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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남도 청보리밭에서 맞닥뜨린 두 보물. 경전선 800리

 

 

 

 

 

 

 

남도 청보리밭에서 맞닥뜨린 두 보물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29〕 풋풋한 남도의 봄, 예당역에서 조성역까지 걷다

 

 

 

 

 

 

 예당역을 출발한 기차가 청보리밭을 가로질러 조성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구불구불한 경전선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쭉 뻗은 기찻길이 예당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 김종길

 


당혹스러웠다. 어디를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기차표는 보성까지 끊었다. 기차는 이미 섬진강을 건너 남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상, 옥곡, 광양, 순천 다음이 벌교다. 차창 너머로 폐역이 된 원창역이 보였다. 이쯤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순천과 보성 사이에 있는 역은 벌교, 조성, 예당, 득량 네 곳이다. 그중 벌교는 갔었고 나머지 가보지 않은 세 역 중에서 결정을 내려야했다.

그러나 기차가 조성역에 섰는데도 미적거리다 내리지 못했다. 이제 남은 곳은 예당과 득량,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예당역에서 내렸다. 경전선 여행도 거의 막바지라 그동안 가지 못한 역을 고르는데 이날따라 유독 떠오른 곳이 없었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 습관이 부른 작은 화였다.

남도의 한갓진 간이역, 예당역의 나른한 봄날

승강장에 내린 손님은 여행자 혼자였다. 할머니 두서너 분이 기차에 오를 뿐, 승강장은 다시 봄날의 고요함으로 남았다. 온통 유리로 된 역 건물이 이런 한갓진 시골에선 낯설게만 느껴진다. 마치 석빙고처럼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텅 빈 대합실 너머로 혼자 있는 역무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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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도 예쁜 예당역은 예장산의 이름을 따서 '예당역'이라 했다. 조성역과 득량역 사이에 있다.
ⓒ 김종길

 


예당역. 왠지 모르게 이름이 끌린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정감이 가는 그런 이름이다. 이곳은 원래 관 터(관공서가 들어설 자리)가 될 자리라 하여 '관기'라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예장산의 이름을 따서 '예당리'라 했고 역명도 '예당역'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예당은 리 단위의 마을인데도 중고등학교까지 있을 정도로 꽤나 큰 마을이다. 1922년 7월 광주 송정까지의 기찻길이 나면서 임시승강장으로 있다가 1941년 2월 역무원이 배치되고 1966년 12월 보통역으로 승격됐다. 지금의 역사 모습을 갖추게 된 건 2001년 12월이다.

일단 이웃한 조성역까지 걷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집에서 가져온 보성군 관광지도를 꺼냈다. 조성역까지 그냥 걷기보단 중간 중간 들를 만한 곳이라도 찾을 요량이었다. 지도 한쪽으로 작게 표시된 문화재 두 곳이 보였다. 봉능리 석조인왕상과 우천리 삼층석탑이었다. 마치 보물을 찾은 듯 반가웠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여행길에 이 두 유물이 훌륭한 동선을 만들어줄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역무원에게 봉능리 가는 길을 물었다. 석조인왕상은 모르는 눈치였고 다만 전화번호부를 꺼내더니 봉능리에 봉산, 신방, 청능 등의 마을이 있으니 버스를 타라고 했다. 기사에게 봉능리라 하면 안 되고 봉산이나 신방, 청능 마을 중 아무 이름이나 대면 된다고 했다.

일단은 역사를 빠져나와 강아지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한산한 마을길을 걸었다. 역무원이 시키는 대로 오른쪽 길로 접어드니 시원스런 4차선 2번 국도가 나타났다. 버스승강장에서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도로 끝에 걸쳐 있는 육교까지 가서 다시 길을 물으라고 했다. 버스도 있지만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 말에 걷기로 했다.

갓길을 걷다 쌩쌩 달려오는 차들에 흠칫 놀라길 몇 번, 도로 너머에 있는 농로를 발견했다. 따가운 봄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나른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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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과 득량 일대의 들판은 이맘때쯤이면 온통 청보리밭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보리 생산량이 가장 높은 곳 중의 하나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 김종길

 


득량만을 끼고 있는 남도의 들판엔 벌써 보리가 쑥쑥 올라와 패기 시작했다. 멀리 득량만 방조제가 손에 잡힐 듯 아스라이 멀어진다. 딱히 정해진 곳도 없어 봉농리 석조인왕상이나 볼 요량으로 봉산마을로 길을 잡았다. 그냥 2번 국도를 따라 걷기에는 아무래도 심심하다. 농로를 따라 드넓게 펼쳐진 청보리밭을 가로지르는 철길에 섰다. 그러곤 넘실대는 보리밭을 가로지르는 철길에서 풍경이 돼 줄 기차를 기다렸다.

한 삼십여 분 기다렸을까. 멀리서 '빠아~앙' 하며 기적소리가 울린다. 예당역을 출발한 기차가 어느새 눈앞에 나타났다. '아, 이렇게 빨랐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로 불리는 경전선 무궁화호 완행열차가 이곳에선 순식간에 지나갔다. 구불구불한 경전선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쭉 뻗은 기찻길이 예당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곳 조성과 득량 일대의 들판은 우리나라에서 보리 생산량이 가장 높은 곳 중의 하나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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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당역을 출발한 기차가 청보리밭을 가로질러 조성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구불구불한 경전선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쭉 뻗은 기찻길이 예당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 김종길

 


논두렁에 덩그러니 서 있는 봉능리 석조인왕상

철길을 건너 봉산마을로 향했다. 마치 광개토대왕비처럼 커다란 마을 표지석이 이색적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표지석은 마치 거석문화의 표본처럼 저마다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옆으로 두 번째 거대한 저수지가 나왔다. 마을은 신방저수지 옆 안쪽에 있었다. 마을 초입에 제법 번듯한 정자가 있고 유래비가 있어 이 마을이 예사마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저수지 옆 밭을 매고 있는 아주머니께 석조물의 존재를 물었으나 처음 듣는 얘기라 했다. 지도로 대충 가늠해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을회관 뒤에 오르니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너른 벌판이 펼쳐지더니 그 끝으로 득량방조제가 보였다. 탁 트인 들판 풍경이 푸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 어디쯤일텐데.'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담장 너머로 인기척이 났다. 허리가 조금 구부정한 중년의 사내에게 인왕상의 존재를 물었는데 나중에는 석조물, 불상, 부처님 등 여행자가 설명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대어야했다. 그제야 사내는 교회 맞은편 비닐하우스 뒤로 보이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저 짝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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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마을 정자나무에서 내려다본 예당평야와 득량만
ⓒ 김종길

 


소나무를 목표삼아 비닐하우스 옆으로 난 길을 걸었다. 묵정논 끝에 소나무는 있었으나 기대했던 인왕상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어른 키의 갑절은 족히 되는 아찔한 논두렁 아래로 목을 쑥 내밀었더니 그제야 석조물이 보이는 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길도 없는 논두렁 절벽을 풀을 엮어 잡은 채 내려갔다. 두어 시간 만에 봉능리 석조인왕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대개 인왕상하면 사찰이나 불상들을 지키는 불교의 수호신을 말하는 것으로 사찰의 문이나 탑, 승탑 등에 장식한다. 이곳 인왕상은 마모가 심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는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얼굴만큼은 강렬했다. 손에 지팡이나 방망이를 쥐고 있는 다른 인왕상과는 달리 권법자세만 취하고 있는 벌거벗은 모습이다. 비록 닳았을지언정 사실적인 상체와는 달리 하체는 형식화된 느낌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인왕상은 대개 탑의 부조로 조각되는 다른 것과는 달리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주위에는 탑의 부재들이 한곳에 모아져 있고, 기와 편들이 더러 보여 이곳이 옛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인왕상이 있는 자리를 보면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쳐 있고 앞으론 작은 들판이 있고 다시 작은 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어 작은 절이 설 자리로는 마땅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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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능리 석조인왕상은 논두렁에 덩그러니 버려진 듯 무심하게 들판 가운데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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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능리 석조인왕상을 찾느라 반나절을 헤맸다.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나 그 인상만큼은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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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불상 하나를 찾기 위해 반나절을 헤맨 셈이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논두렁에 덩그러니 버려진 듯 무심하게 서 있는 문화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4호)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중에 찾았던 우천리 삼층석탑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을 입구나 국도변에 안내문이라도 있었다면 이토록 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 공터에 자리한 보물 석탑의 위용

논길을 걸어 나오니 농부가 트랙터로 논을 갈고 있었다. 우천리 삼층석탑 가는 길을 물으니 저 아래 국도 옆 농로를 따라가서 산모롱이를 돌면 왼쪽으로 마을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탑이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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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능리 석조인왕상 앞 들판에선 농부가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었다. 이 농부 덕분에 우천리 삼층석탑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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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능마을의 정자는 주민 강원태 씨가 땅을 내놓고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정자를 지었다. 정자 안에는 마치 살림집처럼 냉장고, 밥솥, 텔레비전, 선풍기 등이 있었다.
ⓒ 김종길


청능 마을을 지나는데 마을 초입에 역시 정자가 있다. 근데 그 정자의 생김이 예사롭지 않다. '청송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정자 안에는 마치 살림집처럼 냉장고, 밥솥, 텔레비전, 선풍기 등이 있었다. 정자를 세운 이력도 특이했다. 예전 마을에는 땀을 식힐 만한 공간이 없었는데 주민 강원태 씨가 땅을 내놓고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정자를 지었다고 비에 적혀 있었다. 길손을 흐뭇하게 했다.

산모퉁이를 돌자 농부의 말처럼 마을이 보였고 그 아래로 탑이 보였다. 예전에 논이었을 마을 앞 공터에 자리한 탑은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물 제943호다. 멀리서도 제법 커 보이는 탑은 삼층으로 비록 외로이 서 있더라도 그 위용만큼은 대단했다. 이곳에 탑이 선 연유는 알 길 없으나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벌교 징광사에 딸린 부속 절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어 오랜 세월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은 자존심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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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능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산모롱이를 돌자 청보리밭 너머 우천리 마을 가운데로 삼층석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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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천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물 제943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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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파해도 사람냄새 물씬 나는 남도 조성오일장

청보리밭 너머로 멀리 조성면 소재지가 보였다. 소재지 가는 길을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성면에 들어섰을 때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순천, 벌교 가는 2번 국도와 국토의 막내 고흥반도로 쑥 빠지는 77번 국도다.

국도 2호선을 넘자 면소재지다. 농협 앞에 옷가지를 늘어놓고 파는 난전이 있는 걸로 보아 장날인 모양이다. 3일과 8일에 열리는 조성오일장이었다. 오후 두 시가 넘었으니 이미 파장일 터, 아주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사내가 가리키는 대로 바로 건너편 장터로 갔다. 장터는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건물엔 거의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장꾼들은 짐 챙기느라 분주했다. 간혹 아직 자리를 접지 못한 장꾼들이 있었는데 대개 생선과 해산물을 파는 어물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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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천리 삼층석탑에서 보니 청보리밭 너머로 멀리 조성면 소재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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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시골장은 일찍 서고 일찍 파하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음에도 걸어서 느릿느릿 오다 보니 다 늦은 오후의 파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보시오. 우리 사진 좀 찍어주소."

얼굴이 불콰한 사내 셋이서 다가온다. 한눈에 봐도 넉살 좋게 생긴 중년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방송국에서 왔소이. 이 성님이 이곳 토박이인디, 물어볼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시오."

예당에 산다는 사내가 반죽 좋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이곳 조성면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이혁재(60) 씨는 예전 번성했던 조성장을 기억했다. 당시만 해도 인근 고흥군 대서에서도 조성장에 올 정도로 시장은 붐볐다고 한다. 대서 사람들은 철도와 버스가 자주 있는 이곳 조성장을 주로 이용했고 학교도 이곳 중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딱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겨우 생색만 낼 정도로 작은 시골장이지만 예전엔 곡창지대라 싸전이 제법 번성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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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과 8일에 열리는 조성오일장은 이미 파장이었다. 조성면에서 태어난 이혁재(60) 씨 일행(아래 왼쪽)과 38년째 어물을 파고 있는 박영숙(68) 할머니(아래 오른쪽)

ⓒ 김종길

 


요즈음 조성의 특산물로 미니토마토와 다래를 들었다. 특히 다래는 인근에서 가장 많이 생산한단다. 예전의 장터는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역 쪽에 가까웠는데, 85년쯤 옮겨왔다고 했다.

예당에서 왔다는 사내가 함바집을 가리키며 거기를 꼭 촬영하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장날마다 꼭 선다는 함바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고 밖의 햇살이 너무 강한데다 빛이 들어올 공간이라곤 양철로 된 출입문밖에 없어 안은 대낮인데도 한밤중처럼 어둑어둑했다.

이옥님(70) 할머니와 정병기(73) 할아버지는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마다 함바집을 운영해오고 있다. 벌써 23년째라고 했다. 이곳에는 장날마다 밥을 파는 함바집이 두 군데 있는데 서로 붙어 있는 한 건물이다.

옆집 함바집 할머니가 이야기를 거든다.

"국밥 같은 건 없고 정식이여. 정식. 된장국이나 시래기국에 철따라 12가지 반찬이 나오제. 맛나부려. 특히 젓갈은 끝내주제."

"모두들 마이 도와주니께 많이 파는 거라. 예전에는 장날이면 막걸리 대여섯 말을 예사로 팔았제. 지금은 소주나 막걸리 몇 병이지만...."

정병기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조성 토박이, 할머니는 시집온 지 49년째란다.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그거 뭐 하게, 라고 말씀은 하시면서 싫지는 않은 내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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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째 오일장이 열리는 장날마다 함바집을 운영해온 이옥님(70) 할머니와 정병기(73) 할아버지
ⓒ 김종길


장터에서 38년째 어물을 팔고 있는 박영숙(68) 할머니는 인상이 좋으시다.

"예전엔 별 게 다 있었지라. 바지락, 꼬막, 새조개, 낙지가 수북이 쌓였제. 사람들이 많아 북적북적해서 걸어도 못 다닐 정도였제. 지금은 바다가 오염되어서 볼 수가 없단 말이시. 수확량이 솔찬히 줄어부렀어야. 올해는 특히 흉년이여."

파장에 겨우 남아 있던 어물전도 막판이다. 쟁반에 수북이 쌓은 키조개 관자를 단돈 만 원에 가져가란다. 장어를 손질하던 아저씨는 아직 장어가 손에 익지 않는다면서도 손놀림이 날렵하다. 그의 손놀림에 장어는 금세 붉은 맨몸이 된다.

백장어로 불리는 뱀장어는 징글맞을 정도로 크다. 다 큰 뱀장어는 바다로 돌아가는데 이때 몸이 은색을 띠어 은색장어라고도 한다. 장터 여기저기서 방송국에서 나왔냐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남도의 작은 시골장에서 볼 수 있는 순박한 풍경들이다. 비록 장은 파했지만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남도의 오후였다.

 


※ 이 글은 '코레일'과 '오마이뉴스'에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으로 연재 중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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