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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풍류와 멋

다락이 있는 2층 정자를 보신 적 있나요?

 

 

 

 

 

 

은행나무 아래 다락방이 있는 2층 정자. 학포당

 

 

 

 

 

▲ 전남 화순 이양역

 

“택시 한 대 불러 주시오.”

 

할아버지의 말에 역무원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전화기를 들더니 택시를 불렀다. 이번에는 여행자가 쌍봉사 가는 버스시간을 물었다. 역무원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잠시 기다리라며 인터넷 검색을 시작한다. 결국 출력까지 해서 버스시간을 안내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버스가 오기까지는 두 시간이나 넘게 기다려야 했다.

 

▲ 이양역에서 쌍봉사 가는 택시를 타다.

 

“택시로 가는 게 나을 거요.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다 만 원이면 간다고 하니... 버스로 가면 나중에 나오는 시간도 애매하지 않겠소이.”

 

두 명이서 교대로 근무한다는 이양역의 고상엽 역무원의 말이다.

 

 

쌩쌩 달리는 4차선 도로도 잠시, 택시는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달리는데 왼편으로 제법 옹골찬 기와집이 보였다. 얼핏 봐도 남달랐다. 기와집 돌담에 둘러싸인 족히 500년은 넘었음직한 거대한 은행나무에 시선이 멎었다.

 

 

 

“잠시만요.”

 

여행자의 외침에 기사는 차를 세웠다. ‘학포당이 아닌가.’ 예전에 쌍봉사를 두어 번 왔다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학포당을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사도 학포당은 처음 듣는다며 논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물어보더니 학포당이 맞다, 며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학포당에는 족히 수령 500년은 되었음직한 엄청난 크기의 은행나무가 있다.

 

 

좁은 농로 끝을 아슬아슬하게 차를 모는 기사의 운전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입구에서 걸어가겠다고 해도 끝까지 고객을 모신다는 그의 직업의식은 투철했다. 공터에 내려 삼문을 들어서자 고졸한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듯한 정자 옆으로 거대한 은행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침 기사 분도 집 구경이나 하자며 들어와서 은행나무 앞에 섰다. 기사 분의 덩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은행나무는 눈짐작으로 봤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크기였다.

 

학포당(전남 기념물 제92호)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이 사용하던 서재였다.

 

 

학포당(전남 기념물 제92호)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이 사용하던 서재였다. 양팽손은 능성현(능주면)에서 태어나 1510년(중종 5)에 조광조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했다. 1516년(중종 11)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교리로 재직하던 중 1521년(중종 16)에 기묘사화를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곳 고향에서 학포당을 짓고 책을 읽으며 지냈다. 지금의 건물은 192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학포당은 여느 정자와는 달리 위층에 다락을 둔 특이한 구조를 지녔다.

 

 

학포당은 여느 정자와는 다른 구조를 보여준다. 건물 중앙에 방을 배치하고 그 주위 앞면과 양 옆면의 삼면에 툇마루를 내었는데 다시 가운데 방 뒤로 작은 골방이 있었다. 게다가 위층에는 사방으로 세살창을 낸 높다락 다락까지 버젓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당혹케 한다. 일반적으로 쉼과 수양의 공간인 정자는 간단한 구조임에 비해 학포당은 여러 가지 저장과 갖춤의 공간까지 둔 실용성을 갖춘 살림집의 면모까지 일부 보인다. 건물의 특이한 생김새와 실용성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

 

                            학포당은 여느 정자와는 달리 위층에 다락을 둔 특이한 구조를 지녔다.

 

 

“만 원입니다. 아휴, 별말씀을 다 하슈. 저도 덕분에 학포당도 알고 구경 한번 잘했소.”

 

중간에 학포당에 들르는 바람에 꽤나 지체 했음에도 기사는 개의치 않았다.

 

“좋은 길 되시오.”

 

그 한마디가 붉은 연등보다 더 따뜻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