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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가야의 포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가야의 포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봉황동 유적에서 가야의 숨결을 느끼다.

복원된 가야의 고상가옥과 포구

한 줌의 흙에도 영혼이 있다. 하물며 수천년의 혼이 담긴 인간이 살던 역사의 땅이라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제아무리 웅장한 건물이라도 위압감만 주는 것이 있다면  깨어진 와당 한 조각이 인간의 상상을 무한하게 할 때도 있다.


봄날처럼 따사롭던 날, 옛 금관가야의 땅 김해를 찾았다. 역사의 중심에서 외치다 변방의 평범한 농부가 되어가는 훈훈한 집이 있다는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왠지 과거로의 긴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역사는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과거로의 긴 시간과 사색이 내겐 필요했었다.

가야시대의 배,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배 모양 토기를 참조하여 재현하였다.

천년의 시간이 잔디밭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유쾌한 소리에 묻혀오는 듯 하다. 시내 복판에 있는 봉황동 유적은 그다지 넓지 않다. 해상왕국을 자처하던 가야의 기마무사가 옛 왕궁터를 지키고 있다. 하얀 갈대에 묻힌 호수 위로 옛 집들과 배 한척이 한가로이 있을 뿐이다.


봉황동 유적지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반천 어귀와 낮은 구릉에 형성되어 있다. 가야인들의 주거시설인 고상가옥과 망루 등이 있어 가야인들의 생활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바닥을 높인 고상가옥은 습기가 많은 아열대 지방의 주거형태로 남방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시대 고상가옥 유적은 창원 반계동과 가음정동, 장유 아랫덕정, 기장 고촌리 등 가야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물 가까이에 집을 짓는 고상가옥이 가야에서 자주 확인되어 바다를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활발히 펼쳤던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봉황대는 일설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혹은 가야시대 해상교역상들이 북적대던 해상포구라는 설이 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이곳이 그 옛날 가야시대에는 바닷가였다는 사실이다. 이곳의 유적은 크게 가야의 포구, 가야시대의 고상 가옥 등의 주거지, 회현리 패총 등을 들 수 있다.


물가운데에 떠 있는 '가야의 배'가 눈에 띈다. 가야시대의 토기를 참고하여 만든 배라고 한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훌쩍 뛰어 넘은 배 한척이 주는 감동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바다를 건너 철을 수출했던 해상왕국 가야의 기상이 이 작은 배 한척에 실려있는 듯 하다.


이곳 구릉의 정상부에는 가야 말기의 애틋한 전설이 있는 황세바위가 있다. 가락국 9대 왕인 겸지왕 때 이곳 봉황동에 출정승과 황정승이 살고 있었다. 두사람은 각각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을 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세월이 흘러 황정승은 아들인 세를 낳았고, 출정승은 딸 여의를 낳게 되었다. 그런데 출정승이 그만 변심하여 딸을 남장을 하여 아들이라고 속였다. 그러나 세는 여의를 여자라고 의심하였고 어느 날 봉황대 근처의 바위에서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하자고 여의를 데리고 갔다. 결국 여의는 세에게 여자임을 털어 놓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망루

이 사실을 안 출정승도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둘을 약혼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가락국을 침입한 신라국에 맞서 세가 큰 공을 세우자 견지왕이 세에게 유민공주와의 혼인을 명령하였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던 세는 결국 유민공주와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의는 괴로움과 슬픔에 세상을 떠났고 세 역시 마음의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공주도 세상을 비관하고 출가하여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세와 여의가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한 이 바위를 오줌바위, 혹은 황세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봉황동 유적지는 회현히 패총 유적과 함께 사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