대한 석조물인 석불대좌(보물 제8호)를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생긴 것으로 알려진 석불대좌는 불상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대좌의 장중함으로 보아 불상 또한 규모나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가 1.57m나 되는 거대한 대좌는 상, 중, 하의 3중으로 겹쳐 놓았으며 앙련과 복련 등의 연꽃무늬 조각이 빼어나다. 이 대좌가 사각형의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고달사지 전경,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고 언제 산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석불대좌에서 20m쯤 오르면 원종대사 혜진탑비(보물 제6호)의 귀부와 이수가 있다. 이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듬직한 거북등과 벌렁거리는 코, 치켜 올라간 눈초리, 땅을 꽉 누르고 있는 발과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발톱을 가진 귀부는 견고함과 동시에 사실감을 준다.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함을 더해주고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힘과 권위를 과시하는 원종대사 부도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라같이 생긴 앙증맞은 귀부가 하나 있어 눈길을 끈다.


원종대사 부도(보물 제7호),  높이가 2.5m로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말끔하게 정리된 절터를 뒤로 하고 산을 오르면 원종대사 부도(보물 제7호)가 나온다. 높이가 2.5m인 부도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원종대사가 입적한지 19년 만인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에 세워진 부도로 부도비와 더불어 원종대사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전체적으로 수법이 섬세하고 우아한 것으로 평을 하고 있으나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는다. 바로 고달사터 맨 위에 자리하고 있는 부도 한 기 때문이다. 이 부도를 보고나면 원종대사 부도의 조각과 균형이 엉성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우리나라에 남은 부도 중에 가장 크며 고려 초기 부도의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높이가 3.4m에 달하는 고달사지 부도는 원종대사 부도와 비슷한 팔각원당형이나 바닥의 형태가 팔각으로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부도를 보고 있으면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표면에는 입체적인 두 마리의 거북과 역동적인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팔각의 몸돌에는 문짝과 창살문, 사천왕이 번갈아 조각되어 있다. 사리와 경전이 들어있으니 열쇠로 잠가 보호를 하고 사천왕이 지킨다는 의미이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지붕돌 처마 밑에 새긴 비천상이다. 긴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모습의 비천들은 이미 천상의 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고달사지 부도는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으로 국보 제4호이다. 이 부도는 우리나라에 남은 부도 중에 가장 크며 고려 초기 부도의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붕돌 처마 밑에 새긴 비천상과 창살문
  

고달사지에는 이외에도 보물 제282호인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이 있었으나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절터에 있지 않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5분 정도 걸어가면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된 석실묘가 하나 있다. 시간이 된다면 고려시대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이 석실묘까지 답사한다면 좀 더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절은 망했지만 남긴 유물은 하나같이 걸작품인 고달사지는 폐사지 답사의 백미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었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5분 정도 걸어가면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된 석실묘가 나온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