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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애불

국보 반가사유상 직접 봤더니

 

 

 

 

 

국보 반가사유상 직접 봤더니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그 황홀한 전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의 전율이 여전히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주위를 맴돌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아시아의 불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진귀한 전시라고 해서 박물관을 찾았었다. 그러나 나중에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친견하고 나서는 모든 전시가 이 반가사유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동안 그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지난 9월 25일부터 11월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는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등장한 시기부터 중국, 베트남, 한국, 일본 등의 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700년경까지의 우수한 불교조각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특별전이었다.

 

 

 

사실 불상은 붓다의 생존 당시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붓다 입멸 후 5, 6백년이 지나서야 인도에서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초기 불교에서는 부처의 유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굳이 부처를 인간의 형상으로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원 전후에 간다라와 미투라 지방에서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이 두 지역의 불상을 직접 보니 역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중국의 불상을 감상했다. 후한 대에 불교가 전래된 중국의 불상 제작은 5호16국(304~439)부터 수나라(581~618)로 이어진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에 시작된 우리의 불상 제작은 중국 남북조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다가 6세기부터 한국적인 특징으로 발전했으며, 이후 한반도의 불상은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좌)와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우)

 

아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사랑받는 불상은 반가사유상일 것이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반가사유상을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은 엄청났다. 우선 그 크기에 놀라게 된다. 손바닥만 하거나 팔뚝 하나 정도의 크기로만 여겼었는데, 실제론 높이가 1m에 가까운 엄청난 크기였다.(이에 비해 도쿄국립박물관의 금동반가사유상은 높이 16.3㎝의 아담한 불상이다.)

 

 

 

반가사유상은 실존에 대해 사유하는 인물을 묘사하던 인도의 전통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오면서 본격적인 예배상이 되었으며,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두 반가사유상은 한국 불교 최고의 걸작임에 틀림없다.

 

 

 

반가사유상은 흔히 보살사유상이라고도 한다. 대좌 위에 걸터앉아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그 무릎 위에 얹는 일종의 반가좌법이다. 바른 팔꿈치는 무릎을 짚고 그 손가락으로 바른 뺨을 고인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정식 이름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의 작품인 국보 78호와 7세긴 전반의 작품인 국보 83호가 있다. 굳이 둘 중에서 으뜸을 꼽자면 83호가 제작기술이 더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

 

1912년 일본인 고미술상에게 2600원(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30억 정도)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 83호와 일본인 수장가가 1912년 데라우치 총독에게 상납하여 1916년 그가 귀국 전에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한 78호, 이 두 불상은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경을 겪어왔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그동안 두 반가사유상은 교체 전시되다가 11년 만에 한자리에서 만났다고 한다. 전시실의 마지막 방에서 두 반가사유상과 마주했을 때의 그 가슴 벅차오르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